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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始原)의 기억 1~16 (완)

 


#Prologue

-데프프픗..... 와타시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뎃승~ 세상의 여신인뎃승~ 모두가 와타시를 숭배하는 뎃승~~ 닝겐 노예들을 잔뜩 거느린뎃승~ 와타시야말로, 세상의 중심인뎃승~ 뎃데로게~

 풍만하게 살진 실장석 한 마리가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드리며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모양새는 꼭 임신한 실장석 모양이지만, 초승달 모양으로 웃음짓는 두 눈의 색이 서로 다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임신한 것은 아니다. 그저 방구석에 놓인 별사탕에 몸을 묻고 숨쉬기가 힘들어질 때까지 잔뜩 집어먹은 때문일 뿐. 넓은 방은 벽부터 바닥까지 온통 분홍과 노랑의 알록달록한 타일로 화려하게 뒤덮여 있다. 한 쪽 구석에는 알록달록한 여러 색깔의 별사탕과 최고급 실장 푸드가 각각의 산을 이루고 있으며, 반대쪽 구석에는 비데가 달린 실장석 변기와 따듯한 물이 가득 찬 욕조가 자리하고 있다. 바닥 곳곳에는 갖은 실장석용 장난감과 인형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고, 무엇보다 방 한 가운데에는 레이스로 치장된 실장석용 침대가 큰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모두가 핑크색 알록달록. 누가 봐도 고약한 악취미라고 생각할만한 데코레이션이지만, 실장석의 취향에는 그야말로 ‘세레브’ 그 자체이다.
 여기까지 본다면 어떤 미친 애오파의 역겨운 짓거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실장석 관련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은 사람이라면 돈 많은 학대파가 소위 ‘올렸다 내리기’를 위해 잔뜩 ‘올리는’ 중일 가능성에까지 생각이 미칠지 모른다.

 하지만 이 방을 꾸며 놓은 것도, 이 전형적인 분충에게 온갖 호사를 제공하는 것도, 현재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게 해 놓은 매직 미러 저 편에서 방 안의 분충을 들여다보며 담소를 나누는 것도 애오파나 애호파, 학대파에 속하는 이들이 아니다. 굳이 구분한다면 관찰파, 혹은 실험파로 분류할 수 있는 사람들. 하지만 관찰파나 실험파라는 말도 흰 가운을 입은 이 두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관찰이든 실험이든 그저 취미 생활의 연장인 관찰파나 실험파들과는 다르게, 전문적이고 학술적으로 실장석의 생태를 연구하고 있는 진짜 ‘실장석학자’들이니까.

 이곳은 서울대학교 생물학과의 연구실. 오늘도 김 교수와 박 교수는 실험체 실장석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연구 분석한다. 실장석이 인간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한지 상당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인 유기 생명체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신체 구조와 생태를 가졌기에 아직까지도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기만 하다. 두 교수는 특히 그 중에서도 동물행동학적 관점에서 실장석의 본능, 그 중에서도 위석 신호에서 기인하는 소위 ‘위석 본능’을 연구 분석 중이다.

 “아무리 관찰하고 연구해도 참 신기한 놈들이란 말예요.”

 박 교수가 문득 운을 뗀다. 젊은 학자 특유의 호기심이 눈에 어른거린다.

 “뭐가 말인가?”

 반면 지극한 연배의 김 교수는 기계적으로 연구 일지를 적어 내려가며 심드렁하게 받는다.

 “아니 그렇잖아요. 본래 본능이라는 것도 결국 진화의 결과물이란 말이죠. 생존에 유리한 본능은 살아남고, 불리한 본능은 죽고, 그래서 생존에 유리한 본능만이 후대에 전달되는 – 그런데 이 실장석이란 놈들의 본능을 보면 아무리 봐도 거꾸로예요. 생물이 가질 수 있는 본능 중에서 생존에 불리한 본능만 모아둔 듯한-”
 “뭔 소린가 했네. 실장석 하루 이틀 보나? 이 놈들한테는 기존의 생물학적 접근이 무의미하다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고생하는 거 아니겠나.”

 무심한 듯 대꾸하는 김 교수라고 학자로서의 호기심이나 탐구 정신을 잃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일까. 아무래도 그보다 피로감이 앞서는 것이다. 아무리 실험 설계 상 필요에 의해서, 위석 본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분충을 만든다고는 하지만, 극도로 ‘올려진’ 분충의 분충짓거리와 지껄이는 말들을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것은 종시 참기 힘든 일이다.

 “에이, 아무리 그렇다 해도 말이죠, 실장석이라고 우주의 법칙을 초월한 무언가가 아닌 이상 저 위석 본능도 결국 생겨난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그걸 상상하는게 또 재밌단 말이예요. 다른 본능들처럼 저것도 생존에 유리해서 생긴 본능일까? 그렇다면 지금은 환경에 변해서 그렇지 않을 뿐, 저 본능이 생존에 유리한 어떤 환경에서 저들이 살았던 때가 있었던 걸까? 그게 아니라면 사회진화론적 관점에서, 어떤 공통의 경험에서 생겨난 것일까? 교수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거 시끄럽구만. 박 교수는 그 주댕이를 종시 가만히 못 두는 게 항상 문제야. 그리고 내 개인적 견해가 무슨 소용인가? 결국은 다 데이터가 말해줄 걸세. 학자에게 호기심은 연료와 같은 것이지만, 그래도 학적 연구에 사견을 섞는 우를 범하지 않게 항상 조심하게나.”
 “아니 아무리 그래도 말이죠- 이상하게 이 놈들만 보면 온갖 상상이 막 끓어오르지 않아요? 특히 지금 저거, 저거, 저 소리 듣고 있으면 너무 재미있어요. 인간을 노예니 뭐니 하는 거 말예요. 실장석이 사람 손에 죽게 되는 이유 3위가 인간을 노예라고 불러서라던데- 아, 4위던가? 아무튼 그런 판국에 저게 생존에 유리한 본능이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고 실장석의 집단 무의식? 공통의 기억? 그렇다고 보기엔 저 엉터리 생물들이 인간은커녕 원숭이조차 노예로 삼아 봤을 리가-”
 “아 거 시끄럽다니까. 하여튼 이놈은 교수 달기 전이랑 달라진 게 없어!”

 듣다 못한 김 교수가 다 작성한 연구일지로 박 교수의 어깨춤을 장난스레 후려치는 동안, 실험실 안의 분충은 거하게 빵콘을 하고는 데뎃데뎃 짖어대며 ‘닝겐 노예’를 찾는다. 운치를 치우기 위해 허겁지겁 실험실 안으로 들어가는 연구실 조교들. 자신의 운치를 치우는 충직한 ‘닝겐 노예’들을 보며 만족스럽게 데푸푸풋 웃은 실험체는 다시 별사탕을 움켜 입 안에 넣으며 노래를 부른다.

 -와타시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뎃승~ 세상의 여신인뎃승~ 모두가 와타시를 숭배하는 뎃승~~ 닝겐 노예들을 잔뜩 거느린뎃승~ 와타시야말로, 세상의 중심인뎃승~ 뎃데로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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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와타시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뎃승~ 세상의 여신인뎃승~ 모두가 와타시를 숭배하는 뎃승~~ 닝겐 노예들을 잔뜩 거느린뎃승~ 와타시야말로, 세상의 중심인뎃승~ 뎃데로게~

 풍만하게 살진 실장석 한 마리가 부풀어 오른 배를 두드리며 흥얼흥얼 노래를 부른다. 모양새는 꼭 임신한 실장석 모양이지만, 초승달 모양으로 웃음짓는 두 눈의 색이 서로 다른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임신한 것은 아니다. 그저 동굴 구석에 놓인 알록달록 과일 더미에 몸을 묻고 숨쉬기가 힘들어질 때까지 잔뜩 집어먹은 때문일 뿐. 한참 노래를 부르고는, 배가 꺼졌는지 산처럼 쌓인 과일더미에 손을 뻗어 손에 잡히는 대로 입에 집어넣는다. 달콤한 과즙에 섞인 약간의 신 맛이 입맛을 돋운다. 과일을 씹느라 잠시 노래를 멈추고 있노라니 사방에서 들려오는 사랑스러운 자들의 테치테치 우는 소리, 몇몇 자들은 '텟테레~'하며 친실장의 노래를 어설프게나마 따라 부른다. 즐겁게 뛰어놀고, 놀다 지치면 그 자리에 누워서 자고, 자다가 배고프면 산처럼 쌓인 먹이를 마음껏 먹고, 다시 즐겁게 노래 부르는 자들. 하나같이 그녀를 닮아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들이다.

-이것이야말로 행복인데스. 그야말로 고귀한 와타시에게 어울리는 삶인데스.

 문득 동굴 저편이 시끌시끌하다. 아무래도 먹이를 구하러 갔던 노예들이 돌아온 듯하다. 소리와 함께 가까워지는 고소한 고기의 냄새. 달콤달콤한 과일도 좋지만 슬슬 고기를 먹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딱 맞는 타이밍에 고기를 가지고 오다니, 쓸모 있는 노예들이다.
 노예들이 친실장의 보금자리로 다가오는 소리를 들으며 고기 맛을 떠올린다. 맨 앞에 있는 것은 조금 나이든 백발의 여자 노예. 그러나 그녀는 그녀의 지위를 반영하듯 다른 노예들보다 더 윤기 나는 털가죽을 몸에 두르고, 화려한 깃털과 조개껍데기 따위로 몸을 치장했다. 그녀의 뒤에는 – 역시나 고기다! 건장한 마라노예가 커다란 고기덩이를 들고 뒤를 따른다. 고기 맛을 떠올리니 그녀의 언청이입을 타고 침이 흘러내리지만, 곧 소매로 침을 닦아내고 짐짓 자세를 고친다. 여신은 권위를 보여줘야 한다. 열심히 일한 노예에게 위엄을 보이고 칭찬을 베푸는 것도 여신의 미덕이다. 곧 앞장서 들어온 백발의 노예가 뒤따라 들어온 마라노예에게서 고기덩이를 받아든다. 갓 불에 구워낸, 먹음직스럽게 기름이 낀 사냥감의 뱃살. 표면에는 아직도 기름이 지글지글 끓고 육즙이 풍부하다 못해 방울져 떨어진다. 백발의 여자 노예는 고기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는 바닥에 엎드려 친실장 앞으로 내밀며 정중하게 아뢴다.

 -오, 풍요의 어머니, 숲의 여신의 사자시여, 오늘 잡은 사냥감 중에서 가장 좋은 몫을 바치오니, 기쁘게 받으시고 이 숲에 풍요를 베풀어주소서.

 이 여자 노예는 언제나 그녀를 충실하게 섬겨왔다. 오늘 가져온 것도 확실히 먹음직스러운 고기. 어느 샌가 놀이를 멈추고 그녀 양 옆에 다가와 선 자들도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흡족한 광경이다.

 -데푸푸풋. 오늘도 충직한 노예들인데스. 이 고귀한 와타시가 친히 너희들의 노고를 치하하는데스. 이 숲은 고귀한 와타시를 위해 이 세상이 준비한 낙원인데스. 그러니 앞으로도 풍족할 것인 데스. 노예들은 앞으로도 열심히 먹이를 거두어서 와타시에게 바치는데스! 그러면 와타시가 행복을 베풀어주는데스- 데프프.

 노예들은 다 함께 엎드려 친실장 앞에 절을 하고는 조용히 물러난다. 고귀한 그녀의 식사 시간을 방해해서는 아니 된다. 예의를 아는 노예들은 과연 편하구나-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내일은 가장 충직한 노예에게 고귀한 운치를 발라 특별히 칭찬해주자.

 -데찹데찹...
 -테찹테찹...
 -마마! 꼬기가 우마우마한테치!!
 -데프프픗, 자들은 많이 먹고 쑥쑥 자라는데스~
 -레히이.... 배가 빵빵레치. 우마우마한 꼬기가 아직 남았는데 왜 배씨가 부른레챠!! 배씨가 불러서 더 못 먹는레에에에엥.....배씨가 꺼지게 운치는 빨리 나오는렛츙~♡

 커다란 고기 덩어리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일가는 빵빵하게 부풀어 오른 배를 얼싸안고 바닥에 드러 눕는다. 노예들의 진상품을 남김없이 먹어치우는 것도 일이다. 아무리 먹어도 배가 안 부르는 방법은 없을까? 친실장은 잠깐 상상의 나래를 펴 보지만, 한편으론 이 포만감이라는 것도 삶의 소소한 행복 가운데 하나이기에 없어지면 또 섭섭해질 것도 같다. 그야말로 배부른 고민이다.

-테휴....테휴....

 어린 자들 가운데 몇몇은 벌써 입맛을 쩝쩝 다시며 잠이 들었다. 자고, 놀고, 먹고, 다시 자는 게 어린 자들의 본분인 법.

-먹고 바로 자면 소화가 잘 안 되는데스. 소화가 잘 안 되면 운치가 잘 안 나오는데스우...

 친실장은 잠든 자들을 보며 짐짓 훈계를 하지만, 만면의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는 눈빛은 굳이 깨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 잠든 자들을 안아 동굴 한켠에 눕혀놓고, 잠들지 않은 자들이 나뭇잎이나 나무토막 따위를 던지며 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동굴 저편에서 다시 인기척과 함께 예의 백발 여자 노예가 나타난다.

-여신의 사자시어. 숲을 돌보실 시간입니다.

 숲을 돌볼 시간. 간단히 말하면 산책 시간. 아침 식후와 저녁 식후, 하루에 두 번씩 하는 산책 시간은 일가가 식사 시간 다음으로 좋아하는 시간이다.

-산책인테치?
-빨리 산책가는테치!!

 산책 시간이라는 노예의 말에 놀고 있던 자들은 물론 잠을 자던 자들까지 벌떡 일어나 토테토테 달려나온다. 한창 호기심 많은 자실장, 엄지실장들에게 산책은 더더욱 기다려지는 시간.

-노예, 뭐하는테챠! 빨리 와타치를 모시는테치!!!
-어서 가마를 대령하라는레치!

