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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참피, 내일도 살아가는 데스(2021)」 (게으른소렐)






 팬시 캐릭터 상품 중 가장 낯설었던 건 캐릭터 에세이였다. 보통 캐릭터 상품이라고 하면 머그컵, 필기도구, 접시, 쉐이커 등 일상용품에 캐릭터 테마 색을 입히고 그림 하나 붙여서 파는 모습이 익숙했는데, 캐릭터 책. 그중에서도 캐릭터 에세이는 처음 본 순간 문화충격에 정신이 아뜩해지는 것이었다.

 물론 전에도 캐릭터를 주제로 한 책은 많았다. 표지를 캐릭터가 장식한 공책이야 말할 것도 없고, 동화책, 아트북, 교육도서…. 그런데 캐릭터 에세이라니.

 자기 경험을 쓰는 에세이와 자기 경험이 존재할 수 없는 가상의 주체인 캐릭터의 만남. 순간 머리가 소용돌이친다. 동물의 창작물과 저작권법 적용, AI 생산품의 저작권법 적용, 인격권의 정의 등 여러 주제가 머릿 속에서 뒤얽히다, 끝내 나는 무지를 감추기 위한 감탄의 한 마디로 생각을 끝내버리고야 마는 것이었다. 분명 이걸 처음 고안한 사람은 보통 사람의 아홉 수 이상을 앞서 보는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캐릭터 에세이라는 단어만 봤을 땐 대충 어떤 인상이 잡힐 것이다. 캐릭터가 직접 썼다는 콘셉트로 작성한 일기 형식의 소설 같은. 하지만 아니다. 캐릭터 에세이의 작가는 표지를 장식한 캐릭터의 탄생과는 전혀 상관없다. 다만 그 캐릭터를 무진장 좋아하는 열성팬이다. 그렇기에 내용도 제작자의 경험은 없고 독자. 그러니까, 캐릭터 소비자의 감상으로 가득하다.

 이 캐릭터 에세이의 인기 비결은 '감정 대리인' 키워드를 통해 읽을 수 있다. 감정 대리인은 캐릭터 이모티콘과 관련이 깊다. 최근 SNS나 인터넷, 혹은 메신저 상에선 캐릭터 그림으로 자신의 감정을 대신 표현하는 게 기본인데, 이렇다 보니 캐릭터가 자신의 감정 대리인이 되었고, 그에 따라 이모티콘 캐릭터는 보통 팬시 캐릭터와는 차원이 다른 유대감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자기 내면에서 단순 캐릭터가 아닌 '동반자'의 직위를 얻게 된다. 캐릭터 상품을 구매하는 건 단순 물욕이 아닌 동반자를 곁에 두고자 하는 심리라는 것이다.

 캐릭터 에세이의 유행도 그런 맥락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캐릭터 에세이의 내용은 뜯어보면 캐릭터 팬덤의 말을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캐릭터 에세이도 캐릭터 상품이기 때문에, 캐릭터 에세이를 읽는 건 단순한 독서가 아니라 캐릭터. 즉, 친구와의 교감인 셈이다.

 오늘 다룰 캐릭터는 그런 동반자 중 하나이다. 그런데, 여태 나왔던 팬시 캐릭터와는 성질이 다른 녀석이다. 행복과 희망, 편안함과 귀여움은 온데간데 없고 좀, 음습하다. 너무 음지에 있는 놈이고, 외면하고 싶은 모습을 대리하는 캐릭터라 언급만으로도 평판의 하락을 예상할 수 있을 정도의, 그런.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미래한국.



참피, 불행의 스펀지.


 참피. 정식 명칭은 실장석. 일본 만화 <로젠메이든(2002)>에서 등장하는 캐릭터 스이세이세키를 비튼 2차 창작 캐릭터이다. 일본과 한국에서의 이름이 다른 건 국내에서 이 캐릭터를 널리 알렸던 3차 창작 만화에서 참피라는 이름으로 등장했기 때문. 이름에선 차이가 있지만 한일 양국에선 깜찍한 소녀인 원본과 달리, 참피는 혐오를 부르는 생물이라는 점은 똑같다.

 외형부터 불쾌함을 부르고, 쓰레기통에서 살며, 작은 체구만큼이나 힘이 약함에도 인간 같은 거대하고 강한 생물에게 떼를 쓰고 덤비며, 사람 수준의 지능은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욕구에만 집착해 짐승과 다름이 없다.

