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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90일

 

후타바 공원은 언제나 생기가 돈다.
높은 언덕위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공원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언제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의미 있을 실장석들의 일상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 새끼를 낳았던 친실장의 자들이 몇 명 줄어들었다. 누구에게 먹히기라도 한 것일까. 노는 것을 자주 보았던 자실장 두 마리의 팔이 없어졌다. 아랑곳하지 않고 오늘도 즐겁게 논다. 자신들의 설명 불가능한 재생력을 믿고 있는 모양이다. 인간들을 보면 구걸하는 실장석들의 무리가 쓸만 한 애호파를 찾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서는 뾰로통한 표정을 한다. 저 인간에게서는 나올 것이 없어, 라는 눈치였다. 다른 자실장의 머리를 뜯어내어 피칠갑이 된 채 도망가는 성체 실장이 보인다. 어미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식의 몸을 붙잡고 뭐라 뭐라 외쳐대고 있다.

한 쪽 편에서는 소꿉놀이를 하듯, 친실장이 자실장 몇 마리를 데리고 산보를 다닌다. 손에는 작은 먹거리들을 하나씩 들고 있다. 사실상 산책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것은 후타바공원에서 저 친실장의 세력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실장석들은 그 실장 일가를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성체실장은 또 다른 실장석 가족을 만나 멈추어 서서 수다 비슷한 것을 떨어댄다. 사람들이 하는 행동과 다를 바가 없다. 그 두 가족의 일상에 자실장의 죽음이라던가 생존의 위협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실장석들이 후타바 공원 내에도 몇이나 존재한다. 공원에 즐비한 실장석들 사이에도 상류층과 천민층이 있다는것은 실장석들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상류층 실장석들은 덩치가 크고 예쁜 외모를 지니고 있으며 애교 부리는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더 많이 얻을 수 있는 식량의 양이 그들에게서 작은 차이를 만들어내며 결국 계급까지 나누어 놓았다. 어디를 봐도 인간의 삶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나무 뒤에서 작디작은 자실장을 강간하는 마라실장이 보인다. 저것도 여느때와 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오늘 하나 평상시와 다른 것이
있다면 그 아래 지쳐 쓰러진 자실장들이 하나 둘 셋...욕구불만인 녀석이다. 덩치도 크고 힘도 세 보인다.

마라실장이 나의 시선을 눈치채고 어떻게든 표정을 지어 사람이 빙긋 웃는것과 비슷한 모양을 만들어낸다. 우쭐해진 기분으로 자랑이라도 하는 것이려나..하지만 그녀석에게 다가가 화를 낼 기분이나 죽어가는 자실장들을 구해줄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은 그저 그것들을 바라보는 것일 뿐.
나는 후타바 공원에 즐비한 나무들과 다를 바가 없는 인간이다.







벤치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그들을 응시하다가 문득 커피가 마시고 싶다는 생각에 자리를 떴다.
작은 후타바 공원에도 커피를 파는 작은 가게들은 몇 개씩 있다. 가장 가까운 매점은 여기서 5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곳에 가려면 언덕길 끝까지 올라야 했다.

하지만 그 매점 근처는 실장석들이 잘 보이지 않았고, 사람들도 오는 일이 없었기에 오히려 나에게는 그러한 이유들로 인해 더욱 더 그 매점을 찾는 이유가 되었다.


공원의 커피들은 맛없기로 유명하다. 어떤 매점을 가도 똑같은 맛으로, 커피콩이 타버린 듯한 매캐함만 입술 끝에 남았다. 하지만 나는 맛을 위해 커피를 마시는 일은 없다.
커피를 마시고 있자면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짧은 시간과 카페인이 가져다 주는 각성이 머리를 헤집는 망상과 우울함에서 나를 벗어날 수 있게끔 해주었다.
뜨겁고 맛없는 액체를 넘기는 것에 정신을 집중한다. 입술과 코에 커피의 향이 스며든다...



“텟...”


작은 자실장의 목소리가 또다시 어디선가 들려 온다.

쉬는 시간을 방해받은 기분이었다. 실장석들은 역시 어디에나 있구나.

공원 중앙처럼 수다스럽게 재잘거리는 목소리가 들려 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나 둘 정도의 자실장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실장석들이 나에게 애교를 부린다던가 먹을것을 내놓으라고 보채는등의 귀찮은 행위를 극도로 싫어하는 성격이다.


공원에서 쉬고 있을때 흔히 말하는 분충들이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면 일부러 보란듯이 천천히 그것들의 자실장을 밟아 부수어주었다. 천천히 시간과 공을 들여, 제일 시끄럽게 소리를 지를것 같아 보이는 자실장의 팔과 다리를 구둣발로 밟아 으스러뜨리고, 그것이 테치거리며 자신의 어미를 찾을때 그 어미앞에서 천천히 배를 터트렸다. 이윽고 어미가 오로롱거리는 소리를 내며 피눈물을 흘리고 자의 목숨을 구걸할 때, 그것의 눈앞에서 벌벌 떠는 자의 머리를 밟아 으깨 놓는다.


살점이 뭉그러지면 끔찍함이 덜하다. 나는 일부러 어떤 친실장의 몇 번째 자인줄 알 수 있게 얼굴과 몸뚱이를 온전한 상태로 남겨 내장과 뇌만 터트렸다. 죽지 않은 자실장들은 온몸이 땅바닥에 붙은 채로 곤죽이 되어 어미를 찾고 어미는 남아있는 사지를 끌어안으며 연신 눈물을 흘린다. 그러한 잔인함에 다른 자실장들의 부모역시 자신의 자가 그리될까 두려워 황급히 자실장들을 감싸 안고 자리를 떴다.

이렇게 몇 번 나의 의지를 보여주니 나는 일종의 학대파와 같은 위치로 그들에게 각인되었다. 매일 공원에 와서 자신들을 바라보는 사람, 곁에 가서 음식을 달라고 하면 필히 자실장을 밟아 죽이는 나쁜 인간, 하지만 귀찮게 하지 않으면 건드리지 않는 이상한 인간쯤으로 그들에게 기억이 된 듯, 이제 실장석들은 나를 귀찮게 하는일은 없었고 더 이상 내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공원중앙보다 먼 곳에서 사는 실장석들에게는 나의 악명이 전해지지 않았는지 다른곳에서 휴식을 취하려 하고 있을때면 쟁알거리며 달려와 귀찮게 하는 녀석들이 아직도 존재했다. 밟아주면 그만이지만 나 역시 사람이기에 한 생명을 빼앗는것이 그다지 달갑지는 않은 것이다.

무리지어 살지 않는 녀석들에게는 본보기를 보여준다 해도 의미가 없고, 차라리 내가 자리를 비킬까 싶은 생각이 들어 벤치에서 일어서자,
나무밑에서 ‘그 녀석’이 놀고 있는것이 보였다.





별다를 것도 없는 자그마한 자실장 한 마리는 잘 먹지 못했는지 팔다리가 다른 녀석들보다 가느다랗게 보였다. 작은 체구이다. 더러워진 옷과 두건역시 같은 모양이었으나 유난히 속옷만은 깨끗한것이 친실장이 신경쓰고 있으려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자실장은 인기척에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만 인간이 온 것을 보고는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는데 적록의 눈이 유난히 반짝거리며 빛났던 것이 유독 기억에 남는다.

“테..”

반짝임도 잠시, 자실장은 내게서 등을 돌려 바닥에 돌을 가지고 원을 그리거나 돌을 모아두는 것 같은 놀이를 혼자 하며 놀고 있었다. 인간에게는 그다지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귀찮게 하지 않는 자실장이라면 최고의 관찰 대상이다. 어차피 할 일도 없었고 기분이 나아지지도 않아 나도 자리에 앉아 그것의 놀이를 지켜보았다.

색색깔의 돌은 자실장의 주위에 잔뜩 있었다. 빨갛고 파랗고 노란 돌들을 골라 일렬로 세워 두었다가 다시 동그라미를 두 개 만들어본다. 탑이 되게 위로 위로 쌓았다가 그것이 와르르 무너지자 뭉툭한 손으로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다.