 물론 산책이라고는 해도 이 세상의 주인인 그녀들이 흙길에 발을 더럽힐 수는 없다. 산책은 언제나 마라노예들이 가마로 정중히 모시는 가운데에 이루어진다. 과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라노예들이 일가의 가마를 지고 처소로 들어온다. 나무를 엮어 만든 큼지막한 의자에 폭신한 가죽을 깔고, 풍성하게 나뭇잎이 붙은 나뭇가지를 엮어 지붕을 만들고, 동물의 뼈와 조개 껍질 따위로 화려하게 치장된 것은 친실장의 가마. 이 가마는 특별히 크고 화려하기에 마라노예 두 명이 공손히 받쳐든다. 다른 마라노예들이 일인당 하나씩 어깨에 얹어놓은 의자는 자실장과 엄지실장들의 가마. 크기는 작아 마라노예 한 사람이 하나씩 얹고 있지만 역시나 폭신한 가죽이 깔려 있고 온갖 물건으로 치장된 것이 화려함으론 친실장의 가마에 못지 않다.
 친실장과 자실장, 엄지실장들을 태운 가마가 동굴을 떠나 숲길을 거닌다. 황량한 광야 한 가운데 위치한 오아시스와 그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초록으로 예쁘게 자라난 숲. 그야말로 이 세상이 와타시타치를 위해 준비한 낙원. 와타시타치를 세레브하게 모시는 댓가로 이 낙원에 거주할 것을 허락받은 충직한 노예들. 친실장은 가마 위에서 숲을 둘러보며 숲을 돌보는 자신의 고귀한 임무를 열심히 생각한다.

-저쪽 나무는 이파리가 시들시들한데스. 오늘 산책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에는 와타시와 자들의 고귀한 운치를 저 나무에게 하사하는데스.....

 숲 이쪽저쪽에는 친실장보다 약간 작은 성체실장들이 마찬가지로 산책을 나온 것이 보인다. 작년에 성체가 되어 독립한 자들이다. 친실장과 그 일행처럼 가마를 타고 있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닝겐 노예들이 한명씩 붙어 그녀들을 호위한다. 독립한 자들은 닝겐노예의 호위로 숲을 거닐다 친실장의 가마 행렬을 보고는 공손히 고개를 숙인다. 성체가 되어 독립하긴 했어도 여전히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들이다– 물론 고귀한 와타시만큼은 아니지만. 그녀들 역시 고귀한 여신의 딸들이니 닝겐 노예들의 흠숭과 존경을 받아 마땅하지만, 그래도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여신은 오직 친실장, 와타시 뿐이다.

-벌써 와타시의 자들이 이렇게 많아진데스. 이번 자들도 무럭무럭 자라 곧 독립할 것인데스.

 독립한 자들과 아직 어린 자들을 둘러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친실장. 하지만 곧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직도 멀은데스! 이 낙원은 넓은데스. 더욱더욱 자들을 낳아 이 세상을 와타시의 자들로 가득 채우는데스~ 뎃데로게~

 나름대로 진지한(?) 사고에서 어느샌가 행복회로로 전환되어버린 친실장은, 세상을 가득 채운 자들과 닝겐 노예들에게 무한한 숭배를 받는 광경을 떠올리고는 자신도 모르게 뎃데로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가마를 타고 낙원의 저편으로 나아간다.









*참고자료

 터키의 우르파 지역에서 발굴된, 37,000년 전의 조각상. 'venus figurine(풍요의 여신상)'으로 분류되는 조각상들의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물로, 네안데르탈인 유골과 함께 발굴되어 네안데르탈인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다른 venus figurine들과 마찬가지로 실제 여성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라는 해석, 당시 네안데르탈인들의 이상적인 여성상으로 성적인 목적을 지녔던 것이라는 해석, 풍요와 다산의 여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종교적 목적을 지녔던 것이라는 해석 등이 공존했으나, 2015년 유적지에서 멀지 않은 한 동굴에서 새로운 네안데르탈인 유골과 함께 실장석의 유골이 발굴됨에 따라 실장석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가설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대표적으로 해당 유적지 발굴을 주도한 인도 세인트 사비에르 대학의 티카 오쉬(Tika Oshi) 교수 연구팀은 2017년 International Journal of Anthropology에 발표한 논문에서, 유적에서 발굴된 실장석의 유골에는 원시적 제의(祭儀)에 따라 매장된 흔적이 남아 있고 실장석의 크기에 맞춘 장신구가 함께 발견되는 등, 종교적으로 실장석을 숭배한 듯한 흔적이 강하게 드러나 있다고 하며 이는 해당 지역에 거주하던 네안데르탈인들이 실장석을 토템(totem)으로서 숭배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러시아의 코스텐키에서 발굴된 32,000년 전의 venus figurine 역시, 해당 유적지가 호모 사피엔스가 아닌 네안데르탈인들의 것으로 밝혀짐에 따라 마찬가지로 실장석의 형상을 본따 만든 종교적 목적의 조각품이 아닌가 하는 가설이 강력하게 재기되고 있다. 동그란 얼굴과 퉁퉁하게 살진 배, 작달막하고 투박한 팔다리 등은 실장석의 생물학적 특성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2

 장녀는 공황에 빠졌다. 매일의 일과인 세레브한 산책 도중에 가마를 받쳐 든 닝겐노예의 발치에서 예쁜 날개로 나는 팔랑팔랑씨를 발견한 것은 좋았다. 예쁘게 나는 모습에 매혹되어 닝겐노예에게 가까이 볼 수 있게 내려달라고 한 것도 좋았다. 감히 건방지게 위험하다며 말리는 닝겐노예를 큰 소리로 꾸짖어주고는 팔랑팡랑씨를 쫓아온 것도 좋았다. 하지만 길을 벗어나 수풀 속으로 들어온 것은 좋지 않았다. 울창한 숲에 가려 닝겐노예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 것도 좋지 않았다.

 장녀는 길을 잃었다. 아니, 장녀는 길을 잃지 않았다. 고귀하고 언제나 옳은, 이 세상의 지고한 여신인 마마의 유일무이한 장녀, 와타시가 길을 잃다니, 있을 수 없다! 애초에 길이 무엇인가? 세상의 진리인 와타시가 가는 곳이 곧 길이다. 와타시가 길을 잃은 것이 아니다. 불충한 닝겐노예가 감히 무엄하게도 와타시를 모셔야 할 자신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것이다!

 -노예 닝겐은 어디인테챠! 오마에의 주인님은 여기인테치! 지금 빨리 와서 석고대죄하고 와타치를 모시면 특별히 왕주먹 한 대로 봐주는테치! 어서 나타나는테치!

 감히 고귀한 와타치를 놓친 불충한 노예이지만 사실 장녀는 자신의 담당 노예가 마음에 들었다. 그는 건장하고 잘생긴 마라닝겐이었다. 언제나 군말없이 장녀의 지시에 잘 따르는 충직한 노예였다. 실수로 한 번 와타치를 놓쳤다 해도 너그럽게 용서해줄 용의가 있다. 그러니 빨리 나타나서 와타치를 모셔라.

 하지만 사방은 고요하고 닝겐노예는 보이지 않는다. 기실 닝겐노예만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울창한 덤불은 층층시야로 장녀의 눈앞을 가려 장녀는 자기 발씨 바로 앞 밖에는 볼 수 없다. 나름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보아도, 들리는 것은 메아리쳐 돌아오는 장녀 자신의 목소리와과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파닥파닥씨의 지저귐 뿐. 와타시타치를 위협하는 네발달린 분충들은 충실한 닝겐 노예들이 이 근방에서 다 솎아내었기에 당장 장녀를 위협하는 무언가는 없지만, 장녀는 보금자리와 산책로에서 벗어나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쩌면- 어쩌면 와타치는 다시 돌아가지 못 할지도? 어쩌면 닝겐노예들이 미쳐 다 솎아내지 못한 네발 분충들이 어디선가 나타날지도?

 -테에... 여기는 어디인테치. 큰일인테체....

 한참을 기다려도 닝겐노예가 나타날 기미는 없는데,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한다. 밤은 위험하다- 장녀는 본능적으로 느낀다. 예쁘게 들리던 파닥파닥씨의 지저귐 소리도 어느샌가 스산하게 들린다. 하는 수 없이 장녀는 터벅터벅 걷기 시작한다. 나름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가보지만, 사실 어느 방향에서 왔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왔던 길이 어땠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려 해도 애초에 눈앞을 가로막은 무성한 덤불 때문에 무의미.

 -테샤! 와타치타치의 은총으로 살아가는 덤불 따위가 감히 내 앞을 가로막는테챠아아앗! 당장 비키지 않으면 똥노예를 시켜서 솎아내는테치이!!

 토테토테 걸어가며 눈앞에 보이는 덤불들에 연신 호통을 치는 장녀. 하지만 한 덤불을 지나도 다른 덤불이, 또 다른 덤불이 계속 나타나 시야를 가린다. 결국 참다못한 장녀는, 그녀의 숨겨둔 필살기를 사용하기로 한다.

 -텟츙~♡ 덤불씨는 와타치에게 메로메로되어 눈 앞을 가리지 않는테츄~♡

 뺨에 오른손을 올리고, 고개를 갸웃하며 최대한 귀엽게 애교. 겨우 덤불 따위에 이 세상의 창조주도 메로메로될 고귀한 애교를 보여주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한시 빨리 집을 찾아야 하니 자존심을 차릴 때가 아니다. 연신 왼쪽 오른쪽으로 애교를 보내며 덤불을 왼손으로 헤친다. 그러기를 잠시, 역시 와타치타치의 고귀한 애교를 보고도 버틸 수 있는 존재가 세상에 있을 리 없다. 마지막 덤불을 헤치자 순간 눈앞을 가리던 초록빛이 사라지며 시야가 확 트인다. 이제 눈을 들어 노예닝겐이나 마마나 자매들, 혹은 보금자리를 찾으면 된-

 장녀는 눈앞의 이질적인 광경에 맥이 탁 풀린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분명 방금 전까지 무엄하게 눈앞을 가리던 초록색의 물결은 아니다. 대신 장녀의 두 눈을 가득 채운 것은 노란색과 갈색의 드넓은 세계. 초록색은 드문드문 그 갈색의 세계에 흩어져 있는 정도. 그녀는 어느덧 숲의 경계를 지나 바깥으로 나온 것이다.
 숲의 바깥. 장녀가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지만, 이 흙빛의 세계에 대해서는 마마에게 배운 바가 있다. 마마가 뭐라고 했더라? 그녀는 기억을 더듬는다.

 -마마, 이 숲은 모두 와타치타치의 것인 테치?
 -데프프... 그런데스. 이 숲은 모두 마마의 것인데스. 그리고 마마는 착한 자들을 사랑하는데스. 착한 자들에게는 이 숲의 모든 것을 듬뿍 나누어주는데스.
 -무엇이 착한 자인테치?
 -마마의 말을 잘 듣고 따르는 자인데스. 반대로 마마의 말을 듣지 않고 마마에게 대드는 자는 분충인데스!
 -부...분충은 어떻게되는테치?
 -분충은 더 이상 마마의 자가 아닌데스. 마마의 자가 아니게 되면 마마의 것인 이 숲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는데스. 마마의 노예들도 분충은 더 이상 섬기지 않는데스. 그러면 숲 밖의 무서운 곳으로 쫓겨나는데스!
 -숲 밖에도 뭐가 있는테치?
 -숲 밖은 지옥인데스. 악마들의 땅인데스. 물도 없고 달콤달콤이 열리는 나무도, 아삭아삭한 풀도 없는데스. 맛나맛나를 바치고 가마를 지며 운치를 치우는 노예들도 없는데스.
 -테! 너무한테치!
 -그게 끝이 아닌데스. 가끔 이 숲에도 나타나는, 와타시타치의 고귀함을 질투해 와타시타치를 해치려드는, 네발로 걷는 큰큰 분충들을 아는데스?
 -테에엥.... 네발 분충 무서운테치!!
 -걱정마는데스~ 네발 분충들은 노예들이 솎아내고 그 고기를 와타시타치에게 바치는데스. 그런데 그 무서운 분충들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아는데스?
 -설마 숲 밖에서 오는 것인테치??
 -역시 장녀는 와타시를 닮아 똑똑한데스. 숲 밖에는 그 네발 분충들이 드글드글한데스. 물론 마마는 전지전능하니 그깟 네발 분충들도 왕주먹으로 한 방인데스. 와타시가 나설 필요도 없이 닝겐노예 선에서 해결되는데스. 하지만 자들에겐 그렇지 않은데스. 자들은 마마의 보호를 벗어나 숲 밖으로 가면 하루도 살 수 없는데스.
 -테에에,,,.. 무서운테체.... 테에에엥-
 -게다가 더 무서운 것도 있는데스. 바로 악마들인데스!! 무서운 악마들이 마마의 말을 안 듣고 솎아내진 자들을 잡아먹는데스!! 샤아앗!!!
 -테에에에에엑! 마마, 와타치는 말 잘 듣는 착한 자인테치! 솎아내지 말아주는 텟츙~♡
 -숲 밖의 무서움을 알겠는데스? 그러면 항상 착한 자로 있는데스. 마마의 말만 잘 듣고 순종하는데스. 그러면 마마가 보호해주는데스~ 그리고 숲 밖으로는 얼씬도 하지 마는데스. 그러면 자들도 안전한데스.

 마마의 말을 기억해낸 그녀는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여기는 숲의 바깥. 이 앞엔 아무 것도 없다. 빨리 숲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숲으로 돌아가려 뒤로 돈 장녀 앞에는 거대한 초록의 벽이 끝없이 서 있다. 빽빽하게 가득찬 숲은 눈앞의 황량한 갈색 세계 못지않게 무시무시하다. 닝겐 노예! 닝겐 노예가 필요하다. 고귀한 와타치를 감히 이렇게 버려두다니!!

 공황에 빠져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장녀. 그런데 그런 장녀의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비친다. 무서운 네발 분충 외에는 아무 것도 없을 끝없는 광야의 중간, 높게 솟아오른 바위산의 중턱에 불쑥 돋아난 그림자. 멀리서 봐도 알 수 있을 큰큰한 키, 긴긴한 손씨와 발씨. 와타시타치처럼 두 발로 걷고, 몸에 가죽옷을 걸친- 틀림없는 노예 닝겐이다!! 역시 노예 닝겐이 세상의 보물인 와타치를 내버려둘 리 없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이 세상 전부보다도 고귀한 와타치가 없어졌으니 닝겐 노예들이 와타치를 찾아나서는 것은 당연하다. 바보같이 저 무서운 갈색의 세계 한 가운데, 엉뚱한 바위산에서 와타치를 찾고 있다는 건 참 어리석지만, 지금이라도 와타치를 발견한다면 그 정도는 봐주기로 하자. 장녀는 피로도 잊고, 큰 소리를 질러 닝겐 노예를 부르며 바위산을 향해 있는 힘껏 토테토테 달려간다.

 -뭐하는테챠!! 고귀한 와타치는 여기인테치! 빨리 와서 와타치를 모시는테챠앗!