 또한 자기계발과 노력은 절대 하지 않으면서도 항상 상류층의 삶과 존경이 자신의 것이어야 한다고 여기며, 순간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친구와 자식을 버릴 정도로 이기적이다. 게다가 배설물을 여기저기 뿌리고, 냄새도 고약하다.

 쉽게 말해 미움받을 요소는 다 들어간 캐릭터라고 보면 된다. 이 참피란 그런 캐릭터이다. 혐오감정의 쓰레기통. 좀비나 나치처럼 스스로 미움받을 이유를 제공하기 때문에 심한 짓을 해도 괜찮은 캐릭터. 그렇기 때문에 초기엔 이 캐릭터를 괴롭히는 내용이 주를 이뤘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이 캐릭터 팬덤도 인식이 좋지 않다. 그런데 나치나 좀비 콘텐츠는 참피만큼의 대우는 아니다. 장르문학이나 만화나 게임 등 자주 얼굴을 보일 정도이고, 또 그걸 즐긴다고 따가운 시선이 쏟아지진 않는다. 그런데 참피는 어디서 말하기 참 창피한 녀석이다. 똑같은 혐오 모티프인데, 왜 참피 팬덤은 그들과 달리 취급이 좋지 않을까?

 나치나 좀비를 공격하는 콘텐츠처럼 혐오 모티프를 공유하는 건 맞지만 이렇게 취급이 다른 이유는 따로 있다.

 예나 지금이나 참피는 애완동물의 모티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한 건지, 정말로 동물에게서 영감을 따온 건지는 알 수 없으나, 참피의 혐오스러운 행각은 개나 고양이 등의 반려동물의 밉살스러운 짓과 비슷하다. 앞서 말한 참피의 특징을 한 번 개나 고양이 햄스터 등으로 놓고 읽어보자. 아마 반려동물 좀 아는 사람이라면 참피 설명할 때부터 기시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탓에 참피 콘텐츠는 인간이 작은 참피를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내용이 주가 되는데, 이런 모습을 접하면 자연히 현실의 동물학대범이 연상되고 만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위키백과.



음지의 대변인.


 아이쿠, 그럼 이 참피 팬덤은 동물학대의 대리만족을 즐기는 예비 범죄자들일까?

 아니다. 겉보기와 달리, 참피 팬덤의 감정이입 대상은 사람이 아닌 참피다.

 그건 참피 팬덤의 말버릇과 유행어에서 드러난다. 데뎃, 데스웅, 우지챠, 쿠이쿠이 등 참피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며, '와타치의 행복은 어디있는 데스우?', '똥닌겐은 이미 죽은 데스!' 같은 참피의 감정을 표현하는 대사 등이 주류를 이룬다. 가해자인 사람의 대사를 인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주로 자신의 실수와 잘못이 발견됐을 때이다.

 동물학대의 대리만족을 좇았다면 이런 행태가 이뤄지지 않는다. 굳이 비교해보자면 나치 혐오 콘텐츠인 울펜슈타인 시리즈 팬덤의 경우, 나치를 찢어죽이는 주인공 블라즈코위츠의 언동을 흉내내는데, 당연히 이 경우도 화살이 나치를 향해있다. 그런데 참피 팬덤은 정반대로 오히려 자신을 참피에 두고 있다.

 어째서 이렇게 되었는가? 바로 참피가 그들의 감정 대리인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게으르고, 감사를 모르며, 노동 없이 상류층의 삶을 원하며, 능력도 없는 참피. 인간의 모든 추레한 모습을 한데 넣고 뒤섞은 캐릭터를 보며 '공감'한다. 참피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읽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꼭 닮은 참피를 흉내낸다.

 그렇다면 의문이 하나 생긴다. 그렇게 말버릇과 울음소리를 흉내낼 정도로 깊게 감정이입을 하는데, 왜 참피 팬덤은 참피가 고통받고 죽는 콘텐츠를 즐겨 찾는가?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This is Ecuador.



모니고떼(Monigote)와 정화의식.


 중남미의 아뇨 비에호(Año Viejo, 묵은 해.)라는 연말 축제는 볼거리로 가득하다. 가장 유명한 건 모니고떼(Monigote, 꼭두각시 인형.) 태우기다. 모니고떼는 자신의 대리인이랄지, 아바타랄지, 어쨌든 자신을 대신할 인형이다. 모양이나 크기 등 정해진 규격은 따로 없어서 온갖 것을 빌려오는데, 해외 셀럽, 헐리우드 배우, 만화 속 히어로, 주머니 크기의 괴물 등 친숙한 얼굴들이 거리를 수 놓은 모습은 놀이동산 퍼레이드 못잖은 화려한 모습이라 눈이 즐겁다.