땅을 어떻게든 파내 그 속에 돌들을 숨기고 다시 흙으로 덮는다. 나무까지 달음박질로 뛰어갔다 온 뒤 눈을 감고 더듬거려 돌을 숨긴 장소를 찾았다. 땅을 파자 자실장이 숨겼던 돌들이 나타났는데 보물처럼 가지고 놀았던 소중한 돌을 찾자, 다시금 그 두 눈에서 반짝거림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은 나름 볼 만한 장면이었다.
마치 인간의 아이처럼 의미없는 놀이를 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혼자서.
작은 돌을 줍고 뿌리고 모아대며 테치거리며 즐거워 하고 숨기고 찾아내고 발견하며 기뻐하고 있다. 이 자실장의 머릿속은 콘페이토나 실장푸드보다도 놀이가 더 중요한 것처럼 보였다. 이런 실장석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나 역시 그녀석이 노는 모습을 보는 것에 빠져들어 한참을 말없이 바라보게 되었다.


또르르.
돌멩이 하나가 내 발 근처로 굴러왔다. 자실장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나 경계도 없이 내 근처로 다가와 내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돌멩이만을 주워서 간 뒤 등을 돌리고 같은 놀이만을 계속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괜한 장난기가 든다.
나는 작고 예쁜 돌을 골라 그녀석의 주변에 살짝 던졌다. 자실장이 ‘툭’ 하는 소리를 듣고 이게 무엇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니 이제껏 보지 못한 예쁘고 빛나는 돌멩이 하나가 자신의 곁으로 데굴데굴 굴러온 것이었다.

두 눈에서 다시금 반짝임이 쏟아져 나왔다.

세상에 어떤 귀한 콘페이토를 가진 실장석보다 자신이 가진 돌멩이가 더 고귀한 것이라는듯 자실장은 돌멩이를 꼬옥 껴안고, 맨질한 면에 얼굴을 부벼 본 뒤 맘에 들었는지 자신의 옷에 붙은 주머니 안에 조심히 넣어 두었다.

예상 밖의 행동이다. 나는 그 희한한 장면이 다시 보고 싶어 주변에서 작고 예쁜 돌멩이들을 골라 그것의 주변에 하나 둘씩 던져 대었다.


“..테치?”
“아..”

돌멩이를 던지며 노는 놀이에 집중하다 보니 어느새 자실장은 나의 앞에까지 와 있었다. 그때서야 나는 그녀석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볼 수 있었다.
들실장의 표본이라 해도 좋을만큼 전형적인 모습을 한 자실장이었다. 작고 꾀죄죄한 모습에 콧물이 하얗게 말라붙어 있었으며 여기저기 생채기도 보인다.

눈이 유난히 반짝거린다는 것 외에는 별 특징이 없었고 그마저도 돌멩이를 주웠을 때 말고는 여느 실장석들의 눈과 다를 것 없이 어둡게 가라앉은 색으로 보여졌다.


“..테치?”


그것은 내 손에 들린 돌멩이를 기대감 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흔한 아첨포즈도 취하지 않는다. 반짝이는 눈을 빛내며 돌을 바라볼 뿐... 그 눈빛에 못 이겨 나는 그것을 그녀석에게 건내어 주었다.

“.....자.”
“텟-치!”


그녀석은 나름의 감사 인사인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내 손에서 돌멩이를 빼앗듯 낚아채 도망갔다.

양갈래 머리가 바람에 나풀댄다. 바람결에 팔랑인 치맛자락 끝단에는 하루종일 그렇게 놀아댄 흔적인 듯 흙투성이 먼지가 가득했다...






집에 오는길. 발길에 돌멩이가 채였다. 이상하게 나 역시 저 돌들을 이전과는 조금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맨질하고 작고 예쁜 돌멩이.

돌멩이를 얻었을 때 자실장의 행복한 표정이 떠올랐다. 돌멩이에 무언가 주문이라도 걸려 있는것일까?
의미 없는 나의 시곗바늘같은 삶에도 행복이 찾아올까 싶어 나도 모르게 작은 돌멩이를 주워 주머니 속에 넣었다.



“팀장님, 뭐하세요?”
“아..뭐좀..그냥.”
“새나 물고기라도 키우시는 거예요? 요새 자꾸 돌멩이 주우시네..”
“그러게.”



자켓 주머니 속에 맨질한 돌들이 달그락거리며 존재를 알린다. 자실장의 행복했던 표정이 잊혀지지가 않아 나도 모르게 식사후에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울 때나 수다를 떨며 커피를 마실 때 예쁜 돌들이 보일까 싶어 눈으로 돌멩이들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모아댄 돌들이 열몇개나 된다. 주변사람들은 내가 새 혹은 물고기를 키우는 줄 알고 있는 모양이다. 둥지나 어항에 깔아줄 돌멩이들? 이라며 물어보았지만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요새는 누군가와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귀찮다. 말이 늘면 설명을 해야 하고 설명을 하다 보면 내 이야기를 해야 했다.


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어쩜..이라며 혹자는 눈물을 흘렸고 혹자는 술약속과 밥약속등을 하며 기분전환을 시켜주려 했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나에게 부담이 되어 다가왔다. 돌멩이를 주우며 반려동물을 키우는 나의 모습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바라보려는 시선이 내 등뒤에 머문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그냥 그렇게 두면 된다.



집에 돌아올 때면 내 주머니마다 돌멩이들이 몇 개씩 들어있었다. 딱히 뭐를 혹은 누군가를 위해서도 아니었다.

자실장이 돌멩이를 모아보듯 나도 한번 모아보는 것이다.






집에 돌아와 주머니속의 돌멩이를 바라보고 있으면 비슷하게 생긴 작은 존재 하나하나마다 색다름을 가지고 있음에 작은 감동이 일어났다. 손안의 차가운 알갱이들이 아주 약간의 위안을 가져다준다. 내게는 다행이었다. 무엇인가 집중할 만한 행위가 생겼다는것이.


오래간만에 후타바 공원에 나가 보았다. 퇴근길에 들른 공원은 오히려 저녁때가 부산스워 보였다. 먹이를 주는 애호파와 그들을 아랑곳 않고 실장석들을 괴롭히는 학대파, 실장석이 아닌 애호파를 괴롭히며 희열을 느끼는 ‘이상한 학대파’ 와 공원 관리인까지...


퇴근길에 들른 사람, 이른 저녁 후 산책을 나온 어르신, 하교 후 실장석들과 노는 여고생부터 실장석을 뜯어내며 장난치는 아이들 무
리... 공원 중앙은 발 디딜 틈 없이 복닥거렸다.실장석들이 공원에 좋든 나쁘든 나름의 활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어차피 공원 중앙은 나의 영역도 아니다. 나는 발걸음을 돌렸다.


매점에서 맛없는 커피를 하나 주문한 뒤 다시 언덕의 벤치에 올라가 앉았다.


오늘 역시 아무도 없다. 중앙은 저렇게나 시끄러운데 여기는 나 혼자라니. 이상한 생각이 든다.
둘러진 적막이 사랑스러웠다.


“테..”
“응?”

발치에서 작디작은 실장석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이전의 자실장이었다. 돌멩이를 좋아하던 자실장. 실장석들은 비슷비슷하게 생겼다고는 하나 그 자실장만큼은 알아 볼 수 있었다. 내가 그녀석을 알아보는 이유는 알수 없었지만 어쨌든 이녀석은 그때의 그 녀석이었다.




자실장은 나에게 작은 꽃을 내밀었다.
실장석이 인간에게서 꽃을 내밀때는 두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친교의 의미에서 건내는 일종의 ‘선물’이며 다른 하나는 그 정반대인, 자신의 배설구에 기분좋은 일을 해주길 바라는 의미에서의 ‘도구’였다.
얼굴이 찌푸려졌다. 보통 이때쯤 링갈을 켜면 “메로메로를 바라는 테치! 와타시에게 아이를 낳게 해주는 테치! 총배설구에 꽃을 쑤셔넣어 인간의 손으로 기분좋게 해주는 테치!” 따위의 역겨운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꽃을 건내는 실장석들은 거의 다 그런 희롱을 바라며 기대감과 욕망에 가득찬 눈길을 보낸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를 생각하던 사이, 자실장은 무심히 내게서 등을 돌려 나무 아래에 다시 자리를 잡고 앉아 작은 놀이들을 한다. 꽃은 주었으되 더 이상의 관심은 없어 보였으며 팬티를 벗으며 총배설구를 가리키는 더러운 행위도 하지 않았다.