#3

 이번 이주는 힘들었다. 절기에 따라, 건기와 우기가 바뀜에 따라 사냥감을 따라 이동하는 것이야 조상들로부터 대대로 계속되어 온 부족의 생활 방식이고, 이제 적지 않은 나이인 만큼 이주에도 이골이 날만큼 익숙한 그였지만, 그럼에도 이번 이주는 특히 힘들었다. 아무래도 우기동안 사냥감을 따라 반대 방향으로 너무 많이 이동했던 것일까.... 그만큼 돌아와야 하는 길도 더 길었던 것이다.
 ‘곰을 꿰뚫는 자’는 손에 들고 있던 나무창을 잠시 바위에 기대어놓고 허리를 퉁퉁 두드린다. 그도 어느덧 거의 40줄, 일반적인 인간의 수명으로는 이제 내리막길이다. 세월만큼 연륜과 경험, 지혜가 쌓였고 그만큼 부족 내에서도 입지가 높아졌지만, 그럼에도 몸 여기저기가 쑤시기 시작하는 것이 역시 세월은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다행이도, 부족이 기억나지도 않는 옛날부터 건기를 지내왔던 이 바위산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저 아래의 숲은 더 울창해졌고, 숲으로부터 흘러오는 물줄기가 바위산을 끼고 돈다. 바위산을 중심으로 하는 초원은 저 숲만큼 풍족하진 않지만, 지금부터 시작될 건기에는 초목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인 것이다. 우기 동안은 이 광활한 대지 여기저기 흩어져 살던 초식동물들도, 그 초식동물들을 따라다니는 육식동물들도, 건기에는 소중한 물줄기를 찾아 이 주변으로 모여든다. 길고 힘들었던 이주가 헛되지 않게 부족은 올해도 건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곰을 꿰뚫는’ 형님, 뭐하슈?”


 갑작스레 옆에 다가와 말을 거는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다. 물론 뒤를 돌아보기 전에도 이미 목소리로 누군지는 알고 있다. 그보다 두 연배 밑의 부족원, ‘큰 돌멩이’이다.

 “넌 임마, 꼭 이 형님이 폼 좀 잡는 걸 그렇게 방해해야겠냐?”
 “폼은 무슨.... 시도 때도 없이 쓸데없는 생각에 잠기는 거 보니 형님도 늙으셨소?”
 “늙긴 자식이, 너도 나랑 얼마나 차이난다고?”

 농을 주고받으며 그의 옆에 서는 ‘큰 돌멩이’. 마찬가지로 아래의 울창한 숲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린다.

 “햐~ 우리도 저런 풍족한 땅 하나 차지하면 돌아다니면서 살지 않아도 될 텐데 말요.”
 “또,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임자 있는 땅 탐내지 말라고 장로님들이 몇 번을 말씀하셨냐?”

 입으로는 면박을 주지만, 그라고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니다. 지금은 느긋하고 온화한 성격인 된 그이지만, ‘곰을 꿰뚫는 자’라는 이름을 받은 것에서 알 수 있든 젊은 시절엔 혈기왕성하고 세상 무서운 줄 몰랐었다. 그렇기에 그 시절엔 그 역시 부족을 따라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풍족한 땅에 정착해 하는 다른 인간 부족들이나 ‘작은 턱’의 부족들을 부러워하기도 했고, 건기에 이 바위산에 올 때마다 저 아래의 숲을 보며 ‘저 숲이 우리 부족의 것이었다면’과 같은 생각을 하곤 했다. ‘왜 우리 부족은 과감하게 전쟁을 벌여 저런 비옥한 땅을 차지하려 하지 않는 걸까?’하는 생각을 입 밖으로 내었다가 대장로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물론 우리 부족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부족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편하게 안주해 살지 않는 만큼 그의 부족은 강인했다. 그가 만난 그 어느 부족들보다도 노련한 사냥꾼들이었고, 그들이 먼저 전쟁을 벌인 적은 없어도 다른 부족이 시비를 걸어올 때에는 언제나 승리하곤 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른 민족들의 땅을 먼저 침략하지 않는다는 나름의 원칙을 고수했다.
 젊은 날엔 이해가 가지 않던 부족의 원칙. 하지만 그도 짝을 찾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나이가 되니 이제는 이해하고 있다. 아무리 그들의 부족이 강인하다 해도, 전쟁에는 많은 희생이 따른다. 전쟁을 벌여 죽는 것이 나일지도, 내 아내일지도, 내 자식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렇게 전쟁을 해서 얻는 것이 그만큼 가치 있나?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대가로 할 정도로? 혹여 부족이 먹을 것이 없고 자원이 없어 절체절명의 위기에 있다면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까지 부족은 생존의 위기라고 할 만한 무언가를 겪은 적은 없었다. 풍족한 땅을 차지하지 못해 나무 열매나 씨앗, 낱알을 맺는 풀 따위는 구하기 어려웠으나 그만큼 그들은 사냥에 능했다. 장로들은 사냥감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는데 능숙했고, 장인들은 신기한 무기와 도구들을 계속 발명해 내었으며, 사냥꾼들은 용감하고 날랬다. 먹을 수 있는 열매나 씨앗류, 그 밖에 숲에서 나는 각종 자원은 남아도는 말린 고기와 가죽을 가지고 다른 부족과 거래하여 얻으면 그만이다. 실제로 건기에 여기에서 월동을 할 때면, 장로가 이끄는 부족의 대표들이 저 숲의 ‘작은 턱’ 녀석들을 만나 거래를 하곤 한다. 우리는 저들에게 말린 고기와 털가죽을, 저들은 우리에게 말린 과일과 목재를. 저 숲을 차지한다면 지금보다 윤택해지는 부분은 있겠지만, 부족원의 목숨을 희생해야할 정도는 아니다.
 그의 생각을 눈치 챈 듯, ‘큰 돌멩이’도 너스레를 떨며 말을 잇는다.

 “아이고 형님,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누가 쳐들어가기라도 한답니까? 나도 전쟁 무서운 줄이야 알지. 우리 작은 놈도 이제 슬슬 사냥 배우러 어른들 따라다닐 나이인데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진다니까.”
 “됐어, 인마. 해진다. 슬슬 들어가자.”

 두 사내는 나무창을 주워들고 부족의 보금자리인 큰 동굴을 향해 발길을 돌린다. 이 바위산엔 건장한 사냥꾼 수십 명도 들어갈 만한 큰 동굴이 하나, 그보다는 작아도 2~3 가족이 함께 쓰기엔 넉넉한 동굴 십수 개가 있어 건기마다 부족의 소중한 피난처가 되어주고 있다. 오늘 막 이주를 마친 참이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어야한다. 내일부터는 슬슬 사냥감들을 추적하기 시작해야하니.

 “치, 치잇!! 테치잇!! 테챠아아아앗!!”

 그 때, 생전 처음 들어보는 짐승의 비명소리가 산 아래쪽에서 들러왔다.

 “.... 방금 그거, 우리가 아는 짐승 소리냐?”
 “형님이 모르는 걸 내가 알겠소?”

 두 사내는 약속이나 한 듯 잠시 서로를 바라고보는, 즉시 나무창을 손에 꼬나 쥐고 조심스레 산 아래를 내려다본다. 새로운 짐승에 대한 정보는 중요하다. 그 놈이 사냥꾼인지 사냥감인지, 먹을 수는 있는지, 쓸만한 가죽이나 발톱, 뿔 따위를 가졌는지, 활동 반경은 어떻고 습성은 어떠한지 빠르게 파악해야한다.
 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내려다보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두 사내에게 익숙한 짐승, 살쾡이다. 하지만 살쾡이는 그런 식으로 울지 않는다. 실제로 소리는 살쾡이에게서 들려오지 않는다. 살쾡이는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고 샤악거리며, 눈앞의 바위틈으로 발톱을 집어넣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그리고 예의 그 소리는....

 “테챠앗!! 테샤아아아아앗!! 치이잇!!...... 텟츙~♡ 텟츄웅~♡”

 바로 그 바위틈에서 들려온다. 제법 먼 거리라 바위틈에 뭐가 있는지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세 가지는 알 수 있다. 살쾡이에게 쫓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놈은 사냥꾼이 아니다. 바위틈에 숨어 있는 것으로 보아 놈은 몸집이 작다. 그리고 저 거리에서 여기까지 들릴만큼 울음소리 하나는 우렁차다. 우선 부족원들에게 보고부터? 아니다. 그 사이에 살쾡이에게 당하거나 도망치기라도 하면 새로운 짐승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잃는다. 우리가 잘 아는 짐승이라면 시간이 지나도 흔적을 통해 추적이 가능하다. 하지만 우리는 이 짐승에 대해선 아는 것이 없다. 새로운 짐승에게 접근하는 것은 언제나 위험이 따르지만.... 나와 이 녀석 둘이라면.

 “가보자. 내가 바위에 접근할 테니 너는 살쾡이를 쫓아.”

 ‘큰 돌멩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발치에서 주먹만 한 돌멩이 서너 개를 주워, 허리춤에 차고 있던 투석구에 매긴다. 녀석이 들고 있는 투석구는 단순해보이지만 굉장한 위력을 지닌, 우리 부족 최고의 장인이 발명해낸 그야말로 부족의 비밀병기. 그리고 녀석은 부족 최고의 팔매꾼이다. 휘릭, 소리와 함께 녀석이 날린 첫 번째 팔매가 살쾡이의 발치에 떨어진다. 빗나간 것이 아니라 일부러 빗 맞춘 것. 이것은 ‘이 곳은 우리 인간의 영역이니 썩 꺼져라’라는 ‘경고’이다. 우리는 두 사람 뿐이고 본격적으로 사냥을 할 채비를 하고 나온 것이 아니기에 살쾡이놈과 싸우지 않고 쫓아내는 것이 최선. 물론 살쾡이는 지금 지닌 팔매와 나무창만으로도 사냥하지 못할만한 짐승은 아니나 그렇다고 보이는 것만큼 만만한 녀석도 아니기에, 새로운 짐승을 발견하고 가능하면 추적하거나 포획해야 하는 현 상황에서 살쾡이와 싸워 힘을 빼거나 상처라도 입는다면 낭패이다.
 갑자기 발치에 날아와 깨진 주먹만한 돌멩이에 살쾡이는 반사적으로 뒤로 뛰어 거리를 벌리고는, 돌이 날아온 방향을 바라본다. 거기에는 일부러 모습을 드러낸 ‘큰 돌멩이’ 녀석이 짐짓 과장된 몸짓으로 다음 돌멩이가 매겨진 투석구를 빙빙 돌린다. 잠시간의 대치. 서로에 대한 치열한 탐색. 하지만 상대가 만만하지 않음을 깨달은 살쾡이 녀석은 마지막 자존심으로 ‘샤아앗!’하고 울어보이고는, 신속하게 자리를 떠난다.
 그 사이, ‘곰을 꿰뚫는 자’는 반대방향으로 살금살금 접근해 어느 샌가 바위틈이 잘 보이는 맞은편의 작은 덤불에 몸을 숨기고 있다. 바위틈에는 확실히 생전 처음 보는 작은 짐승이 있다. 몸통의 털 색깔은 전체적으로 녹색. 얼굴과 팔다리 말단은 연분홍빛이 돌고, 목부터 가슴까지의 부위의 털은 흰색이다. 크기는 대략 그의 손바닥에 조금 못 미치는 정도. 동글동글한 얼굴에 큼지막하게 박혀있는 눈은 색이 서로 다르다. 오른쪽은 빨강, 왼쪽은 녹색. 참으로 해괴한 생김새. 특이한 점이라면 인간처럼 두 발로 서서 팔다리를 붕쯔붕쯔 흔들고 있다는 점. 원숭이의 일종인가? 하지만 이 부근에 원숭이는 살지 않을 텐데? ‘작은 턱’ 녀석들의 숲에서 나온 놈인가? 숲에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저 숲이라면 원숭이가 있을 법도 하다..... 그는 작은 짐승을 꼼꼼히 살핀다. 신중해야한다. 뿔이 있는가? 없다. 이빨이나 발톱이 날카로운가? 아니다. 침 같은 것이 돋아있나? 없다. 일단 겉보기로는 맹수나 독충 따위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포획을 시도해도 될까?
 작은 짐승의 기척을 살핀다. 놈이 이쪽을 경계하고 있다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좋으리라. 하지만 놈은 어깨와 허리를 펴고, 한 손을 입가에 올리고는

 “치프프프프.....”

 아까와는 다른 울음소리를 낸다. 울음소리의 뉘앙스나 헤벌쭉 벌어진 입, 초승달처럼 휜 눈은 아무리 봐도 인간의 웃는 모습과 비슷하다.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가? 아니면 자기가 살쾡이를 쫓아냈다고 생각하고 의기양양해 하는 건가? 처음 보는 짐승이라 알 수는 없지만, 그는 놈이 의기양양해 웃고 있다고 직감적으로 느낀다.
 ‘곰을 꿰뚫는 자’는 ‘큰 돌멩이’에게 손짓으로 신호를 보낸다. ‘큰 돌멩이’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투석구를 언제든 날릴 수 있게 빙빙 돌린다. ‘곰을 꿰뚫는 자’는 허리를 숙여 수풀에 몸을 숨긴 채, 소리 내지 않고 최대한 천천히 바위틈으로 접근한다. 30보 거리. 20보 거리. 10보 거리. 어느덧 그가 수풀 밖으로 몸을 드러내고 상당히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했음에도 작은 짐승은 눈치 채는 기척이 없다. 상당히 감각이 둔한 녀석인가.... 남자는 단단히 쥔 나무창을 앞으로 내밀고 몸을 뒤로 기울여 방어 자세를 취한 채 더욱 접근한다. 5보 거리. 말 그대로 코 앞. 그 때까지도 ‘치프프! 테퍄퍄!’하는 소리로 울던 녀석은 그제야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텟?”

 잠시 경직. 그는 감각을 최대한 날카롭게 한다. 덤비려하면 바로 뒤로 피한다. 그러면 ‘큰 돌맹이’ 녀석이 처리해줄 것이다. 도망치려하면 나무창으로 하체를 쳐 무력화시킨다. 하지만 작은 짐승은 예상외의 행동을 한다. 뭐라 뭐라 말을 거는 듯한 울음소리와 함께, 놈은 여유 있게 천천히 남자 쪽을 위해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테챠!! 테치, 테치치 테차앗!”