 인형에 자신의 액운을 담아 태워 다음 해엔 불행은 소멸하고 복만 온전히 오기를 기원하는 의식. 불로써 행해지는, 악덕의 정화의식이다.

 참피 팬덤에게 있어 참피는 모니고떼이다. 참피에 감정이입을 해 정을 느끼는 동시에 참피의 죽음을 원하는 이 양가적인 감정은 바로 그런 대리자의 죽음으로써 완성되는 정화를 갈망하기에 생기는 것이다.

 자신의 분신이기 때문에 사랑하고, 동시에 자신의 악덕이기도 하므로 불태워져 세상에서 존재가 없어지기를 원하는 것이다. 대리자라고 느낄 정도의 깊은 감정이입이 오히려 캐릭터를 영원한 죽음과 고통의 수레바퀴에 묶어버리고 말았다니. 이 아이러니란.

 그렇기 때문에 참피 콘텐츠에 등장하는 인간도 단순한 가해자가 아니다. 제물의 목을 치는 제사장이다. 악덕에게 벌을 주고 꾸짖는 존재이다. 그러므로 '무상의 행복은 없다' 같은 대사는 단순히 참피를 향한 모욕이 아니라 인간의 무지를 겨누고 있는 것이다. 깨우침이 늦고 게으른 자신을 말이다. 결국 자학적, 자조적인 감정을 대변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표현의 형태도 과격해지는 것이다.




아프니까 사람이다. 아프니까 울부짖는다.


 표현을 저렇게 해두니 팬덤과 캐릭터 자체가 좀 특수한 경우로 생각되는데, 의외로 저런 캐릭터는 드물지 않다.

 예를 들자면, 자신보다 잘나가는 캐릭터를 보고 질투의 감정을 숨기지도 않고, 사회적 관습을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어 사장에게 반말도 하고, 상대 말이 중심인 인터뷰 자리에서 자기 하고 싶은 말부터 쏟아버리는 제멋대로인 녀석. EBS에서 제작한 국민 펭귄 펭수. 인기와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어 바로 알아채기 힘들어 그렇지 따지고 보면 참 갑갑한 녀석이다.

 그런데 의외로 이런 펭수의 인기비결은 그런 버릇없는 태도이다. 아이 같은 천진함이라고 할 정도로. 왜냐하면 펭수는 세상을 다 배우지도 못한 채 너무 일찍 어른의 책임을 떠안은, 사회 초년생의 고통을 대신 말해주는 캐릭터였으니까.

 아직 경험이 없어 그런 건데, 아직은 익숙해지지 않았는데, 작은 실수를 하더라도 10년 넘게 구르고 구른 사람과 똑같은 수준으로 혼나야 한다니. 조금만 이해해 줄 수는 없었나, 하는. 그런. 작지만, 말하지는 못하고 쌓아만 두는 감정. 이런 뒷사정을 알고나면 미워할래야 할 수가 없다.



사진은 내용과 관련이 없음. 출처: 한경닷컴



 사실, 참피 팬덤이 공유하는 정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단지 모든 걸 이해받는 펭수를 통해 위로를 받는 대신, 철저히 파괴되는 참피의 모습으로 자신을 채찍질하는 길을 선택했을 뿐.

 이런 사회 초년생들이 남몰래 흘린 눈물을 마시고 자라는 캐릭터들의 존재는, 우리가 그들의 고통에 귀기울이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캐릭터라는 형태로 포장되어 가리워져 있을뿐.

 그렇지만, 누구를 탓할까. 기성세대가 챙겨주지 않아서 저렇게 울고 있다 말은 하지만, 기성세대도 울고 있다. 신세대도 눈물로 시야가 가리워져 그들의 아픔을 보지 못하긴 마찬가지.

 어쩌겠는가. 이런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단순히 노력만으로는 빠져나올 길이 없는 것인데. 그렇다고 누워서 신음할 수도 없다. 인생의 회전목마는 아직도 달리고 있지 않는가. 아프지만, 누군가 대신 살아주는 것도 아닌 인생, 일단은, 일단은 다시 일어나야지.

 그렇게 오늘도 참피 팬덤은 모니고떼를 태운다. 살기 위해 태운다. 모니고떼가 다 타버리고 불씨만 남았을 때, 베개에 머리를 뉘인다. 상처입은 마음을 문지르면서, 한 마디 읊조리면서.

 '내일도 살아가는 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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