나와 친구가 되고 싶었을까.요전의 예쁜 돌이 고마웠던 모양일까...

괜히, 마음이 짠했다.
바람결에 꽃이파리가 나폴나폴 흔들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꽃이 뭐라고 나같은 인간에게 감동이 되어 다가올 수 있을까.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은 별것 아닌 선물 한 조각.




“이봐.”
“..테?”


자신을 부름에 자실장은 귀찮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무언가 줄만한..먹을게 없을까 생각을 하다가 주머니속에 가득한 돌멩이가 생각났다. 이전처럼 좋아하려나?



“이거..줄까?”

모두 꺼내 보니 열몇개나 되었다. 그것을 땅바닥에 내려두자 자실장은 예의 그 반짝이는 눈을 하고 돌멩이 무리로 다가가 양손에 가득 돌들을 쥐고 즐거워했다.


“좋아하니 다행이네.”


자실장은 말귀를 알아듣는 모양인지 연신 응응 하며 고개를 끄덕이다가 돌들을 내팽겨치고 어디론가 달려갔다.


갑자기 요전처럼 도망이라도 간것이려나 허탈한 마음과, 슬슬 어두워져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멀찍이서 자실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치~!!”


부름에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보니, 자실장은 예의 그 작은 꽃송이를 한가득 손에 안고 나를 향해 뛰어오며 기쁘게 웃음 짓고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에서 자글거리는 별빛이 쏟아졌다.
코에 알싸하게 느껴지는 꽃향기에 정신이 아찔하다.


자실장의 미소가 꽃처럼 마음속에 가득 차올랐다.





그 뒤로 나는 종종 저녁 즈음 공원에 들러 홀로 놀고 있는 자실장을 만나게 되었다. 링갈까지 구입해 가 실장석과 신변잡기적인 대화를 하였다. 주로 나는 묻고 듣는 쪽이었다. 자실장은 내 생활따위는 궁금해 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이야기는 꺼려하지 않고 잘 말해 주었다.
엄마가 없는 자실장은 ‘동생쨩’만 하나 데리고 있었는데 서로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생쨩은 음식 모으기를 더 중요시하는 관계로 아무래도 자실장과는 잘 볼 수 없다 하였다. 사실상 노는것에 집중하는 자실장 본인이 더욱 더 괴상한 것임을 본인 스스로도 알고 있는 듯 했다.

“상관없는 테치.”
“상관이 없어?”
“어차피 다들 따로따로 잘 살고 있는 테치. 나는 이게 즐거운 테치.동생쨩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테치.”


자실장은 내가 곁에 있어도 관계치 않고 홀로 놀이를 즐기었다. 나무에 돌을 굴려 꺄르르 웃기도 하고 돌로 무늬를 만들어 보기도 한다.



다른 실장석들과 놀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그들은 그런 ‘놀이’에는 관심이 없다. 이상한 녀석 취급하며 사라질 뿐이었다. 자실장은 뾰로통한 얼굴로 내가 함께 놀아줄 수 있는지를 물어보았으나 나 역시 녀석의 놀이에 참여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것보다는 홀로 노는 자실장을 바라만 보는편이 더 좋았다. 머릿속에 가득한 음습한 잡념들이 사라진다. 자실장과 만나고 돌아온 날이면 조금 더 깊게 잠을 자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자기와 놀아줄 생각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챈 자실장은 내게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질문에 대답도 귀찮은듯 적당히 형식적으로만 응대해 주는게 느껴졌다.


나도 그녀석의 관심을 끌어 귀찮게 되고픈 생각은 없다.
우리는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공존하였으나 그저 그뿐. 나는 자실장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허공에의 응시와 다를 바 없었으며 자실장은 내가 준 돌들로 놀이를 하였으나 나를 의식하지 않았다. 예쁜 돌들을 골라주면 기쁜 표정을 하며 꽃송이를 건내어 준다.
deal&deal.




하지만 나는 사실 작은 위안을 얻었었다.

혼자였으면 괴로웠을 시간들이 조금씩 흩어져간다. 의미 없는 놀이와 수다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속에서 단단히 뭉쳐져 있던 꽉 막힌 답답함들이 조금씩 풀어지는것이 느껴졌다.
하루 중 그 시간 뿐이었지만 그 한두 시간이나마 내게는 설렘과 기대를 주는 것이었다.
특별히 하고 있었던 말들도 기억나지 않고 놀이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것 또한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아쉬운 느낌이 든다. 그때의 귀여운 수다들이 기억난다면 그래도 혼자였을때 하루중 몇분간은, 다만 십분이라도 이십분이라도 쉴 곳이 생겼을텐데.

각성제와 알콜은 복잡한 뇌를 안그래도 더욱 더 꽉 조이고 있었다. 사소한 것들 하나 두 개가 기억나지 않아 나를 미치게 만든다.

마음속에서 "그때가 더 행복했었지?라고 책망하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사실이다. 그 때가 제일 행복했었던 것 같다.







그 후로 한동안은 공원에 갈 수 없었다.
월말에는 늘 일이 바쁘다. 월초가 되도 마찬가지이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시점에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새로운 컨셉과 아이템, 업무는 과중했고 모든 것은 내 손에서 결정되어야만 했다.

일이 바빠질수록 나는 말수를 잃어갔다.
시스템의 노예가 되어있다는 생각이 든다. 다른 한 편에서는 내가 가진 자리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흘긋대는 시선이 느껴지며 이것을 쉽게 내어 줄 수 없다는 오기가 치솟아 올랐다.
직책이 낮지 않았기에 퇴근시간이 늦은 편은 아니었지만 집에 오면 항상 녹초가 되어 아무일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저녁을 제대로 챙겨 먹은것이 언제인가 하는 생각을 한다.


친한 친구들이 몇이나 외국에 취업을 했다. 밤이 되면 목소리가 그리워지는, 소중한 친구들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어보면 로밍중이라는 메시지가 들려왔다. 지금 여기는 밤인데 거기는 몇시려나 하고 한참 시간을 헤아리다가 술이나 마시고 마음을 달랜다.

내가 주저하는 사이 그들의 마음 역시 같은 이유로, 멀어지겠거니 싶다. 이제는 크게 상관이 없는 이야기지만.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것들은 핑계일지도 몰랐다.




언제서부터 내가 엉망이었을까 생각해 보니 딱 20년이라는 결론이 나왔고, 그날은 베개가 젖도록 울며 잠이 들었다.



살다 보면 깨닫게 되는것들이 있다.
외부에의 자극과 관심을 차단하고 온전히 생명의 에너지를 자신의 내부로 기울인다면 들려오는 소리들이 있는 것이다.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몸을 웅크리고, 내 안에서 어떤 비명소리가 들려오는지 느껴 보았다.

낮게 웅얼거리는 빗소리와 벌레 먹어 구멍 난 판자 사이로 새나오는 피리 같은 바람소리가 들려온다. 시작된 소리들은 그치지도 않고 마음을 두들기고 종래에는 피멍이 들도록 몸을 훑고 지나가, 나는 점점 더 마음이 메마른 사람이 되었다. 혹은 약간 조증으로 정신 병자같은 말을 쏟아내는 나날들이라던가.


슬플 이유도 없는데 견딜 수가 없어져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잠들 수 없는 시간들이 늘어나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않고 있거나 혹은 나와는 관계도 없는 사람을 붙들고 애교를 부려가며 수다를 떤다.



-나는 오늘 이랬어 너는 어땠어? 슬프다 기분이 병신 같아 오늘 저녁엔 뭐해 내일은 뭐할꺼야 니가 좋아한다는 그애는 좀 어때? 연애에 진전은 있어? 새로 나온 그 게임은 재밌냐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오늘 저녁엔 뭘 좀 먹지 커피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해 요새 매일 즐겁게 술 마시는데 너도 한잔 할래? 속상한게 뭐냐고? 그런 거 없어.내가 우울해보이냐?말도 안돼.이렇게 인생이 신나는데. 한잔 해.
...-



샤워를 하다 갑자기 몰려오는 욕지기에 나오지도 않는 위액만 토하다 변기를 붙들고 잠이 든다. 내내 그랬다.