 놈의 울음소리는 처음의 비명이나 아까의 웃음소리 비슷한 것과는 또 다른 톤이다. 뭐랄까,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언어’를 가지고 말을 거는 느낌이랄까? 그것도 경계하는 기색 없이 당연하다는 듯이.
 공격적인 반응으로 보이거나 도망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은 곧 포획을 시도해 볼만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웃통에 두르고 있던 가죽옷을 조심스럽게 벗어 왼팔에 두른다. 혹여 독침 같은 것을 감추고 있는 짐승이라도 이것으로 안심이다. 그의 가죽옷은 큰 곰의 가죽을 질기게 무두질해 만든 것으로, 사막 코브라의 독니조차 막아내는 든든한 방어구이다. 허리를 숙이고 여전히 오른손으로는 나무창을 겨눈 채, 가죽옷을 두른 왼팔을 앞으로 내밀며 짐승을 향해 조금씩 다가간다. 그리고 놈을 낚아챌 수 있을만한 거리까지 다가가 놈의 반응을 잠시 살핀다.

 “치프프풋. 테치, 테츄~ 테프프....”

 놈은 뭐가 즐거운지 아까의 웃는듯한 표정과 울음소리를 내더니- 스스로 그의 왼팔 쪽으로 다가와, 털가죽을 붙잡고는, 올라탄다. 그러고는 남자에게 또 말을 걸 듯 짖는다.

 “테치, 테치, 텟, 테치치.”

 너무도 예상치 못한 반응에 두 사내는 당황한다. 뭐지? 인간을 경계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서 스스로 인간에게 붙잡히는 짐승이라니? 이건.... 이건 야생동물의 반응이 아니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짐승의 반응에 가깝다. 어쩌면 우리 부족이 이리를 길들여서 데리고 다니는 것처럼, 저 숲의 ‘작은 턱’ 녀석들이 길들인 짐승인지도 모른다. 자세히 살펴보니 털이라고 생각했던 녹색은 마치 인간이 지어입는 옷처럼 생겼고, 목에는 뼈로 만든 작은 목걸이를 걸고 있다. 이걸 이 짐승이 직접 만들었을리는 없지. 만일 그렇다면, 이 짐승을 함부로 대했다간 자칫 ‘작은 턱’ 놈들과 마찰이 생길지도. 어느새 날래게 달려와 곁에 선 ‘큰 돌멩이’가 신기한 듯이 짐승을 쳐다본다.

 “이 놈, 지금 스스로 형님 손에 탄거유?”
 “너랑 내가 동시에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렇겠지.”
 “뭔 짐승이 지 발로 사람 손에 탄답니까?”
 “행동하는 거나, 옷을 입고 목걸이까지 한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길들여진 짐승 같은데. 우리 부족은 이런 놈 길들인 적이 없으니 저 숲의 ‘작은 턱’ 놈들이 키우는 짐승일지도?”
 “겉보기엔 길들여서 써먹을만한 놈은 아닌 것 같은디.....”
 “낸들 아냐. 그냥 추측이지. 어차피 곧 밤이고 하니, 일단 동굴로 데려가서 대장로님께 보여드리자. 대장로님은 뭔가 아시겠지.”



#4

 장녀는 지금 자신을 모시고 있는 두 닝겐 노예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와타치를 발견하는게 늦어, 네발 분충에게 슬픈 일을 당할 뻔하지 않았나! 역겨운 네발 분충 따위가 와타치의 빛나는 위엄을 견뎌낼 리가 없었기에 와타치의 고귀한 애교를 보자마자 그 광채를 견디지 못하고 도망가기는 하였지만, 애초에 네발 분충 따위에 그녀가 직접 나서야 했던 것 자체가 굴욕이다. 와타치의 애교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가. 지고의 여신이자 전지전능한 숲의 여신, 마마에게도 하루에 세 번 이상은 보여주지 않는다. 그녀를 충실히 모시는 잘생기고 충직한 마라 노예에게조차 지금까지 한 번 밖에 보여주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녀를 제대로 모시지 않은 닝겐 노예들 때문에, 고귀한 그녀가 자그마치 두 번이나 그 귀하디귀한 애교를 사용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도 하찮은 덤불 따위와 역겨운 네발 분충 따위에게!
 미물에게 애교를 베풀어야 했던 굴욕, 잊을 수 없다. 그것만으로도 닝겐 노예들이 전부 모여와 스스로 독라가 되고 알몸으로 석고대죄를 해야할 판인데, 지금 이 두 놈의 닝겐 노예들은 뭐란 말인가.
관대한 그녀는, 비록 그녀를 찾아 모시는 게 늦어 네발 분충 따위에게 애교를 쓰게 만들긴 했어도, 이 위험천만한 숲 밖의 지옥까지 그녀를 찾아 나선 노고를 생각하여 알몸 석고대죄 정도로 봐주려고 했었다. 그들이 공손하게, 최선을 다해, 그녀에게 걸맞은 지고의 흠숭지례를 갖추어 그녀를 모시기만 했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 두 놈의 닝겐 노예는 예의범절 같은 것은 어디에 팔아치웠는지, 그저 그녀를 구한다는 최소한의 도리만을 뻣뻣하게 수행했다. 앞으로 엎어져서 구더기처럼 기어와도 시원찮을 닝겐 노예 주제에 똑바로 서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관등성명을 대라는 그녀의 명령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심지어 딱딱하고 좁은 나뭇가지에 그녀를 태우려고 했다!! 물론 그녀가 호통을 치자 그 위엄에 짓눌려 부드럽고 폭신한 가죽을 준비하긴 했지만, 애초에 호통을 쳐야 알아듣는다니 노예로서 실격인 것이다.
 하긴, 하고 있는 꼬라지를 보니 애초에 제대로 된 노예들 같지도 않다. 마마와 함께 집에서 부리던 닝겐 노예들은 덩치도 건장하고, 우락부락하고, 빠릿빠릿한게 노예치고는 머리도 잘 돌아가는 듯했다. 하지만 이 닝겐 노예들은 체격도 왜소하고, 마르고, 키만 쓸데 없이 커서 볼품없다. 심지어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이상한 울음소리로 짖기만 하지 그녀의 말을 잘 알아듣지도, 그녀에게 뭔가 대답을 하지도 못 하는걸 보니 말조차 제대로 못 하는 멍청이들 같다.
 마마와 함께 부리던 노예들 중에서 이런 머저리들은 본 적이 없는데.... 이것들은 뭘까. 장녀는 잠시 생각을 해 보았고, 금방 답을 추리해내었다. 애초에 이런 왜소하고 멍청한 모지리들이니까 축복받은 숲 안에서 고귀한 와타치타치를 모시는 행운을 누리지 못 하고 이렇게 숲 밖의 지옥에서 노역을 하는 게 아니겠는가. 문득 마마가 ‘분충인 자는 솎아내서 숲 밖으로 쫓아낸다’고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어쩌면 닝겐 노예들에게도 분충인 노예는 솎아내는 규칙이 있는지도 모른다. 이 노예들은 존엄한 와타치타치를 모시기에 너무 하찮고 부족해서, 충직한 노예들에 의해 솎아내진 것이다!! 머릿속에서 모든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것을 느끼며, 장녀는 스스로에게 감탄한다. 몇 가지 사소한 단서로 이 모든 사실을 추리해내다니, 와타치는 대체 얼마나 똑똑하고 지혜로운거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두 노예는 장녀를 모시고 바위산을 올라 커다란 동굴 안으로 들어간다.장녀는 노예들이 바로 마마의 궁전으로 그녀를 모시지 않는 것에 놀라 호통을 쳤으나, 해씨가 땅씨와 거의 붙어서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인 것을 보고는 잠자코 있기로 한다. 해가 지면 일가의 취침 시간. 장녀 역시 포근한 털가죽에 앉으니 숲을 헤매느라 쌓인 피로가 몰려와 졸음을 느끼고 있던 참이다. 미녀는 잠꾸러기인 법. 그녀는 하늘을 덮을만한 미의 화신인 만큼 숙면을 그르쳐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도, 일단은 아쉬우나마 여기서 숙면을 취하고 내일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 옳다.
 그녀가 노예들을 거느리고 들어간 동굴은 그녀와 가족들이 살던 궁전 못지않게 넓고 크다. 동굴 안에는 여기저기 불이 피워져있고, 그 불 주위로 다른 노예들이 둘러앉아 있다. 노예들은 자기들끼리 뭐라뭐라 짖어대더니, 곧 장녀를 발견하고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장녀를 바라본다. 몇몇 노예들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나 장녀를 가까이 보려 다가왔다가, 장녀를 모시고 있는 노예가 뭐라 뭐라 짖으니 곧 다시 자리로 돌아간다. 솎아내기를 당해 숲 밖으로 쫓겨난, 그래서 지존한 와타치타치를 모시는 영예를 처음으로 입어보는 노예들이니 당연한 반응일 것이다.

 -....배고픈테츄.

 털가죽의 포근함과 불이 피워진 동굴 안의 온기에 긴장이 풀린 장녀는 그제야 그녀의 배가 꺼졌음을 깨닫는다. 언제나 산책 후에는 아마아마한 과일들, 우마우마한 꼬기나 생선살 따위를 야식으로 먹고 잠들기전 마지막으로 자매들과 실컷 놀다가 기절하듯 잠자리에 들곤 했다. 그렇잖아도 야식을 넘겼는데, 숲과 광야를 헤맨데다가 세레브한 애교를 두 번이나 했다. 꼬르륵.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마마보다 먼저 꼬기에 손을 댔다가 벌로 밥빼기를 당했던 날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배에서 나본 적이 없는 공복의 소리가 난다.

 -노예들! 와타치가 배고픈테츄!! 먹을 것을 준비하는테치! 꼬기가 좋지만 꼬기가 없다면 특별히 알록달록 과일이라도 용서해주는테치!! 밥을 먹은 이후엔 바로 잠자리에 들 것이니 이 가죽을 따뜻한 곳에 깔아놓는테챠!!

 장녀는 노예들에게 밥과 잠자리를 명령해보지만, 이 노예들은 말귀도 못 알아듣고 말을 하지도 못 하는 바보들임을 기억해내고는 명령하기를 그만둔다. 그래도 와타치를 모실 폭신한 털가죽을 준비한 거라든지, 감히 와타치에게 다가오려는 미천한 노예를 제지한 것을 보면 눈치는 있어 보이니 알아서 준비할지도 모른다고, 장녀는 막연한 기대를 품는다.
 두 노예는 동굴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더니, 한 백발의 늙은 노예 앞에서 멈춘다. 문득 숲에서 와타치타치를 모시는 노예들의 우두머리인 백발 노예를 떠올린다. 그 노예는 암컷 노예였고 지금 눈 앞의 노예는 마라 노예라는 차이는 있지만, 둘 다 백발이 성성하다. 닝겐 노예들 사이에서는 백발인 것이 세레브한건가?라는 작은 의문을 품어본다. 두 노예는 백발 노예 앞에 장녀를 내려 놓고는, 서로 짖는 소리를 주고받는다. 저건 아마 와타치를 위해 세레브한 꼬기와 잠자리를 준비하라는 지시일거다. 한참을 뭐라 뭐라 하던 노예들. 곧 한 노예가 어디론가 가더니, 다른 노예, 숲의 노예들과 좀 더 비슷한 익숙한 노예 하나를 데리고 온다. 이 머저리 노예들보다 약간 작은 키, 상대적으로 작은 턱과 튀어나온 입, 건장한 근육질의 팔다리. 내일 와타치를 숲까지 모실 숲의 노예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새로 나타난 노예는 마찬가지로 짖는 소리를 내어 백발의 노예와 뭐라 뭐라 떠들어댄다. 말은 못 하고 짖어대는걸 보니 생긴 것만 숲 노예와 비슷했던걸까. 말귀를 알아듣는 노예가 나타났나, 하는 기대를 품고 있던 장녀는 작게 실망한다. 하지만, 그녀는 곧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너, 어디서 왔어?

 새로 나타난 노예는 숲에서 온 노예가 맞았다! 드디어 말이 통하는 노예가 나타났다는 기쁨에, 노예가 건방지게 그녀를 ‘너’라고 불렀다는 점에 대해서는 나중에 야단치기로 한다.

 -노예, 지금까지 어디서 뭘 한테치!! 세상의 보배인 와타치가 숲 밖을 헤매게 한테챠!! 이 불충은 죽음으로 갚아야 마땅한테치! 하지만 오늘은 피곤하니 처벌은 나중으로 미뤄주는테치. 일단은 밥을 대령하고 그 다음엔 폭신폭신 따끈따끈한 잠자리를 준비하는테샤앗!!
 -.....뭐라고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무튼 숲에서 왔다는건가?
 -그럼 고귀한 숲의 여신인 와타치가 숲에서 오지 어디서오는테치! 감히 숲의 주인님인, 아니 주인님의 장녀인 와타치를 못 알아보는 테치카! 눈구멍이 옹이구멍인테치??
 -미안하다. 너희들의 말, 그렇게 유창하게는 못 한다. 아무튼 숲에서 왔다는 건가.
 -당연한테샤! 똥노예는 닥치고 일단 밥과 잠자리를 준비하는테챠!

 말할 줄 아는 노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더니, 다시 짐승의 울음소리로 백발 노예와 뭐라 뭐라 주고받는다. 그리고는 장녀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밥 줄 수 있다. 하지만 너 뭘 먹고 사는지 잘 모른다. 먹고 싶은걸 말하면 준다.
 -흠, 말투가 건방지긴 하지만 좋은 질문인테치. 아마아마한 꼬기가 가장 좋은테치. 육즙이 풍부한 뱃살이어야 하는테치. 타지 않게 잘 구워서 오는테치..... 아니, 그 전에 감히 그런 것도 몰라서 와타치에게 물어보는테챠앗!! 똥노예들인테치!
 -구운 고기? 그거라면 줄 수 있다. 기다리고 있어라.

 구운 꼬기를 준다고? 말투는 건방져도 기본은 할 줄 아는 노예인 모양이다. 장녀는 육즙 가득한 꼬기의 맛을 떠올리고는 언청이 입 가득 침을 질질 흘리며, 똥노예에게 내릴 처벌을 독라달마형에서 알몸 석고대죄로 낮춰줘야겠다고 생각한다.


#5

 “테찹테찹”

 추접스러운 소리를 내며 고기를 뜯는 녹색 짐승, 아니 녹색 옷(?)을 입은 살색 짐승을 보며 ‘곰을 꿰뚫는 자’는 기가 막혔다. 자기가 잘못 들었나? 일단 대장로님의 지식이 틀릴 리는 없으니, 내가 잘못 들은 것이겠지.