꿈을 꾸었다.

가슴속에서 나무가 자란다.

세상을 다 덮을 만큼 거대하고 어둡고 끔찍하게 생긴 기괴한 나무. 처음에는 씨앗만 있던것이 뿌리를 내리고 줄기를 뻗어 잎사귀를 틔우고 꽃을 피웠다가 바닥에 꽃머리를 떨어트린다.

검고 더러운 꽃을 집어든 사람들은 나에게 말을 걸려 하지만 나는 꿈속에서도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 나무에 앉아 쉬었다. 어둡고 괴이해진 상태에서 편안함이 몰려온다. 몰려 온 사람들의 손가락질 따위는 상관없이 웅크리고 앉아 꿈에서도 잠에 빠져들려는데,


톡 톡 하고 무엇인가 내 몸에 다가와 부딪히는 것이 느껴졌다.

졸린 눈을 부비며 간신히 눈을 뜨고 아래를 보니,


자실장 한 마리가 눈을 반짝거리며 얼굴가득 미소를 띄우고
예의 그 작고 예쁜 돌멩이들을 나에게 던지고 있었다.





나는 꿈을 깨자마자 공원으로 달려갔다.



새벽 3시였으나 아랑곳 않고 옷을 대충 주워 입은뒤 공원으로 뛰어간다. 이 시간에도 공원에는 몇몇 사람의 모습이 보였으나 그것들은 실장석들에게 끔찍한 짓이나 하는 ‘직스파’들이다.

문이 닫힌 매점을 지나 한걸음에 언덕 위 벤치로 뛰어올랐다.

누구도, 무엇도 있을 리가 없었다.
자실장이든 친실장이든 작디 작은 구더기 한 마리 역시 보이지 않음은 당연했다.

당연하였으나 허탈해진다. 사실 보고픈 무엇인가가 내가 원할 때 마법이라도 부린 듯 뿅 하고 나타나는것은 어린애들 동화나 순정만화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있을 수 없는 이야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을 위로해 준 것은 나무 아래에 가득한 예쁜 돌멩이들.

작은 자실장의 흔적 이었다.


돌멩이를 찬찬히 훑어보니 자실장이 스스로 모은 돌멩이와 내가 그녀석에게 준 돌멩이를 구분하여 산을 쌓아 놓은것이 보인다. 자신이 모은 것은 아무렇게나 대충 모아져 있었으나 내가 모은것은 조금 더 견고히 그리고 촘촘히 산을 이루고 있었다.

자실장은 돌멩이를 소중히 생각하고 있었다. 내게서 받은 돌멩이를 말이야.

그 모습을 보자 맘속에서 무엇인가 뜨끈한 것이 치밀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지. 이상하고 우스운 일이다. 어리기 그지없는 자실장 한 마리에게 이런 감동을 느끼다니.

그럼에도 나는 깊은 만족감을 느끼고 다시 집으로 들어와 꿈도 없는 잠을 잤다.
몇주 만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고요하고 포근한 잠이었다.






그 뒤로 나는 자실장에게 조금 더 깊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의 시작이 무엇인지 끝이 무얼지 혹은 정의를 내릴수 있는 마음인지는 나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무엇인가 내 속에서 시작되었고 그것이 점점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는 것 말고는 나는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이 상황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여전히. 앞으로도. 이젠 아마도 평생.




“오신 테치?”

고급형 링갈을 통해, 본연의 음색에 가까운 청명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대답대신 이틀 내내 밖에 다닐때 마다 바닥을 보며 주워 모은 예쁜 돌멩이들을 내밀었다. 와 하는 기쁜 탄식과 함께 자실장은 꽃을 찾기 위해 나가려 했으나 나는 그대로 자실장을 불러다 앉혔다. 꽃은 더 이상 내게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한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그리고 진득히 자실장을 관찰하고 싶었다.


좋아하는 음식은 무엇인지, 놀지 않는 시간에는 무엇을 하는지, 동생쨩은 어떤지 어미는 왜 없는지 골판지 상자는 어딘지 등등을 알고 싶었으나 예쁜 돌멩이를 받은 후에는 놀이에 집중해 나에게는 별 이야기를 해주지 않는 시간들이 더 많았다.

어느날 인가는, 실장석들이 제일 좋아한다는 최고급 콘페이토를 한봉지 들고 같은 시간 벤치에 방문하였었다. 그러나.

“지금은 놀아야 하는 테치.기다려 주는 테치.”라고 말한 뒤 매일 같은 모습의 의미없어 보이는 놀이를 언제까지고 계속 한다. 땀방울이 옷에 흐르고 머리를 흠뻑 적실때쯤이나 되어서야 내게 눈길을 돌리고 받아든 콘페이토에 꾸벅, 감사인사를 표했다.



나와 자실장은 벤치에 걸터앉아서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

“하고픈 게 있어?”
“하고픈 일 테치?”
“지금은 어리니까..앞으로 이렇게 하고싶다던가 저렇게 하고 싶다던가.”
“음...”


자실장은 골똘히 생각한 후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마쨩들 같은 성체 실장이 된다면 하고싶은게 딱 하나 있는 테치.”
“뭔데?”


“마라실장이랑 신나는 일을 실컷 하고 튼튼한 자를 낳고 싶은 테치.”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벤치에서 굴러 떨어졌다. 자실장은 너무나 평온한 표정으로 짝짓기를 이야기했다. 사실 실장석이라는 것들과 속마음을 나누며 이야기한적은 처음이었다. 실장석들은 모두 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려나 싶은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살을 살짝,찌푸렸다.


“그게 무슨 헛소리야.”
“당연한 것인 테치. 마라실장과 한 뒤에 자식을 가지면 정말 훌륭한 자를 낳을수 있다고 이야기를 많이 들은 테치. 그것이 아니면 인간님의 흑발 자식도 훌륭하다 이야기 들은 테치.
크게 자랄 수 있다면 꼭 그런 자를 갖고 싶은 테치. 그것은 실장석들의 다 같은 소원인 테치.인간님들도 당연한게 아닌 테치? 좋은 씨앗을 가진 사람과 짝짓기해서 좋은 자를 낳으면 좋지 않은 테치?“

“안 그런 사람도 있어.”
“와타시는 마라쨩들 너무 좋아하는 테치. 하지만 역시 무서운 테치. 잘못하면 죽어버린다고 마마쨩이 많이 이야기 해주었던 테치. 사실 그것보다는 여기서 돌을 가지고 노는 편이 더 재밌는 테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재미인 테치..”

“그러냐...”

“무엇보다 기분이 좋다 들은 테치. 경험해본적 없지만인 테치..언젠가는 경험할 수 있을까 테치?와타시는 너무도 궁금한 테치이..”

“글쎄나..”

“아니면 인간님이 흑발 자식을 낳게 해주는 테치?”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마!!!!”

“그럴줄 알았던 테치. 와타시는 계속 돌이나 가지고 노는게 나은 테치. 쓸모없는 인간님 테치..”


질색은 하였지만 얼굴이 빨개지는게 느껴졌다.
이런 맹랑한 꼬마녀석 같으니.그런 것에 전혀 흥미는 없다. 나는 소위 말하는 ‘새벽의 직스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작은 자실장의 머릿속이 조금 더 궁금해진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시간은 잘도 흘러 간다.



“어째서 매일 이곳에 오는 테치?”
“너를 구경하려고.”
“키워주는 테치?”
“키워...줄수는 없는데.”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나에게 잘 해주는 테치?”
“모르겠어.”


나는 자실장과 함께 둘이서 가득 모은 돌멩이를 바라보았다.
돌멩이들은 이미 산을 이뤄 자실장의 키보다 훨씬 더 커져 있었다. 모두가 자실장들이 좋아하는 돌들이다. 나에게는 비슷해보이는 돌들을 자실장은 잘도 구분했다.