 “아니, 대장로님, 제가 방금 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다시 여쭤볼게요. 이놈이 뭐라고요?”
 “잘못 들은 거 아녀. 이놈은 틀림없이 저 숲에 사는 ‘작은 턱’들이 숭배하는 숲의 여신이라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숲의 여신의 사자라고 해야겠지?”
 “그러니까 이놈들 – 이런 놈이 더 있다면 – 이 저 숲 속 ‘작은 턱’ 놈들의 토템이란 말씀이시죠?”
 “간단히 이야기하면 그렇지. 지난해에 ‘작은 턱’들과 거래하러 갔다가, 먼발치에서 본 적이 있다네. 이놈이랑 생긴 건 같지만 덩치는 훨씬 큰, 덩치가 두 뼘 조금 안 되는 짐승이 있었는데 ‘작은 턱’들이 그 짐승을 ‘숲의 여신의 사자’라 하더군. 그리고 그보다 작은, 지금 이 놈이랑 똑같은 놈들도 제법 많았는데 그게 ‘숲의 여신의 사자’의 딸들이라고. 이놈은 아마 그 딸들 중 하나일게고.”
 “대장로님께서 직접 보셨다니까 확실하겠네요. 근데 그 놈들은 왜 이딴 짐승을 토템으로 섬기죠? 생전 처음 보는 짐승이긴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냥 들쥐 수준 밖에 안 되어 보이는데요.”

 이건 참 기묘한 일이다. 아무리 ‘작은 턱’ 놈들이 우리 인간들과 문화도 종교도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부족의 ‘토템’은 강하거나, 튼튼하거나, 날래거나, 재주가 많은 짐승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야 그 토템을 섬김으로서 힘을 얻는다. 우리 부족만 해도 곰을 토템으로 삼고, 그 힘을 얻어 이 일대 최고의 사냥꾼 부족으로 발전하지 않았는가. 지금까지 만나 본 다른 부족들도 다 그랬다. 이리를 토템으로 삼은 부족, 독수리를 토템으로 삼은 부족, 코끼리를 토템으로 삼은 부족.... 그런데 이런 짐승을 토템으로 삼는다고?

 “예끼, 다른 부족의 풍습이나 신앙을 무시해선 안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다 이유가 있는 것이지. 나도 얼핏 설명만 들은 것이라 자세히는 모른다만, 이 짐승들에겐 숲을 비옥하게 하고 열매를 잘 맺게 하는 힘이 있다고 들었다. 게다가 새끼를 잘 낳아 기르는, 다산의 힘도 있다고. 숲의 녀석들도 사냥을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숲에서 채집을 더 많이 하고 사니 아무래도 강하고 날랜 것 보다는 숲을 잘 가꾸는 게 중요할테지. 또 자식을 많이 낳아 기르는 것은 어느 부족에나 중요한 것이 아니더냐?”
 “헤에.... 이놈들이 숲을 잘 자라게 한다고요?”
 “녀석들 말로는 그렇다더군. 나도 어떻게 그리 되는지는 모르지. 하지만 자고로 이 세상은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물건이라도 다 나름의 쓰임이 있는 법이네.”

 이 작고 무력해 보이는 짐승이 숲을 풍요롭게 한다니, 그것 참 신기한 일이다. 그게 사실이라면, 숲에 사는 녀석들이니 숲을 풍요롭게 하는 짐승을 토템으로 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지.

 “텟치, 테츄. 테에... 텟치!! 테치테치, 테샤앗!!”
 “데스데스, 데데에, 데이스?”
 “테샤아아아앗!!”
 “데스”

 그 사이에 고기조각을 순식간에 해치운 작은 짐승에게 ‘통역꾼’이 말을 걸고 있다. ‘통역꾼’은 그들의 부족이지만, 동족은 아니다. ‘곰을 꿰뚫는 자’보다 10살 정도 아래인 ‘통역꾼’은 인간이 아닌 ‘작은 턱’이다. 그러나 저 숲의 부족은 아니다. 20여 년 전, 우기 동안 계속 바뀌는 물줄기를 따라 이동하던 중, 어느 ‘작은 턱’ 부족에서 낙오된 녀석을 우리 부족이 발견했다. 녀석을 가엾게 여긴 몇몇 부족원들이 부족에 받아들여 돌볼 것을 제안했고, 부족원 중에 ‘작은 턱’이 있으면 추후 ‘작은 턱’들과 교류하거나 거래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한 장로들은 그 제안을 승인했다. 이후 녀석은 어엿한 우리 부족의 일원으로 성장했고, 아무래도 ‘작은 턱’의 언어도 구사할 수 있어 ‘작은 턱’들과 교류할 때 통역을 담당했기에 ‘통역꾼’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지금, ‘통역꾼’은 ‘작은 턱’들의 언어로 저 짐승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짐승이 ‘작은 턱’의 언어를 한다는 것도 신기하네요. 아니, 이건 ‘작은 턱’들이 짐승 말을 한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요.”
 “그건 나도 이번에 처음 알았구먼. 그 때는 먼발치에서 보고 설명만 들었으니. 짐승이 말을 한다니,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어쩐지 처음 봤을 때부터 자꾸 저랑 ‘큰 돌멩이’에게 뭐라 뭐라 짖어대는 것이, 짐승 짖는 것보단 뭔가 말을 거는 것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통역꾼’ 이야기로는 지금 저 짐승이 ‘작은 턱’ 녀석들과 우리를 구분을 못 하는 것 같네. 그래서 우리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내일 자기가 살던 숲으로 데려다 주기를 요구하는 모양이야.”
 “.....짐승 따위가 시키는 대로 한다는 건 좀 그렇지만, 일단은 그러는 게 맞겠죠.”
 “‘작은 턱’ 녀석들을 생각하면 그렇지. 어차피 내일 날 밝는 대로 ‘작은 턱’들과 교류도 하고 거래도 하러 대표단을 보낼 예정이었네. 기왕 가는 거, 녀석들의 토템을 안전하게 보호해서 데려다주면 앞으로도 녀석들과 평화롭게 지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네.”

 ‘곰을 꿰뚫는 자’는 머리를 긁적인다. 사냥꾼으로서 새로운 짐승을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설레는 경험이지만, 그것이 사냥감이 아니라면 이제는 사냥꾼의 관할 밖이다. ‘작은 턱’과의 교류는 그가 맡은 역할도 아닐 뿐더러, 관심사도 아닌 것이다. ‘큰 돌멩이’ 녀석도 벌써 한참 전에 먼저 가족들이 있는 동굴로 돌아가 버렸다. 내일 새벽녘부터 사냥감들의 흔적을 찾으려면 그도 슬슬 가족들과 함께 눈을 붙여야 할 것이다. 대장로에게 꾸벅 인사하고, 신기한 짐승을 흘끗 한 번 보고, 그는 동굴로 돌아가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 때.

 “저... ‘곰을 꿰뚫는’ 형님?”

 주저하는 목소리로 ‘통역꾼’이 그를 불렀다.

 “저기. 그.... 이쪽 좀 도와주셔야 할 것 같은데요.”
 “피곤해 죽겠구만, 뭔 일인데?”
 “그게, 저.....”

 난처한 얼굴로 말을 꺼내지 못 하는 ‘통역꾼’. 그의 발 아래에는 그 작은 짐승이 팔로 ‘곰을 꿰뚫는 자’를 가리키며 짖어대고, 아니 ‘작은 턱’의 언어로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텟챠아!! 테샤아아아아!! 테치, 테치테치. 테-치이, 텟틀!”
 “....나한테 말을 거는 것 같은데, 뭐라고 하는거냐?”
 “그게 형님, 저.....”
 “뭔데? 욕이라도 하는 거?”
 “욕은 아니긴 한데.... 형님, 전 단지 통역하는 거니까, 그러니까 저한테 화내지 마세요?”
 “텟챠아아아앗!!”
 “아오, 시끄러. 너한테 화 안 낼게. 그래서 뭔데?”
 “그게 그러니까..... 자기 잠자리로 형님 가죽옷을 달라는데요. 마음에 들었다고....”

 꿈틀. 순간 ‘곰을 꿰뚫는 자’의 눈꼬리가 움직였다. 이 가죽옷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였다. 그가 아직 젊은 청년이던 시절, 북쪽 숲과 초원 일대에 군림했던 검은 곰. ‘검은 죽음’이라 불렸던 곰 신의 화신. 놈 때문에 그의 부족 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그 어떤 부족도 북쪽 숲에서 사냥하지 않았다. 하지만 놈은 숲에 만족하지 못하여 인근 초원으로 나와 인간의 사냥터를 빼앗기 시작했고, 사냥을 하지 못해 부족원들이 굶주리기 시작하자 부족의 가장 용맹한 전사들은 ‘검은 죽음’을 사냥하러 나섰다. 부족원들 모두의 미래를 짊어지고 용감하게 출정하던 사냥꾼들 중에서는 그의 아버지도 있었고.... 아무도 살아 돌아오지 못 했다.
 장로들이 부족 전체의 이주를 진지하게 논의하고 있을 무렵. 그는 아버지의 복수를 맹세하며 부족을 떠났다. 인간이 쫓겨난 초원과 숲을 홀로 헤매기를 며칠이던가. ‘검은 죽음’을 발견하고도 기회를 노리며 묵묵히 쫓기만 하던 어느 날, 곰이 물고기 잡기에 정신이 팔린 틈을 노린 그의 투창이 곰의 오른눈을 뚫었고, 분노한 곰을 따돌려가며 끈질기게 놈을 괴롭힌 끝에 그는 출혈을 감당하지 못하고 결국 쓰러진 곰의 심장에 창을 찔러 넣었다. 놈의 심장을 꺼내 씹고 놈의 가죽을 벗겨 부족에게 돌아온 그는 ‘곰을 꿰뚫는 자’라는 이름을 얻고, 일대의 영웅이 되었다. 검은 곰의 가죽으로 만든 옷은 아버지의 복수를 했다는 증거였고, 곰 신의 힘을 이어받은 부족의 영웅으로서의 훈장이었으며, 그의 자부심이었다. 검은 곰 가죽을 걸친 그의 모습에 황야의 맹수들도 두려움을 느껴 도망쳤으며, 다른 부족의 사냥꾼들도 그를 마주치면 경의를 표하며 물러났다. 그런 가죽옷을....뭐라고?

 “혀, 형님, 이 놈 내일 숲에 돌려보내기로 한 거 기억하시죠?”

 넓은 동굴 안이 누군가의 살기로 가득 차는 것을 느낀 ‘통역꾼’이 허겁지겁 그를 말린다. 심상찮은 분위기에, 아직 잠자리에 들지 않고 상황을 지켜보던 부족원들의 이목이 집중된다.

 “잠깐 비켜봐.”
 “형님! 내일 이 놈이 시체로 발견되면 큰일납니다!”
 “아, 안 죽이니까 비켜봐.”
 “테샤아아아앗!! 텟챠앗!!”

 덩치는 한 뼘만 한 놈이 눈치 없이 소리를 지른다. 자기 맘대로 되지 않자 심통이 났는지 기괴하게 찡그리고 벌게진 얼굴로 연신 소리를 지르더니, 한 손을 가랑이에 집어넣고는 자기 똥을 한 줌 꺼내어..... ‘곰을 꿰뚫는 자’에게 던진다.

 철썩

 너무도 적나라한 소리에 부족원 모두가 숨을 죽인다.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녹색의 질척한 물건이 ‘곰을 꿰뚫는 자’의 정강이께에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다. 잠시간의 정적. 그를 말리던 ‘통역꾼’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한 발 비켜선다. 인간과 ‘작은 턱’은 물론 그 밖의 모든 영장류들에게 공통적으로 투분은 상대에게 도전하겠다는 것, 곧 전쟁 선포를 의미한다. 이건 말릴 수 없다. 끝났다. 이제 저 놈은 죽었다. 장로님들께는 뭐라고 설명하지? 숲의 놈들과 전쟁이라도 나려나? 그 사이, ‘곰을 꿰뚫는 자’는 조용히 다가가, 눈을 초승달로 만들고 ‘테프프픗’거리며 웃는 작은 짐승을 손으로 집어, 눈앞에 들어올린다.

 “야, ‘통역꾼’.”
 “....네, 형님.”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 한 자도 흘리지 말고 똑똑히 전해라.”
 “아, 넵!”
 “가능하면 과격하고 적나라한 어휘로 전해주면 더 좋고.”
 “알겠습니다!”

 작은 짐승을 쥔 손에 서서히 힘이 들어간다. 초승달눈으로 계속 ‘치프프프’거리던 놈은, 자기 몸이 억센 힘으로 죄어지는 것을 느끼자 그제야 정신을 차린다.

 “테치앗! 치이이이이잇!!”

 조막만한 두 손을 붕쯔붕쯔 흔들며 뭐라뭐라하던 짐승. 그러나 놈의 몸을 터트릴 듯 조여드는 손아귀는 멈추지 않는다. 어느 샌가 놈의 온 몸은 벌개지고, 커다란 두 눈이 톡 치면 빠져버릴 듯 튀어나온다. 그제야 터져버릴 듯한 눈을 들어 코앞의 인간과 눈을 마주치는 녀석. 놈은 정면에서 덮쳐오는, 생전 처음 느끼는 ‘살기’라는 것에 순식간에 압도되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는 부들부들 떤다. 두 눈에서는 눈 색과 같은 빨강과 초록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다. 그제야 자기가 얼마나 무서운 상대를 건드렸는지를 깨달은 것인가. 온 몸을 공포로 떠는 짐승은 용서라도 빌려는 것인지 오른손을 입가로 올린다.

 “텟츙~♡”

 아양이라도 떨어 이 상황을 모면해보려는 것일까, 수십 초 전의 의기양양함은 어디로 갔는지 급격히 비굴해진 짐승에게, ‘곰을 꿰뚫는 자’는 ‘통역꾼’을 통해 말을 전한다.

 “잘 들어라. 너가 숲의 여신의 딸인지 나발인지는 모르겠다만, 숲에 살지 않는 우리에게는 아무 상관이 없지. 우리는 이 거친 황야에서 사는 사냥꾼들이고, 우리의 신은 강인한 곰 신이다. 그러니까 숲을 가꾸는 재주는 있을지언정 사냥하는 재주는 없는 네놈은 우리에게 있어서는 황야에 굴러다니는 들쥐만도 못 한 놈이지. 네놈을 살려두는 건 말 그대로 네놈이 죽일 가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닥치고 조용히 있다가 내일 네놈들 숲으로 꺼져. 그리고 다시는 거기서 튀어나오지 마라. 알겠어? 알겠으면 고개를 끄덕여. 그렇지. 그리고 내게 감사를 표해야지? 응? 내가 지금 널 살려줬잖아? 감사함을 느끼면 고개를 숙여. 그렇지.”