“네가 돌멩이를 모으는 것을 즐기지만 집으로 갖고 돌아가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까?
좋아하지만 굳이 내것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은거야. 그저 두고 보고 싶고 함께 놀고 싶은거지.”
“..그런테치?”
“사실 나도 잘 모르겠어.”
“하지만 돌멩이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테치. 나는 돌멩이를 좋아하지만 돌멩이가 나를 좋아하는지 잘 모르겠는 테치..”

자실장은 예쁜 돌멩이 하나를 집어들어 돌멩이에게 입을 대고 속삭인다.

“좋아하는 테치-!”
“돌멩이 너무 사랑하는 테치-!!”

“돌들이 알아듣냐?”

“알 수 없는 테치. 대답이 없는 테치.
내가 돌을 좋아하는게 의미가 있지, 돌들이 나를 좋아하는게 의미가 있는 테챠?”

“나에게도 너는 같은 의미인 거야.”

“테치?”

“몰라도 할 수 없어.”



자실장에게 시간은 언제나 느긋해 보였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저녁의 그 시간은 손안의 모래알같이 재빠르게 소실되었다.






무언가에 빠지게 될 때는 항상 제각각의 이유가 있다. 외모, 성격, 능력, 말투, 매력, 몸매, 재능 그 외 등등..하지만 일단 마음이 가버리고 난 후라면 시작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별 해괴한 같잖은 것에도 탄식을 하며 그것이 주는 독특함을 관찰하게 되니 말이다.



그녀석은 뭉뚝한 손으로 가끔 나에게서 실장 푸드를 한두알 받아들고 부스러기를 여기저기 떨어트리면서 먹는다. 부끄러워하는 기색도 없이 벤치 뒤로 돌아들어가 볼일을 본뒤 오늘의 '대변과 엉덩이 상황에 대해 나불나불 이야기'해댄다. 돌들에 대해 이야기할때는 유난히 눈을 반짝이며 돌들을 가지고 노는게 자신에게 주는 즐거움과 행복과 재미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눈빛과 손짓과 목소리를 즐거운 기분으로 감상하고 있었다. 그다지 예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 시간과 풍경과 옆모습으로 비치는 낙조는 아직도 내 머릿속에 선연했다. 죽을 때까지 잊을 수는 없으리라.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는 벤치에 앉아 시간을 내내 보내도 자실장이 놀러 오지 않는 날들이 있었다.
사실은 적지 않았다.

점점 더 늘어났다.

놀이 말고도 실장석도 실장석 나름대로의 삶의 사이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 서운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하루 안에서 유일한 안식이었기 때문에 안식처를 빼앗긴 나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뾰로통해져 아무곳에나 심술을 부려 댄다.

기다리는 동안 콘페이토나 얻을까 싶어 벤치에 이따금씩 찾아오는 다른 실장석들을 괴롭힌다던가 그녀석하고 열심히 모은 돌멩이들을, 특히 자실장이 가장 좋아하는 소중한 돌들을 되는대로 아무곳에나 던지거나 하는 등의 의미 없는 일들 말이다.

작은 분노들을 이기지 못해 여기저기 화풀이를 해대며 돌이나 던지고 있던 사이 발치에 작은 실장석 하나가 다가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제는 항상 켜져 있는 주머니 안의 링갈을 통해 조심스런 말투가 들려왔다.




"...이게 사는 집 근처로 굴러온 테스...혹시 잃어버리신 주인인 테스?"


중실장쯤 되보이는 녀석이었는데, 흔히들 보이는 다른 실장석들과는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그란 두 눈에 귀여운 얼굴,통통하고 뽀얀 볼과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한 옷차림은 집이 근처라는 중실장의 원래 신분이 사육실장이었음을 짐작케 했다.


"저쪽에 놓아둬."
"알겠는 테스.."


조심스런 태도로 다가가 돌무덤위에 자실장의 보물을 제자리로 가져다 놓는다. 그 상냥하고 소심한 행동에 어쩐지 내 마음은 조금 풀어져 있었다.

그것보다도 뭐든간에 말이 통하는 것과 이야기하고 싶었을런지도 모른다. 나긋하고 조용한 중실장의 태도는 좋은 리스너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아 보인다.


"이거라도 받아 둬. 고맙다."


주머니속에서 실장푸드를 몇알 챙겨주자 방긋방긋 웃으며 정중히 인사한다.


"고마운 테스.저녁거리가 해결되어 행복한 테스,.,"
"여기서 먹고 가도 괜찮은데."
"괜찮은 테스?"


다시 중실장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나와 조금 떨어진 벤치에 몸을 기대 앉았다.

중실장의 이름은 '미키'라고 했다. 예전의 주인이 지어준 이름으로, 지극한 사랑을 받았던 것 같은 느낌이었고 몸에 속속들이 배인 예의범절이나 배려등이 미키의 높았던 신분을 잘 보여주었다.나는 미키와 함께 의미없는 잡담들을 나누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들실장이 된거야?"

"...주인님을 사랑했던 테스."

"그렇다면 더욱더 함께 있어야 했던 것 아니야?"

"힘들었던 테스. 주인님은 얼마전에 결혼하셨던 테스.
와타시는 알 수 있었던 테스. 주인님의 여자주인님은 나를 굉장히 싫어했던 테스..
주인님과 함께 자지 못하고 함께 식사하지 못하는건 괜찮지만.."

"그런데?"

"주인님이 여자주인님과 싸우는게 속상했던 테스. 두분은 매일 나 때문에 화내고 싸웠던 테스. 여자주인님은 나를 다른 곳에 가져다 주길 바랬지만 주인님은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말하신 테스. 매일매일 싸우고 매일매일 화냈던 테스."
"..."

"여자주인님의 뱃속에는 아기쨩이 있었던 테스. 여자주인님은 몇 번이나 병원에 실려간 테스. 주인님은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 하셨지만 나는 주인님이 속상해지는 것이 더 마음 아팠던 테스. 그래서.."

"그래서 나왔구나...."


"공원에 올 때마다 봐 두었던 테스. 좋은 자리를 찾았던 테스...공원에 산책 올때마다 푸드를 모으고 콘페이토를 저장해놓아 아직도 조금 편하게 지낼 수 있는 테스.다행인 테스.."

"..속상하지 않아?"



미키는 슬픈 눈에 작은 미소를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실장석의 얼굴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미키는 입을 뗀다.


"..내가 어떻게 해도 해줄 수 없는것이 있는 테스...
주인님의 자녀를 가진다거나 하는 일은 생각조차 않는 테스. 그건 내가 해줄 수 없는 일인 테스.
주인님도 힘들겠지만 아기쨩을 위해 노력해 주어야 하는 일인 테스. 아기쨩은 아마도 실장석인 나보다는 훨씬 더 주인님에게 소중할 것인 테스.
실장석들은 많고 많은 테스. 나도 그중에 하나인 테스..내가 없어져 다들 행복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게 옳은 테스."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담담히 말하는 미키를 보며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각자의 세계.
나름의 세계.
내가 분풀이로 던져버리고 죽였던 실장석들에게도 다 각자의 세상이 있다.

첫만남, 나를 방해하는 미키에게 화가 나 이 아이에게 해꼬지를 했다면 이 슬픈 미키의 이야기는 그저 사라지고 말아버릴 것이었던 거다. 이제까지 내가 실장석들에게 아무런 가책없이 행했던 일들이 조금 후회스러워졌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런 저런 이유로 나에게 죽어간 실장석들을 위해 작은 기도를 했다.





내가 그시간에 그곳에 오는 것을 알고서부터 자실장을 보게 되는 날보다 미키를 보게 되는 날이 많았다. 자실장과 미키는 내게 분명히 다른 위치였지만 미키 역시 감사하게도 시간을 잊게 해주는 따뜻함이 있었다.

자실장의 존재처럼 강한 마음이 솟아오르지는 않았지만 미키는 그 부드러움과 사려깊음으로 나름 나를 매만져 주었다. 감사할 따름이다.