 ‘곰을 꿰뚫는 자’는 놈을 쥐어짜던 손에 힘을 빼고는, 공포에 완전히 얼어 고분고분해진 놈을 바닥에 내려놓고 손가락으로 가볍게 쓰다듬는다. 하지만 그것은 전혀 다정해보이지 않는다. 그 광경은 오히려, 사자가 사냥감의 숨통을 끊기 전에 그 목덜미를 혀로 핥는 행동에 가깝다.

 “야, ‘통역꾼’.”
 “네, 형님.”
 “제대로 전했어?”
 “제가 아는 한 가장 끔찍한 단어로 전했습니다.”
 “그럼 저 놈, 사람 없는 곳에 눕혀놓고 빨리 재워라. 저 놈은 아무래도 자기 명을 스스로 재촉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으니까.”
 “아, 네, 그렇잖아도 그러려고요.”

 뭐 저런 어리석은 짐승이 다 있지? 저런 미물에게 숲을 풍요롭게 하는 재주가 있다고? 여러모로 의아하지만, ‘곰을 꿰뚫는 자’는 적당히 납득하고 불쾌한 기억은 잊기로 한다. 짐승은 원래 어리석다. 게다가 아직 새끼라고 하지 않았나? 곰이나 사자와 같은 무시무시한 맹수도 새끼 때는 무지하고 무능하다. 아직 고작 새끼인 짐승에게 발끈했던 내가 부끄러운 것일지도. 나이를 먹어도 이놈의 욱하는 성격은 나아지지를 않는다. 훌훌 털고 잊자. 어차피 내일 이후론 저 어딘가 기분 나쁜 짐승도 다시는 볼 일이 없을 테니.


#6

 당장 장녀를 찾아내라며 노예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친실장은, 장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벌떡 일어나 체통도 잊고 동굴 입구로 쿰척쿰척 걸어갔다. 그녀를 닮아 기품 있고 귀여운데다가 그녀의 존엄함을 잘 이해하고 말도 잘 따르는 착한 자였지만, 딱 하나 호기심이 너무 많고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것을 생각하지 못 하는 게 흠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호기심 때문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길을 잃곤 하는 일이 잦았기에, 장녀의 담당 노예들에게 절대 장녀에게 눈을 떼지 말고 어딜 가든 잘 보필하라고 엄명을 내려둔 터였다. 그런데도 감히 장녀를 놓치다니, 노예들에게 너무 물렀었나. 충직한 몇몇 노예들을 보아 불충한 똥노예들을 솎아내는 데에 너무 소홀했던 걸까.
 한 마라노예의 품에 안겨 동굴로 들어온 장녀는 친실장을 보자 울음을 터트린다. 자신을 바닥에 내려달라고 노예에게 명령한 장녀는, 발이 바닥에 닿자마자 토테토테 달려와 친실장의 품에 안긴다.

 -테에에엥.... 마마!! 마마앗!!!
 -장녀! 장녀, 무사했던데스카?
 -테에에에에에엥! 마마, 무서웠던테치! 너무 무서웠던테치!!
 -다친 곳은 없는데스? 몸 건강한테스?

 부랴부랴 장녀를 안고 여기저기 훑어보는 친실장. 조금 초췌해지긴 했어도 팔다리 멀쩡하고, 머리카락도 옷도 온전하다. 휴우. 친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고귀하고 지엄한 그녀의 자들 중에도 분충들은 있었다. 감히 지고한 여신, 이 세상의 존재 이유이자 하늘과도 같은 마마의 존엄함과 전능함을 모르고 마마의 권위에 도전하던 자들. 자신들이 누리는 행복이 모두 마마의 은총임을 망각하고 마마의 자리를 탐하던 자들. 그런 분충들은 눈물을 머금고 솎아냈다. 지금 남아있는 자들은 마마의 은혜에 감사할 줄 알고 마마의 거룩함에 앞에 엎드려 경배할 줄 아는 착한 자들. 그 중에서도 장녀는 특별했다. 단순히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진심으로 친실장의 지존함을 믿고 따르는 자였다. 말도 예쁘게, 싹싹하게 하고 예의범절도 발랐다. 친실장에게는 그렇게 스스로 낮출 줄 알면서도 다른 이들에게는 비굴하거나 소심하지 않았다. 아직 어린데도 벌써부터 노예들을 호령하는 모습을 보면 친실장의 어린 시절과 꼭 닮았다. 그렇기에 가장 많이 기대하던 장녀. 그런 장녀가 실종되었다는 노예의 보고를 들었을 때 얼마나 정신이 아득했던가. 이 세상의 유일무이한 지배자인 친실장에게야 이 세상에 무서울 것 따윈 없었지만, 자들은 홀로서기엔 아직 어리다. 그런 장녀가 하룻밤을 밖에서 꼬박 지내고는 이렇게 몸 건강히 돌아오다니... 실로 천행이다. 어쨌든 무탈하게 돌아왔으니 장녀의 전담 노예를 솎아내는 것은 한 번 참아줄까. 장녀가 말한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전담 마라노예를 썩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임을 친실장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이번엔 옷만 빼앗고 장녀의 총구노예로 삼는 정도로 넘어갈까... 아니다. 계속 이런 식으로 좋게 좋게 넘어가주니까 노예들이 해이해져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것이다. 마음을 다잡으며 장녀를 데리고 온 노예에게 묻는다.

 -어이, 오마에. 장녀를 어디에서 찾은데스?
 -장녀분께서는 숲의 바깥, 황야에서 발견되셨습니다.
 -지금 숲의 바깥이라고 한 데스?
 -.....그렇습니다.
 -오마에!! 숲의 바깥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는데스? 와타시의 소중한 장녀가 숲 밖으로 나갈 때까지 오마에타치는 도대체 뭘 한데스? 눈구멍이 옹이구멍인데스? 감히 와타시의 자들을 모시는 거룩한 임무를 소홀히한데스?
 -죄송합니다, 여신의 사자시여. 그렇잖아도 본인들의 직무를 다하지 못한 담당자들을 해임하고 따로 가둬두었습니다. 분부하시면 적절한 처벌을 내리겠습니다.
 -지금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스? 이것은 오마에타치 모두의 잘못인데샤아앗!! 만일 장녀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오마에타치 전원이 스스로 독라가 되어 도게자를 해도 갚지 못할 지고의 대죄인데스. 다행히 장녀를 무사히 찾았으니 그것까지는 봐주는데스가.... 오마에타치 모두가 와타시와 자들에게 죄를 갚기 위해 더 열심히 봉사해야할 것인데스!!
 -명심하겠습니다.
 -이 숲이 누구 덕분에 이렇게 풍요롭고 번성하는지 매일 기억하는데스! 오마에들이 누리는 세레브한 삶은 모두 와타시의 은총임을 하루라도 잊는다면, 와타시가 오마에들 뿐 아니라 이 숲 전체에 벌을 내릴 것인 데샤아아앗!!

 마라 노예는 고개를 꾸벅, 깊이 숙여보이고는 친실장의 앞을 떠났다. 친실장은 친절하게 장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장녀를 짐짓 꾸짖는다.

 -숲 밖으로 나가다니, 마마가 숲 바깥은 위험하다고 신신당부한 것을 잊은데스카? 장녀는 늘 번번히 길을 잃어 마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데스. 마마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도 분충인데스....
 -테에엥, 마마, 와타치가 잘못한테치.
 -그래도 마마는 장녀가 무사히 돌아와서 기쁜데스. 숲 밖에서는 별 일이 없었던데스? 네발 분충은 안 만난데스?
 -네발 분충을 만났던테치! 무서웠지만 와타치가 숨겨둔 필살 애교를 써서 물리친테치! 애교를 보여주자마자 네발 분충이 도망갔던 텟츙~
 -용감하고 늠름한 것이 역시 마마의 장녀인데스. 하지만 장녀는 아직 어린데스. 마마처럼 무적은 아닌데스. 앞으로도 조심해야하는데스!
 -테.... 알겠는테치.
 -그 밖에는 별 다른 일이 없었던데스?
 -텟, 와타치가 숲 밖에서 이상한 똥노예들을 만났던테치!!

 이상한 똥노예? 숲 밖에는 노예 닝겐들이 살지 않으니, 숲 밖까지 장녀를 찾으러 떠났던 노예들을 장녀가 만난 것일 터이다. 하지만 이상한 똥노예라니? 설마 장녀를 찾으러 갔던 노예들 중에 친실장의 눈이 미치지 않는 숲 밖에서 감히 장녀에게 함부로 대한 닝겐 분충이 있었던 것인가? 화들짝 놀란 친실장. 그렇잖아도 노예들의 기강이 흐트러졌다고 느끼던 참이었다.

 -장녀는 그 똥노예들에 대해 자세히 말해보는데스! 똥노예들이 장녀에게 무슨 짓을 한데스카?
 -와타치가 숲 밖에서 노예 닝겐을 발견해서 달려갔던테치. 그 도중에 네발 분충을 만났지만 잘 물리친테치. 네발 분충이 도망가고 나서 닝겐 노예들이 와타치를 모시러 왔던테치. 그런데 닝겐 노예들이 좀 이상했던테치. 그 닝겐 노예들은 와타치가 하는 말도 제대로 못 알아듣고 자기들도 말을 제대로 못 했던테치. 이상한 울음소리로 서로 짖으면서 말을 주고 받았던테치. 다행히 말을 할 줄 아는 노예도 하나 있어서, 세레브만 잠자리와 우마우마한 밥을 진상하라고 명했던테치! 그러자 시키는대로 와타치에게 세레브한 털가죽 깔개와 구운 꼬기를 대접해서, 그냥 좀 모자란 노예들이라고만 생각했던테치. 그런데....그런데....

 숨 쉴 틈도 없이 말하다가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는지 잠시 말을 더듬는 장녀. 네발 분충에게도 용감히 맞서 싸우는 장녀가 잔뜩 움츠러든 것이 보인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장녀, 걱정말고 마마에게 말하는데스. 혹시 장녀가 안 좋은 일을 당했다면 마마가 꼭 갚아주는데스!
 -테.... 노예 중에 한 놈이 건방지게도 와타치에게 진상된 털가죽을 훔쳐가려고 한테치, 그래서 와타치는 말이 통하는 노예에게 그 건방진 노예를 벌하고 털가죽을 도로 가져올 것을 명한테치. 그랬더니.....
 -그랬더니 뭐인데스? 노예가 감히 반항한데스?
 -그런테치! 그냥 반항한 정도가 아닌테치! 똥노예놈이 건방지게도, 와타치를 손에 쥐고는 힘을 주어 와타치를 터트리려고 한테치! 무, 물론 똥노예의 손 따위는 하나도 아프지 않았던테치! 그런데 똥노예놈이 감히 와타치에게 건방진 말을 한테치!
 -뭐라고 한데스?
 -테.... 똥노예가 말하기를, 자기들은 숲에 살지 않고 숲 바깥에서 사는 닝겐이라고 한테치. 그래서 숲의 여신인 와타치타치가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한테치. 자기들은 그....그.... 뭔진 모르지만 아무튼 다른 신을 섬긴다고 한테치. 그리고는 와타치타치보고는, 숲에서 나오지 말라고 한테치!! 무시무시할 얼굴로 와타치를 협박했던테치!!
 -완전 미친 똥노예인데스! 다른 노예놈들은 미친 똥노예가 그딴 소리를 지껄이게 내버려 뒀던데스카??
 -그런테치! 그런 정도가 아니라, 다른 노예놈들도 전부 그 똥노예의 말에 머리를 끄덕인테치! 와타치는 기가막혀서 말을 할 줄 아는 노예를 야단치고 그 똥노예를 솎아내라고 명한테치. 그런데 말을 할 줄 아는 노예놈도 와타치에게, 그 똥노예의 말대로 하라고 한테치!!

 친실장은 기가 막힌다. 장녀의 말은 이것저것 뒤죽박죽에 혼란스러워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적어도 이것은 확실하다. 감히 고결한 여신, 이 세상의 지배자인 그녀를 숭배하는 것을 거절한 미친 똥노예가 있었다. 게다가 다른 똥노예놈들이 그 똥노예를 솎아내기는커녕 거기에 동조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녀의 자들 가운데에도 분충은 있었듯이, 닝겐 노예들 사이에도 분충은 있을 수 있다. 실제로 그녀도 지금까지 노예들을 부리면서 몇 번은 미친 똥노예를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미친 닝겐 한둘이 무의미하게 반항했을 뿐, 곧 다른 충직한 노예들이 그녀의 명에 따라 똥노예를 솎아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른 노예들까지 미친 똥노예에게 동조하였을 뿐 아니라, 감히 장녀 앞에서 그 똥노예를 두둔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반역? 반역인가? 친실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똥분충 한둘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똥분충이 집단을 이루어 반란을 일으킨다면, 이건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녀는 숲을 가꾸는 그녀의 숭고한 은총을 너그럽게 베풀어 왔다. 그 덕에 숲은 갈수록 번창했고, 그 덕에 살아가는 노예들도 대체로 그녀와 그녀의 딸들에게 충직했다. 그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누구일까. 분충 똥닝겐들은 그때 그때 솎아내었을텐데, 저 숲 바깥에 어떻게?
 숲 바깥.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친실장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떠오른다. 그녀의 자들 중에 분충이 나왔을 때, 그래서 분충인 자를 솎아내야 할 때 어떻게 솎아내었던가? 숲의 바깥, 저주받은 땅으로 쫓아내곤 했었다. 그렇다면, 노예 닝겐들도 자신들 사이의 분충을 솎아낼 때 숲의 바깥으로 쫓아내었을 수 있지 않은가? 숲 바깥은 저주받은 땅, 네발 분충과 악마들이 사는 그 곳에서 하루인들 살아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혹시 솎아내진 똥닝겐들이 그 곳에서 살아남는데 성공했다면? 그들이 무리를 이루고, 자신들을 솎아낸 그녀와 그녀의 충실한 노예들에게 반란을 일으킬 계획을 꾸미고 있다면?
 친실장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낀다. 안일했다. 숲 바깥은 저주받은 곳이기에, 네발 분충과 악마들의 땅이기에, 그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너무 소홀했다. 반역의 싹이 더 크기 전에 뿌리를 뽑아야만 한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친실장은 서둘러 노예를 부른다. 대책을 서둘러야한다.



#7

 잠시 뒤, 백발 노예를 위시하여 노예 닝겐들의 장로들이 친실장 앞에 와 엎드렸다. 분노에 찬 친실장은 노예들을 한바퀴 죽 둘러보고는, 백발의 노예에게 명을 내렸다.

 -오마에, 오마에는 그동안 와타시를 충직하게 섬겼던데스. 그 노고는 치하하는데스. 그래서 와타시는 오마에를 믿는데스. 그러니 와타시가 묻는 바에 성실히 답하는데스.
 -여신의 사자시여,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성실히 답하겠습니다.