자실장에게 ‘다른 감정’을 가지게 된 후부터 만남이 기대될지언정 편하지는 않았었는데, 미키를 만나면 어쩐지 자실장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느낌이 들어 마음이 즐거워졌다 . 미키는 나의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 자실장... 테스까..?"
"응. 사실 이곳에 오는게 내가 말했던 자실장을 만나기 위해서였는데..요새 도통 보이지를 않네."
"알아봐드릴 수 있는 테스. 아마도 그 자실장의 집은 여기서 멀진 않은 테스..같이 찾아가 드리는 테스까?"


자실장의 집이라.
찾아가 보고 싶은 마음이 반, 이곳에서 만나고 싶은 마음이 반 공존했으나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후자를 택하게 되는 것이었다. 항상. 미키는 항상 물어보았지만 나는 항상 거절했다.

집앞에 찾아가 인사를 건네면 이상한 사람 보듯 나를 무시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 인간이 왜 여기까지 나를 찾아온거지? 정신 나간 테치?스토커인 테치? 라며 거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일견 친해 보이는 듯도 했으나 사실 그 녀석에게 내가 어떤 의미일지 알 수는 없다. 나 스스로도 그녀석이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 수 없으니 말이다.

자실장이 우리집 앞으로 찾아와 인사를 한다면 나 역시 어이없어할지도 모르겠다. 조금 달콤하긴 할 것 같지만 역시 생각해본 적도 바라지도 않는 망상에 불과하다.



자실장과 함께 커피숍에 가서 커피와 핫초코를 마신다거나 흔히들 하는 애호파처럼 목줄을 묶어 거리를 다닌다거나 혹은 실장숍에 가서 드레스를 사준다거나 하는..?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것은 내가 원하는것이 아니었다. 흔한 사육실장으로 구속하고 개마냥 집에서 기르고 싶은것이 아니다.



상대를 알아야 어떠한 그림이 그려질진대 나는 맹세코 자실장을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본 적도 없었다.




"아마도 인간님은 자실장을 좋아하는 테스."
"그래. 그건 그런 것 같네."
"키워주면 좋지 않은 테스? 데리고 와 집에서 길러주면 행복할 텐데 테스."
"그녀석은 음식이나 포근한 잠자리보다 돌멩이를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던데,
내가 그시간을 빼앗으면 좋지 않은게 아닐까? 미움받을것 같은 생각이 들어."

"테에에에에?그 자실장이 조금 이상한 구석은 있지만 그래도 실장석인 테스..
모두들 원하는 것을 그 자실장도 원하는 테스. 인간님 너무 어렵게 생각하는게 아니신 테스?"

"몰라."

"정말로 자실장에게 사육실장보다 돌멩이와 나무가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테스?와타시는..와타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테스!그런 실장석은 본적이 없는 테스!"

"그런데 나랑 같이 있어도 이야기를 하던가 나랑 논다기보다는 돌이나 던지고 돌이나 모으고 놀던게 말이야. 진심으로 돌을 정말 좋아하는게 아닌가 하고.
그런 시간을 내가 빼앗으면 안되는거 아닐까?"

",,,조금 다른 생각이 드는 테스."
"무슨?"
"돌멩이를 가지고 논다는 핑계로 인간님이랑 놀고 싶었던게 아니었던 테스?
자실장도 인간님을 처음 겪어봐서 어떻게 노는지 몰랐던 테스...?"

"그런것까지 내가 다 알고 있어야 해?"
심술이 생긴다.

"테에..좋아한다 말하지 않았던 테스까?"
"좋아하지."

"그럼 집을 아는데도 찾아가서 손을 끌고 데리고 나오지 않는 이유가 뭐인 테스?와타시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테스,.,!"

"그게 정답인지 아닌지 알 수 없고 설령 그러한들 어떻게 할 것이며 그녀석이 그걸 싫어할 경우에는 내가 인간일지라도 상처를 받는단 말이야."

"테에??인간님 그렇게나 좋아하는 테스?"

"그래."

"그냥 데리고 오면 안되는 테스ㅡ?와타시는 정말로 모르겠는 테스,."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다가 빈 공간에 또 돌들을 던져 댄다. 일부러 자실장이 제일 좋아하던 예쁘고 맨질거리는, 가지고 놀기 좋은 돌들만을 골라서. 홀로된 시간이 너무 오랜 지라 이제는 못생긴것들만 한무더기 남았다.
한참이나 찾겠지만 당황한 얼굴이 보고 싶다.




"그런데 와타시도 이곳에서 노는것은 오랫동안 볼수 없었던 테스."
"설마 죽은건..??"
"그건 아닌것 같은 테스. 공원 중앙에서 콘페이토나 실장푸드를 받는모습을 몇 번이나 봐온 테스. 아마도 겨울나기 때문에 놀 시간이 부족했던것 같은 테스..
차라리 공원 중앙으로 가서 찾으면 어떤 테스?"


"찾고 싶지가 않아."
"뭐인 테스?이해할 수 없는 테스!"
"이곳에 와서 얼굴을 보고 나랑 놀아주던가 이야기를 해 주었으면 좋겠어."

"뭐인 테스!답답한 테스!왜 굳이 이곳이어야 하는 테스?"


"그것은.."



우습게도 부끄런 눈물이 살짝 맺힌다. 미키역시 변한 내표정을 보고 당황스러워한다.



"여기서는 항상 기쁘게 놀아줬었거든. 다른곳에 가서 만나면 나를 모른척 할까봐 걱정되서 그래. 속상해지기 싫어."

"한번 만나보거나 다른곳에서 보았던 적도 없었던 테스!왜 그렇게 혼자서만 생각하는 테스??"

"왜냐면.."
"지금 상처받으면 죽을것 같거든, 난."




미키는 이해할수 없다는 슬픈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간님 그렇게 쉽게 죽는테스?우리들과 같은 테스? 따위의 혼잣말을 하고 있다.


사실 몇 번은 자실장이 공원 아래로 내려가는것을 본 적도 있었지만 나는 또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잡는다던가 데리고 가버리는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손을 뿌리친다면, 정말로 얼마 안남은 마음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 상태는 정상은 아니다.
지나간 시간에 만났으면 좋았으려나 하는 생각을 해도 어쩔 순 없다. 시간은 흐르기 위해 존재하는것, 한낱 인간이 그 지극히 당연한 진리를 어떻게 막을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상상만 할 뿐이다.

조금 더 내가 괜찮았었을 시절에 만났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달달하지만 의미없을 망상들을...
하긴. 그때라면 어린 꼬마녀석 따위는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으려나. 그리 생각하면 매한가지일 일이다.
지금이라서 의미가 있고, 지금이라서 애정을 주지만
나는 지금이라서 결국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미키를 돌려보내고 그날은 오래도록 벤치에 앉아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의 끄트머리쯤 기다리던 자실장이 내 바짓단을 붙드는 것을 느꼈다.


“테에..”
“간만이네.”


양 손에는 실장푸드 몇 개와 콘페이토 따위를 들고 있다. 하루종일 얻으러 다녀도 고작 이정도일까 싶은 생각에 서글픈 느낌마저 든다. 지금 당장도 내 주머니속에는 저것보다 많은 실장푸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속상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가만히 자실장을 바라보고만 있노라니 웬일로 그녀석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바빴던 테치.”
“...”

“...겨울엔 춥다고 들은 테치. 와타시 마마쨩이 없기 때문에 동생쨩과 함께 겨울을 나려면 열심히 더 열심히 모아야 하는 테치. 몇 번
이나 이곳에 와서 놀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었던 테챠....혹시..기다렸던 테치?”

“한번도 그런일 없는데?”

“..그런테치...알겠는테치...와타시는 조금 놀러가는 테치....
아...앗?와타시의 보물들이 모두 사라져 버린 테챠아아!!!!”


자실장은 울상이 되어 푸드들을 내팽겨쳐 두고 우왕좌왕한다. 내가 골라준 돌무덤의 돌들이 반 이상 사라져 있었다. 물론 내 짓이다.

심술쟁이처럼 홀로된 시간에 화를 내며 언덕에서 공원 중앙을 향해 아무렇게나 돌들을 던져댔다. 자실장이 슬퍼할 거라는,
착한 미키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없는 테치!!”
“그러게. 조심하지 그랬냐. 다 잃어버렸네.”

“인간님이 처음에 만났을 때 줬던 돌이 없는 테치!!!!가장 소중한 것이 없어진 테치!!!!”





처음에 내가 주었던 돌.

큰 눈에 슬픔이 가득 차오르다가 결국 앙 하고 울어버린다. 눈물 콧물을 온몸에 묻힌 채 손안에 든 하루종일 노력에 대한 보상인 푸드
가 으깨어지는것도 상관없이, 자실장은 수풀을 뒤지고 있었다.





마음속에서 차곡차곡 쌓아올린 무언가가 순식간에 부숴지는 기분이 들었다. 무릎 발치에서 보고 싶어했던 꼬마 하나가 울며 불며 내가 주었던 자신의 보물을 위해 손발이 다치는 것도 아랑곳 않고 피를 뚝뚝 흘려대며 보잘것 없는 돌멩이 하나를 찾고 있었다.

흥분은 점철되어 마음은 가라앉고 오히려 더욱 더 애달픈 느낌으로 그 광경을 바라본다.






결국,



나는 이 별것 아닌 자실장을 너무 좋아해서 앞으로 갈 곳이 어딘지도 모른 채 그저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결론도 없고 목적지도 없을 애정이 마음을 옥죄어 온다.

자실장에게서 받는 약간의 관심이 나를 이렇게 ‘미치게’ 만들 정도로 마음속에서 커다란 존재로 바뀌어 있다는것을 지금에서야 알게 되었다.

마음을 깨달은들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쓰레기처럼 엉망진창이 되어 아무것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더욱 더 나를 슬프게 하여 나는 울고있는 자실장을 두고 작별인사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주 많이 후회했다.
그날은 자실장과 함께 이야기한 마지막 날이었다.
나는 그땐 몰랐다.









일을 조금 더 열심히 했다.

머릿속에서는 당장 공원으로 뛰어가 그녀석이 있는지 없는지라도 확인하고 싶었지만 나에게도 자실장에게도 폐가 되는것이다. 확인한들 뭘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바라본 시간에는 보이지 않았고, 혹여 내가 없는 시간에 내 생각은 했을런지.
그러나 나는 신이 아니기에 그런것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두어번. 서너번 열몇번이 쌓인 후 공원에 놀러갔을 때 정말 오랫동안 나는 자실장을 볼 수 없었다.
쉬는 날 하루종일 공원의 언덕에서 커피 열몇잔을 마셔가며 기다렸을 때까지도.

나는 항상 내가 다녀간 날은 며칠 내내 고르고 고른 가장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돌들을 나무 밑에 놓아두었는데 분명히 어느 순간부터 그 돌들을 가지고 놀았던 흔적이 사라져 버렸다.




증발한 것이다.

간곳 없이.

죽은걸까 살아는 있는걸까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프기라도 한건지
미쳐버릴 지경이었지만 나는 성실히 그 자리에서 자실장을 기다렸다.

주말 이틀내내 기다린 끝의 저녁. 나는 오래간만에 미키를 만날 수 있었다.



“..간만이네, 너도.”
“테에..”

“겨울나기 때문에 다들 바쁜거야? 너도 걔도 아무도 보이지를 않아..”

“인간님도 한동안 오시지 않으셨었던 테스.,,와타시도 겨울나기 때문에 바빴던 테스..자실장은......말해줄까 말까 고민되지만 테스”

“...무슨 일이 있었던거야?”

“...가버린 테스.”
“무슨 말이야..”

“다른 집의 사육실장으로 간 테스. 어떤 남자 인간님이 며칠동안 자실장을 관찰하고 있다가 얼마전에 데리고 간 테스."




"...뭐?“
“...내 손도 한번 안붙잡아준 애가 모르는 남자를 따라갔다고?”


“...그런테스. 우리들에게 사육실장이란 그런것인 테스.내가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던 테스?그냥 다 무시하고 데리고 가라고 몇 번이나 말했던 테스. 계속 듣지 않았던 테스.
마마쨩이 없는 자실장쨩들은 겨울에는 분명 죽어버리는 테스. 본인도 그것을 아는 테스..
살려면..살려면 어쩔수 없는 테스.“


“...난 그런 얘기는 들은 적이 없는걸.”

“물어본 적이나 있으셨던 테샤?”

“이야기를 할 시간이 없었는걸.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고...그리고..”



말문이 막혔다.
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아주 많았고 묻고 싶은 것들도 많았다.듣고 싶은 것들도 많았고 그런것 외에 농담따먹기나 장난질이라던가. 할수 있는것은 다 해보고 싶었지만.

이 작은 관계에서조차 때와 시기가 존재 했다는 것은 정말 예상밖의 일이었다.



미키는 내 등을 토닥였다. 참담한 심정으로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손에 돌을 쥔다. 나와 자실장을 엮어 주었던 작은 돌들을 반쯤 나간 정신으로 주머니속에 쑤셔 넣었다.


돌아오는 길마다 늘어선 상점들이 보이는데 우습게도 지금 이 시점에서야,
함께 커피나 디저트등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을수도, 쇼핑을 다니고 뭔가를 사주며 기뻐졌을 지도, 마트에서 좋아하는 과자나 콘페이토 따위를 고르며 잡담으로 깔깔댔을 지도 모르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식화된 관계는 없으나 행복은 나눌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모르겠다.나는 정말 바보가 되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상실감에 눈물이 목까지 차 올랐으나 눈물도 잘 나오지 않았다.
집에 돌아온 뒤 옷도 벗지 않고 쇼파에 웅크리고 앉아 지나가버린 선택지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들을 의미없이 그려 보았다...

‘행복했을 수도’있을 날들을.


그러나 이제는 모두 다 끝이다.






나는 앉은 채로 잠이 들었다가 몸을 훑고 지나가는 추위에 소스라치게 놀라 잠이 깨었다.
슬픔이 지나가고 나니 허무와 후회만이 남게 되도다. 그러나 모두 내 탓이고 감내해야만 할 일이었다.



생각해보자.

내가 그 자실장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 무엇을 해줄 수 있을것인지를 생각해보면 답은 명확했다.
직스파들처럼 섹스를 원하는것도 아니었고 정신나간 애호파들처럼 예쁜 옷을 주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 키우고픈 생각도 아니었다.

사실 원한것은 어느때고 그 자리에 있는것, 이제까지 그리했듯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기를 바랬건 것이다.

그녀석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것을 바랬을지와는 상관없었다.이기적인 마음만이 가슴속에 가득 차 어떠한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그저 흘러만 넘친 채,
나는 그렇게 사랑을 잃었다.




사랑에 대해 생각한다면 앞날은 더욱 더 암담했다.

사랑에는 여러 가지 방식이 있을진대 나의 빗나간 사랑 방식은 아무도 원하질 않았다. 결국 나 스스로조차도.


귀엽고 맹랑한 그녀석을 너무 많이 좋아했던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회적인 어떤 방법으로도 나는 어떠한 ‘결론’을 내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결론이 없는 집요한 애정의 갈구는 곤충같은 구더기들에게도 필요없었다. 사랑한다고 한들 친밀감 어린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고리’를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가지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생각할수록 마음이 더 참담해져 온다.

가장 슬픈 것은,

사실은 이랬던 적이 없지 않다.

어디서든 그랬다.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풍경들..

언젠가 지금과 비슷한 적이 몇 번이나 있었다. 몇 개나 되는 트라우마가 심장을 갈라놓는다.


굉장히 소중한 것은 결국 가질 수가 없어서 차라리 내 쪽에서 선을 긋고 멀찍이서 바라보는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애정표현이었다.
‘소중하다’라고 말하지 않으면 도망가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만들어버리는것. 그것이 나의 하나뿐인 탈출구였다...


그렇게 '육년'을 가볍기 그지 없는 공기같은 사람으로 살아오다가 자실장을 만나고 정신없이 빠져 들었다. 그 작은것에게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

.

하지만 없다. 이제는 없어. 간곳조차 알수 없다.


그아이에게 주어질 행복을 생각하면 아마도 내 아집으로 곁에 두는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나같은 사람의 곁보다는 누구라도 나을것이 분명하리라.