 공손하게 답하는 백발 노예.

 -이 숲 밖에는 오마에들이 살지 않는데스. 맞는데스카?
 -그...그렇습니다. 저희들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는 이 숲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일이 있어 숲을 벗어나더라도 서둘러 돌아옵니다. 굳이 숲 밖에서 살지는 않습니다.
 -그런데스? 와타시에게 숨기는 것은 없는데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시온지, 미천한 소인은 모르겠사옵니다.

 정말로 모르는 것일까. 친실장은 그렇기를 바랐다. 이 충직한 노예들이 저 반역의 무리를 알고도 그녀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은 아니기를. 그저 몰라서 대처하지 못 했을 뿐이기를. 그렇다면 장녀에게 직접 듣는 것이 나으리라. 그녀는 장녀를 불러 노예들 앞에 세웠다.

 -장녀, 이리오는데스. 마마의 말에 잘 대답하는데스.
 -하이테츄.
 -장녀는 숲 밖에서 노예들을 만난데스. 맞는데스카?
 -맞는테치! 이상한 똥노예들을 만난테치!

 백발의 노예가 눈썹을 꿈틀한다. 하지만 장녀를 바라보고 있는 친실장은 이를 발견하지 못 했다. 장녀 역시 자기 기억을 더듬는데 골몰하며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그 똥노예들이 뭐라고 했는지 말해보는데스.
 -테.... 그러니까, 자기들은 숲이 아니라 숲 밖의 세상에 사는 닝겐들이라고 한테치. 자기들은 숲에 살지 않기 때문에 와타치타치를 섬기지 않는다고 말한테치. 그래서 와타치에게도 무엄하게 대하고, 와타치의 최소한의 요구조차 제대로 듣지 않은테치! 그리고는 와타치타치에게 감히 이 숲에서 나오지 말라고 위협한테치!!
 -아주 무엄한 놈들인데스. 장녀, 그 똥노예들이 얼마나 되었는데스?
 -많았던테치!! 다섯에 다섯에 다섯에 다섯.... 아무튼 그보다도 더 많았던테치!!

 친실장은 장녀의 대답을 듣고는, 다시 몸을 돌려 노예 장로들을 훑어본다.

 -들은데스? 큰일인데스. 숲 밖에 노예들이 살고 있었던데스. 한둘이 아니라 다섯에 다섯에 다섯에 다섯.... 그보다도 많다고 한데스. 그냥 숲 밖에 사는 노예가 있는 것만으로도 보통 일이 아닌 데스가.... 똥노예들은 감히 자신들이 숲 밖에서 사니 와타시를 섬기지 않는다는 망발을 했다고 하는데스. 감히 와타시를 섬기기를 거부하다니, 반역인데스. 역모인데스. 헌데 그것이 한둘도 아니고 다섯에 다섯에 다섯에 다섯.... 아무튼 엄청 많다고 하는데스. 반란인데스. 대역죄인데스.

 말을 이으며 백발의 노예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친실장. 백발 노예의 표정에 동요의 빛이 서린다. 저 동요는 무엇인가. 숲 밖에 반동분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에 대한 놀라움인가? 아니면 자신이 숨기던 사실을 들킨 데에 대한 놀라움인가.

 -오마에.
 -네, 여신의 사자시여.
 -알고 있었던데스?
 -무엇을....말씀이십니까,
 -저 숲 밖에 똥노예 반역자들이 살고 있다는걸 알고 있었던데스?
 -저, 그건...
 -아니, 대답할 필요 없는데스. 와타시가 말해보는데스. 오마에들은 알고 있었음이 틀림없는데스. 장녀는 분명, 그 똥노예들 중 몇몇이 오늘 이 숲으로 장녀를 데리고 와서 오마에들에게 넘겨주었다고 말한데스. 그러니 지금까지 몰랐다면, 오늘 처음으로 알게 되었을 것인데스. 그렇다면 오마에들은 당연히 똥노예 반역자들이 숲 밖에 살고 있었다는 이 초유의 사태에 즉각 반응을 했을 것인데스. 그 똥노예들을 그 자리에서 붙잡아 와타시 앞에 무릎을 꿇렸어야 정상인데스. 하지만 오마에들은 그렇게 하지 않은데스.

 백발의 노예를 비롯한 장로들은 묵묵히 듣고만 있다. 여신이 말씀하시는 시간에 끼어들지 않는 것이 노예의 마땅한 예의라고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침묵이 친실장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데스? 당연히, 오마에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스.
 -저, 여신의 사자시여. 그것에 대해 설명을...
 -아니, 그것도 와타시가 맞추어보는데스.

 친실장은 분노가 치민 표정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는, 최대한 화를 억누르며 말을 이어나간다.

 -숲 밖에 왜 똥노예들이 살고 있는데스? 원래대로면 그 저주받은 땅에 닝겐이 살 리가 없는데스. 그러니 그 똥노예들도 본래 이 숲에 살던 놈들이었을 것인데스. 그런데 왜 숲 밖에서 사는데스? 그것은 하나 밖에 없는데스. 와타시도 자들 중에 분충이 있으면 숲 밖으로 쫓아내는데스. 오마에들도 닝겐 분충은 솎아내기를 하니, 틀림없이 닝겐 분충을 숲 밖으로 쫓아냈을 것인데스. 하지만 그렇게 쫓겨난 똥노예들이 어찌어찌 살아남은 것인데스.
 -저, 그들은 그런 것이...
 -조용히 듣는데스!! 그들의 수가 많아지자, 오마에들은 그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을 것인데스. 본래대로면 죽었어야 할 똥분충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자마자 직접 가서 전부 죽였어야 할 것인데스가..... 오마에들은 그러지 못한 것인데스. 와타시도 그 심정은 아는데스. 이 세상에서 가장 냉철하고 심지가 굵은 와타시조차도 분충인 자들을 솎아낼 때 가슴이 아파 차마 와타시의 손으로 직접 죽이지 못한데스. 그러니 와타시보다 나약한 오마에들이 똥노예들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도 죽이지 못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하는데스.
 -여신의 사자시여,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아니긴 뭐가 아닌데샤!! 와타시는 관대한데스. 여기까지는 와타시도 이해해주는데스. 하지만, 솎아내기를 당해 숲에서 추방당한 똥닝겐 따위가 감히 와타시의 장녀를 박대하고, 게다가 무엄하게도 와타시의 광휘를 숭배하지 않겠다며 거부한 것은 이야기가 다른데스. 이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요, 똥닝겐이 범할 수 있는 가장 무거운 죄악인데스. 그래서 와타시가 지금 분노하는 것은, 그 똥노예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아닌데스. 와타시를 화나게 하는 것은...

 심호흡을 하는 친실장.

 -오마에들이, 감히! 똥노예들이 와타시에게 반기를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음에도!! 아직도 놈들을 쳐죽이지 않은 것인데샤아아아악!!!

 동굴을 쩌렁쩌렁 울리는 친실장의 고함. 장녀는 친실장의 분노에 눌려 오들오들 떨고 있다.

 -오마에들!! 한 번 변명해보는데스! 와타시는 오마에들이 단지 똥노예들을 쳐죽이러 가는 것을 내일로 미룬 것일 뿐이기를 바라는데스. 오마에들의 충성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게으름을 피운 것일 뿐이기를 바라는데스. 만일 그것이 아니라면, 오마에들의 충심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와타시는 더 이상 관대할 수가 없는데챠아!!

 화를 억누르며 쉬익쉬익대는 친실장. 친실장의 호흡이 가다듬어질 때 즈음, 백발의 노예가 고개를 들고는 친실장에게 대답한다.

 -송구하옵니다, 여신의 사자시여. 장녀님께서 수치를 당하셨다는 것은 저희도 지금 처음 알았습니다. 이 사실을 알았다면 저희도 합당한 대응을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이라면, 말이 아닌 행동으로 증명하는데스! 지금이라도 가서 똥노예들을 모조리 잡아 내 앞에 무릎을 꿇리고 독라달마로 만들어 사죄하게 만드는데샤!
 -하지만 여신의 사자시여, 그들은 이 숲에서 나간 자들이 아닙니다.
 -그건 또 무슨 운치같은 소리인데샤! 이 숲 밖에는 닝겐이 살지 않는데, 이 숲에서 나간 것이 아니면 그 똥노예들은 어디에서 온데스? 하늘에서 뚝 떨어진데스??
 -여신의 사자시여. 그들은 저희와 비슷하게 생겼고, 비슷하게 행동하지만 저희의 동족이 아닙니다. 그들은 ‘큰 키’들입니다. 저희의 먼 친척...정도라고는 할 수 있겠으나, 결코 저희의 동족은 아닙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데스?
 -그들은 이 숲에 사는 저희와는 다른 종족입니다. 그들은 황야를 떠돌며 짐승을 사냥해 먹고사는 떠돌이들입니다. 그들은 물과 사냥감을 찾아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생활하는데, 그러다가 이번에 저 바위산에 정착하게 된 것일 따름입니다. 지난 비오는 계절까지는 저 북쪽에서 살다가, 계절이 바뀌어 저 곳으로 이주해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저들은 닝겐이 아니라는 말인데스?
 -그렇습니다. 저희는 저들을 ‘큰 키’라고 부르지요. 저들이 저희보다 체격은 왜소하고 힘도 약하지만 대신 키는 더 크기에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마에의 말은.... 닝겐이 아닌 저런 똥분충들이 이 숲 바깥에도 많이 있고, 그들은 하나같이 와타시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런 말인데스?
 -그렇습니다. 그들은 숲에 살지 않기에 숲의 여신을 섬기지 않습니다. 대신 놈들에겐 각자 자기 부족만의 신이 따로 있지요.

 친실장의 얼굴이 꿈틀거린다. 얼굴이 흉하게 찡그러지며, 온 몸의 혈관이 부풀어 올라 투실투실 살진 지방층 위로도 보일 정도가 된다. 백발 노예는 그녀의 분노를 달래고자 계속 말을 이어나간다.

 -여신의 사자시여, 저희가 여신의 사자께 대한 충심에 소홀할 리가 있겠사옵니까? 만일 저희 부족원 중에 여신의 사자께 불충한 자가 있었다면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옵니다. 허나 저 바깥의 녀석들은 저희 부족원도 아닐 뿐더라 동족도 아닌 이들, 여신의 사자님을 모시기에 합당한 자들이 아니옵니다. 저 메마른 땅을 떠도는 비천한 이들일 뿐이옵니다.

 하지만 친실장의 분노는 가실 기미가 없다. 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히는 듯, 눈을 감고 잠시 심호흡을 하던 친실장은, 그럼에도 분노가 가득 담긴 목소리로 다시금 묻는다.

 -그러니까 오마에의 말은.... 이 숲 밖에도 닝겐들이 살고 있고, 그 닝겐들은 와타시를 섬기지 않는다는, 그 말인데스? 그리고 오마에타치는 그것을 알고도, 단지 오마에들과 동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저 방치해뒀다는 것인데스?
 -여신의 사자시여, 방치한 것이 아니옵니다. 그들은 애초에 저희와 무관한 자들이옵니다. 생긴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저희와 비슷할 뿐, 저 밖을 나다니는 네발달린 짐승들과 하등 다를 바가 없는 이들이옵니다. 저들이 여신의 사자님을 섬기지 않는 것은 결국 네발 짐승들이 사자님을 섬기지 않는 것과 다를 바가 없사옵니다. 여신의 사자께서 굳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니옵니다.

 여전히 눈을 감고 백발 노예의 말을 묵묵히 듣는 친실장. 지금까지 그녀에게, 이 숲은 세상의 전부였다. 숲의 밖은 아무 것도 없는 황무지. 네발 분충과 악마들만 들끓는 지옥, 따라서 친실장은 이 숲 밖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렇기에 장녀에게 똥노예들에 대해 들었을 때도, 이 숲에서 추방된 닝겐 분충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헌데, 그것이 아니라고? 이 숲 밖에 원래부터 다른 닝겐, 아니 닝겐 비슷한 무언가들이 살았다고? 게다가 그것들은 와타시를 섬기지 않는다고? 잠시 뒤, 친실장의 우레와 같은 노성이 동굴을 쩌렁쩌렁 울린다.

 -오오오오마아아아아아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

 저 작은 체구에서 어찌 이런 큰 목소리가 나오는 것일까. 그 때까지 묵묵히 있던 장로들까지도 모두 얼굴을 찡그리며 귀를 막는다. 친실장의 노성과 그녀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살기, 아니 귀기에 놀란 장녀는 결국 빵콘까지 해버린 채 얼굴을 바닥에 파묻고 오들오들 떤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데스? 와타시는 이 세상의 지고한 여신인데스. 이 세상 만물이 와타시를 숭배해 마땅한데스. 그것이 이 세상의 준엄한 질서인데스. 법칙인데스! 그것들이 오마에타치의 동족인지 아닌지는 상관 없는데스. 그건 오마에타치의 사정인데슷! 이 세상의 삼라만상에게 선택지는 두 개 뿐인데스. 와타시를 섬기거나, 솎아내져 죽거나! 이 세상 전부에게 흠숭받는 것, 그것이 와타시의 천부적인 의무인데샤아앗!! 그것은 와타시를 섬길 특권을 받은 오마에들도 마찬가지인데스. 저 숲 밖에 와타시를 섬기지 않는 닝겐 분충이 있으면, 오마에들은 그것들을 설득하든 회유하든 협박하든 어떻게든 그 닝겐들도 와타시를 섬기게 만들었어야 하는데스, 끝까지 거부하는 똥닝겐은 오마에들이 솎아내어 이 세상에서 뿌리 뽑아야만 하는뎃스! 헌데 오마에들은 자신들에게 부여된 신성한 의무를 등진데샤! 심지어 저 숲 밖의 닝겐 분충들에 대해서 숨긴데챠아앗!!
 -숨긴 것이 아니옵니다! 애초부터 그들은 여신의 사자님과는 관계가 없는-
 -닥 치 는 데 샤!!! 이것은 역사에 길이 남을 불충인데스! 오마에들 전부의 목숨으로도 갚지 못할 지고의 대죄인데스! 감히 와타시를 속인데스? 이 세상 전부를 와타시의 발아래 복속시켜야 할 오마에들의 임무는 팽개치고, 와타시가 베푸는 은총만을 오마에들끼리 독점하려고 한데스? 어떻게 감히이이이이.....
 -고정하시옵소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친실장. 온 몸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모습은 그야말로 분노의 화신과도 같다. 친실장은 한숨을 깊게 내쉰다.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이들 전부를 독라달마로 만들어 살지도 죽지도 못한 채 숨만 붙어 영원히 고통받게 만들어주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어쨌든 그녀에게는, 저 숲 밖의 분충들을 그녀의 합당한 노예로 만들어야 숭고한 의무가 있으니까.