깜깜한 방 안의 유일하게 살아있는 존재인 시계바늘은 12시를 가리키며 하루를 보냈고 빛과 밤과 달과 별이 넘어가며 내 생일을 알렸다.핸드폰에 생일을 축하하는 메시지들이 불빛을 깜빡이며 찾아오고 있다.




오늘이 생일이었구나. 내가 태어난 날.
슬프지는 않다. 내 작은 머릿속은 나를 감당할 자신이 아주 이전부터 없었던것 같다. 







나는 침대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진 안방으로 가서 그녀석의 보금자리에 있던 작고 예쁜 돌들을 손에 꼭 쥔 뒤


방안 귀퉁이에 항상 준비되었던 밧줄을 바라보았다.















자실장은 추운날의 저녁, 자신에게 손을 내밀며 키워주겠다고 말한 남자의 손을 붙잡고 그 사람의 집으로 갔다.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주던, 예쁜 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인간이 잠시 생각났지만 키워준다고 말하는데야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 사람이 나를 키워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잠시 생각해보았지만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찰 수는 없었다. 자실장에게는 다른 선택지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용기를 내어 여동생이 하나 있다고 같이 키워주면 좋은데,라고 말했지만 키워주겠다고 말 한 사람은 자신 하나만을 바랬기 때문에 여동생에게도 작별인사 하지 못하고 벤치를 떠나게 되었다.


여동생조차 두고 갈 수밖에 없을 정도로.
사육실장이란...겨울을 죽지 않고 보낼 수 있다는 것이란 실장석들에게는 생명의 지속 그 자체였다. 동생쨩도 사랑했지만 우선 내가 살고 봐야 한다. 더 야무진 동생쨩은 어떻게든 겨울을 잘 보낼 것이다. 자실장이 놀이를 그만두고 식량비축에 힘써 둘의 골판지 상자속에는 이미 한사람분량 이상의 겨울식량이 보존되어 있어서 그나마 자실장은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상자를 떠날 수 있었다.



남자 인간님은 돌멩이를 가지고 가 집이 더럽혀지는것도 싫다고 말했기 때문에 주머니속에 있던 소중한 돌멩이들도 제 자리에 두고 떠나게 되었다.

주인이 될 남자의 명령에 따라 돌멩이를 주머니 속에서 쏟아내어 버리다가 돌멩이 하나하나마다 항상 자신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던 친절한 인간이 생각났지만 그저, 그도, 그 뿐이었다. 예쁘고 반짝거리는 돌멩이들을 함께 좋아했다 한들 ‘삶’이라는것은 그깟 노리개보다 훨씬 더 강인하며 크고 단단한 것임을 작은 자실장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다.

자실장은 미련 없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인이 될 인간의 손을 붙잡은 뒤 그 자리를 떴다.

마음 한구석에서 꼬집는것 같이 아픈 느낌이 들었지만 그런건 금방 사라질 것이다.
구두도 없는 찬 발을 종종대며 자실장은 남자를 따라 길을 걸었다.





인간의 집은 생각보다 쌀쌀했고 어두웠다. 불을 켜자 방 안이 밝아지며 방 안의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실장들이 모르는 물건들이 많았다. 검은색 상자와 푹신해 보이는 가죽의자. 하얀색 커다란 네모와 발이 여러개 달린 의자들은 방에 몇 개씩이나 있었다.

자실장은 푹신해 보이는 의자로 다가가 자신도 모르게 몸을 기대었다. 남자는 그런 자실장을 보며 싱긋 웃었다.


“잘 대해줄 수는 없지만 집에서 편하게 지냈으면 좋겠구나.”

“텟..”

“사육실장을 키워본 적은 몇 번이나 있으니 아마 내 보살핌이 부족하지는 않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는 사랑을 가득 주면서 보살피는 스타일은 아니거든. 목욕물을 받아줄 수는 있지만 목욕은 시켜줄 수 없고, 실장푸드는 예전에 먹던게 있어서 보통품으로는 줄 수 있지만 고급은 힘들다는거 알아줘. 강아지처럼 키워는 줄 수 있어.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실장석은 실장석이고 인간은 인간이니..
나는 정신나간 애호파들처럼, 키우는 강아지 같은것들 따위에 벌벌떨면서 지낼 수 없거든.
말을 잘 들으면 대우를 조금 잘 해주마. 잘 듣지 않으면 엄하게 체벌하고 더 심해지면 살던곳에 가져다 버릴꺼야.”


“테에..”


“이름을 줘야 하는데.”


이름!
자실장의 머뭇거렸던 눈동자가 다시금 반짝였다.



“어떤 이름이 좋으려나..”


남자는 잠시 생각한 뒤 웃는 낯으로 말한다.


“빌런이라는 이름 어때? 좋아하려나.
잘 지내 보자,빌런..그런데,그런 이름을 가진 녀석이 하나 있었는데 말이야....“




















미키는 한동안 남자를 기다려 보았지만 그날 이후로는 남자를 볼 수 없었습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와도 오지 않았어요. 미키에게도 조금 은소중한 존재가 되어 있었는데, 슬펐지만 인간님들의 사정은 그보다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언덕, 돌무덤을 두 개 가지고 있는 나무가 사실은 벚꽃나무였다는 것을 인간님은 아시고 계실런지요.
언젠가 지나가는 말로 어렴풋, 인간님이 벚꽃을 정말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은데 먼 발치서 이렇게나 만개한 벚꽃을 보셨을런지.알 수가 없었어요.


미키는 벚꽃나무 아래에 앉아 떨어지는 꽃송이를 바라보며 기도합니다.


-벚꽃이 정말 예뻐요. 이 벚꽃이 지기 전에 꼭 다시 한번은 볼수 있었으면. 그게 아니라면 먼 발치에서나마 이렇게 예쁘게 피어난 벚꽃을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언제나 다시 볼 수 있으려나요? 있잖아요, 당신의 작은 자실장은요...-



작은 자실장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덩치가 커다란, 수염투성이의 남자 인간님과 함께 손을 잡고 와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언덕에서 자실장을 바라보고 있는것을 보자면, 
가끔 언덕 위의 벤치를 응시하는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자실장은 한번도 언덕 위로는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어렴풋이 아마 저 아이도 조금 마음아파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억이라는게요. 우리든 당신네들이든 쉽게 잊혀지는건 아니거든요.


자실장이 너무나도 행복히 잘 지내는 것을 보게 되면 인간님이 질투를 하려나 다행이라 여기려나 하는 고민을 해보다가 미키 역시 떨어지는 벚꽃에 넋을 잃습니다.

이 예쁜 꽃들이 지기전에 미키를 만나러 와 주면 좋을텐데요.

혹시 오늘은 인간님이 오려나 싶은 생각에 미키는 자리를 잡고 조금 더 기다려 봅니다.

그렇게 몇 달이나 기다렸지만

오늘은 어쩐지 인간님을 뵐 것같은 특별한 기분에 마음이 설레입니다. 해줄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자실장의 이야기, 미키의 이야기, 그리고 듣고 싶었던 인간님의 이야기까지


그래서 기다려요.


오늘도,..해가 넘어가기 전까지...







벛꽃은 진다한들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면 내년에는 또 다시 분홍빛 꽃망울이 톡톡 고개를 내밀 텐데, 이번 봄의 벚꽃을 볼 수 없으셔도 다음 봄의 벚꽃은 볼 수 있으시겠지요.


나무 아래서 기다리면 분명히 다시 와주실 꺼예요.


인간님들은 아주 많이 바빠요. 아마도 미키나 자실장따위는 이제 생각도 나지 않으실 수 있겠지만 우리들은 사실 존재의 의미가 당신들을 위한 것임을...알고 계실까요?

다음번에 인간님을 만나면 꼭 말해줄래요.

미키도 인간님을 아주 많이 좋아한다구요.

혹시나 괜찮으시다면 당신 집 구석의 조용한 장식품같은거로라도 살면 좋을텐데. 내가 잡을 수 없던 차가웠던 손이 기억나 사실은 나도 잠을 설쳤습니다. 이번엔 내가 한번 용기내어 볼까요...사실은 나도 아주 많이 후회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인간님이 보이질 않네요.






아주 많이 기다렸지만.이 자리에서...




아마도 오늘도.



아마,내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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