 -오마에들, 잘 듣는데스. 이 죄를 갚을 길은 하나뿐인데스.
 -말씀하십시오. 듣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저 숲 밖의 똥분충들을 전부 잡아와서 내 앞에 대령하는데스. 똥노예들이 와타시에게 합당한 경배를 바치게하는데스. 거부하는 닝겐 분충들은 전부 솎아내 죽이는데스! 오마에들이 진작에 했어야 하는 당연한 의무였던데스가.... 한 번 더 기회를 주는데스. 무엇하는데스! 당장 하는데스!!
 -....저들을 치라는 말씀이시옵니까?
 -물론인데샤앗!
 -여신의 사자시여, 전쟁은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옵니다. 저들이 비록 저희보다 수는 적어도, 황야를 떠돌며 사냥을 하는 강인한 자들이옵니다. 철저히 준비해서 치지 않으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사옵니다. 이기더라도 저희 부족의 피해가 더 클 수도 있사옵니다!
 -지금 와타시의 명을 거역하는데스? 지고의 여신인 와타시의 가호를 불신하는데스? 와타시가 굽어살피는데 감히 패배를 걱정하는데스?
 -제발, 재고하여 주시옵소서! 시간을 주신다면 저희가 저들을 잘 설득해 보겠사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옵소서!

 어느덧 분노를 가라앉히고 냉정한 얼굴로 장로들을 바라보는 친실장. 그녀는 차가운 얼굴로 선뜻 대답한다.

 -좋은데스. 알겠는데스.
 -가, 감사드리옵니다.
 -감사할 필요 없는데스. 오마에들은 와타시의 은총을 누릴 자격이 없는데스. 와타시의 축복을 거두는데스.
 -여신의 사자시여, 그 무슨....
 -와타시는 더 이상 숲을 돌보지 않는데스. 숲에 저주를 내리는데스! 이 숲은 시들어 죽고 저 샘은 말라버릴 것인데스! 오마에들이 와타시의 은혜를 잊는다면, 와타시에게도 계속해서 은혜를 베풀 의리는 없는데스. 모두 그만두는데스. 오마에들의 신성한 의무를 하지 않아도 좋은데스. 대신 와타시도 와타시에게 맡겨진 직무를 그만두는데스. 알아서들 하는데스.
 -아, 아니되옵니다! 여신의 사자시여, 이 숲은 저희 부족의 터전이옵니다!
 -그렇다면 합당한 대가를 바치는테챠아!
 -여신을 위한 축제를 열겠습니다! 여신을 기리기 위해 가장 좋은 소출을 골라 제물을 바치겠습니다! 이 숲을 버리지는 말아주시옵소서!
 -아니, 필요 없는데스. 와타시가 받을 제물은 오직 하나, 저 숲 밖의 똥노예들 뿐인데스. 저들을 복종시키거나, 모두 죽이거나. 다른 선택은 없는데스. 이것은 최후 통첩인데스.

 술렁술렁 웅성웅성 자기들끼리 논의하는 장로들. 하지만 친실장의 분노는 하늘을 덮었고, 친실장의 의지는 굳건한 바위와도 같았다. 논의는 무의미. 선택지는 둘 뿐이었다. 숲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느냐, 이 숲을 잃고 새 삶의 터전을 찾아보느냐.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였다.

 -여신의 사자시여.

 잠시간의 논의 끝에, 백발의 노예가 답을 내었다.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8

 -테프프프프프픗....

 장녀는 기분 좋게 웃는다. 역시 마마는 세상의 중심, 지존한 여신이었다. 여신의 호령 아래 닝겐 노예들은 복종했고, 장녀에게 수치를 입힌 똥노예들을 솎아내기 위한 전쟁이 선포되었다. 친실장은 즉시 출정할 것을 명했으나, 더욱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장로들의 호소에는 친실장도 수긍하여 이틀 뒤, 한밤중에 바위산을 급습하는 것으로 결론지어졌다. 나무창을 만들고, 작전을 세우는 노예들의 모습을 가마 위에서 내려다보며 장녀는 다시 한 번 흡족한 미소를 짓는다. 정말로 있을 수 없는 굴욕을 겪었다. 지금도 떠올리기만 하면 부들부들 떨리는, 기억에서 지우고 싶은 실장생의 오점이었다. 이를 되갚아주지 않으면 운치도 나오지 않고 잠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역시 마마는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이제 이틀 뒤면, 천인공노할 대역죄를 지은 똥노예들을 솎으러 충직한 노예의 대군이 출정할 것이다.
 숲 이편저편에서 부지런히 전쟁 준비를 하는 노예들. 숲을 가득 메운 노예들의 무리를 보며 장녀는 의기양양하다. 와타치타치에게 닝겐 노예가 많다는 것은 전부터 알았으나, 이렇게 많은 노예들을 한 눈에 보기는 처음이었다. 많다. 정말로 많다. 이 대군이라면, 틀림없이 이 세상의 끝까지 나아가 모든 네발 분충들을 솎아내고 모든 똥닝겐들을 와타치타치 앞에 무릎 꿇릴 것이다. 지금도 충분히 세레브하지만, 와타치타치는 더욱 세레브해질 것이다! 지금도 세레브한데 이보다 더 세레브하다면 대체 어느 정도일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빵콘할 뻔한 장녀는 자신이 가마 위에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는 간신히 빵콘을 참는다.
 대신 장녀는 다른 방향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와타치에게 굴욕을 안긴 그 똥닝겐, 그 똥닝겐에게 이 수치를 어떻게 갚아줄까. 장녀의 눈앞에는 이미 며칠 뒤의 장면이 생생이 펼쳐진다. 피떡이 된 똥닝겐이 질질 끌려 들어온다. 감히 장녀를 쳐다보지도 못하고 벌벌 떨며 바닥에 엎드려 용서를 비는 똥닝겐. 목숨만을 살려달라는 똥닝겐에게 다가가 얼굴에 운치를 바른다. 그리고는 독라달마로 만들어주자. 절대, 절대로 곱게 죽여서는 안 된다. 매일 와타치타치의 운치만 먹인다. 똥닝겐 스스로의 운치도 도로 먹게 만든다. 똥닝겐이 울부짖으며 차라리 죽여달라 외치지만, 편한 죽음이라는 자비도 똥닝겐에게는 사치다. 그리고 놈이 몸에 걸치고 있던 세레브한 털가죽을 빼앗아, 놈이 보는 앞에서 깔고 앉아줘야지. 장녀는 한 번 느껴보았던, 똥닝겐에겐 과분한 그 털가죽의 촉각을 떠올리며 행복에 젖는다. 폭신폭신하고 보드라웠던 촉감. 빨려들어갈 것 같은 검은색에 윤기가 흐르는 빛깔. 그야말로 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모든 털가죽의 정점과도 같았던 보물. 말 그대로 세계 최고의.....잠깐, 세계 최고? 장녀는 뭔가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행복한 망상에서 빠져나온다.

 -테...똥노예를 솎아내면...그 세레브한 털가죽은 어떻게 되는테치?

 친실장은 숲의 은총을 자들에게 베푸는 데에 아낌이 없었다. 특히나 친실장이 가장 아끼던 장녀에게는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최고의 것들은 언제나 친실장의 것이었다. 꼬기를 먹을 때에도 가장 좋은 부위는 친실장의 것이었다. 가장 따스하고 폭신한 잠자리도 친실장의 것이었다. 옷도, 장신구들도, 가마도, 언제나 친실장의 것이 가장 아름답고 화려했다. 그렇다면 그 세레브한 털가죽, 얼핏 보아도 지금 친실장의 잠자리에 깔린 털가죽보다 압도적으로 아름답고 폭신한 그 검은 털가죽도 친실장의 것이 되리라.

 -테, 아닌테치. 마마의 것을 탐내면 분충인테치! 마마가 가장 좋은 몫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테치. 그런테치. 그렇게 생각해야하는테체.....

 ‘마마의 것을 탐내면 분충이다’라던 친실장의 말을 떠올리며 아쉬움을 애써 달래보는 장녀. 하지만 눈앞에는 그 털가죽의 은은한 윤기가 아른거렸다. 장녀의 피부에는 아직도 그 폭신하고 따스하던 감촉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것은....그것은 장녀의 것이었다.

 -하,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것은 와타치가 가지는 것이 맞는테치! 애초부터 와타치의 것이었는테치! 게다가 수치와 모욕을 겪은 것은 와타치인테치. 그 털가죽은 와타치가 겪은 수모에 대한 보상인테치! 그러니 와타치가 가지는 것이 맞는테치. 애초에 마마는 숲 밖에 똥닝겐들이 사는 것도 몰랐던테치. 그것을 알려준 것도 와타치인테치. 그러니 와타치의 공이 가장 큰테치. 그런테치. 그런테치!

 어쩌면 마마에게 잘 말하면 털가죽 정도는 그녀에게 양보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마마도 와타치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원하는 물건 하나 정도는 하사해주지 않을까?

 -그럴 리가 없는테치....

 희망으로 머릿속을 부풀리던 장녀는, 곧 체념하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좋게 망상해보려 해도, 마마가 가장 좋은 물건을 그녀에게 양보하는 장면은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가장 좋은 것은 마마의 것. 친절하고 자애에 넘치는 친실장이었지만, 이것에 대해서만큼은 단호했다. 장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떨어진다.

 -너무한테치. 왜인테치? 왜 와타치는 가장 좋은 것은 하나도 손에 넣을 수 없는테치? 본래 와타치의 것인데, 마마의 것보다 좋다는 이유로 왜 빼앗겨야하는테치? 모순인테치. 부조리인테치! 이럴 수는 없는테치....

 ‘마마의 것을 탐내는 자는 분충이다’라는 생각으로 꾹꾹 억눌러 왔던 마음 속 깊은 곳의 욕망들이 응축되어, 장녀의 눈앞에 생생한 털가죽의 형상을 만든다. 이것은 와타치의 것이다. 와타치의 것이어야만 한다. 이것을 와타치의 것으로 만드는 방법은 없을까? 이리저리 골똘히 머리를 굴려보는 장녀.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어떻게든 마마보다 먼저 털가죽을 손에 넣는 것이다. 아무리 마마라지만, 와타치가 먼저 차지하고 운치를 발라 놓으면 그것까지 빼앗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에 멋모르고 마마보다 먼저 꼬기의 가장 좋은 부위를 먹어버렸을 때에도, 마마에게 혼이 나기는 했지만 먹은 것을 도로 토해내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무슨 수를 써서든 마마보다 먼저 손에 넣기만 한다면....하지만 어떻게? 순간, 어젯밤 마마의 모습이 머릿속을 스친다. 마마가 똥노예들을 솎아내도록 명했을 때, 노예 닝겐들은 감히 마마에게 거역하려고 했다. 그 때 마마가 어떻게 했더라. 시키는대로 하지 않으면 숲도 닝겐들도 다 죽게 될 것이라고 호령했었다. 그러자 노예 닝겐들이 따랐다. 그렇다. 어리석고 나약한 닝겐들을 부리는 데에는 협박과 으름장이 최선인 것이다.

 -그, 그런테치! 노예 닝겐들이 똥노예들에게 쳐들어가서 털가죽을 빼앗아오면 늦는테치. 그러면 털가죽은 와타치가 아닌 마마에게 갈 것인테치. 그러니 그 전에 와타치가 먼저 가서 털가죽을 받는테치. 똥노예들에게 스스로 바치게하면 되는테치! 똥노예가 이전에 와타치에게 함부로 한 것은, 와타치타치의 무서움을 몰라서였던테치. 와타치타치의 노예 군단의 무서움을 알려주면 벌벌 떨게 될 것인테치. 그 때 와타치에게 털가죽을 바치게하면 되는테치! 와타치가 먼저 가서, 털가죽을 바치면 마마에게 잘 말해 독라가 되는 정도로 봐주겠다고 하는테치.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하면 스스로 와타치에게 바칠 것인테치! 그런테치. 그런테치.

 스스로가 생각해낸 아이디어에 스스로 감탄하는 장녀. 그러나 감탄하느라 허비할 시간이 없다. 노예 군대가 움직이고나면 늦다. 마마가 털가죽을 차지하기 전에 먼저 도착하려면, 서둘러야한다. 장녀가 눈을 들어보니, 운 좋게도 장녀의 가마는 전에 길을 잃었던 곳에 거의 다다랐다. 남은 것은 이 전담 노예의 눈을 피해 똥노예들의 동굴까지 가는 것 뿐. 기억에 남는 풍경에 도달하자마자 장녀는 전담 노예를 불러세운다.

 -오마에, 가마를 멈추는테치! 와타치가 볼일이 있는테치.
 -무슨 일이십니까?
 -우...운치를 누어야하는테치. 어서 와타치를 가마에서 내리는테치!
 -알겠습니다. 하지만 길에서 벗어나셔선 안 됩니다.

 노예가 가마를 내려주자마자 숲으로 달려가는 장녀. 그러자 전담 노예가 손으로 길을 막는다.

 -길을 벗어나셔서는 안 됩니다.
 -무, 무슨 말인테샤! 그럼 훤히 보이는 길 한가운데에서 운치를 누란 말인테치? 이 숙녀에게 그런 치욕을 당하라는 것인테치?
 -여신의 사자께서 장녀님께는 한시도 눈을 떼지 말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오마에, 웃기지 마는테샤아앗!! 마마의 뜻은 아는테치. 하지만 오마에는 감히 요조숙녀의 운치 장면을 훔쳐보겠다는 것인테치? 변태 닝겐이었던테치? 꼴에 마라 닝겐이라고 와타치의 미모에 발정하는테치?

 벙찐 표정으로 장녀를 바라보는 닝겐. 하지만 곧 한숨을 내쉬고는 비켜선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꼭 볼일만 보시고 바로 돌아오셔야 합니다.
 -당연한테치. 운치가 나오려고 하니 빨리 눈을 가리고 뒤로 돌아서는테치! 급한테치!

 고분고분 뒤로 돌아서는 전담 노예. 장녀는 자연스레 덤불 안으로 들어가서, 운치를 눌 때처럼 힘주는 소리를 몇 번 내고는, 덤불 틈을 지나 깊은 숲 속으로 달려간다. 정확한 길은 몰라도, 방향은 알고 있다. 서둘러야 한다. 잠시 뒤 장녀를 부르는 노예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지만, 장녀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숲의 너머 저편에서 장녀를 기다리는 세레브한 털가죽을 향해 토테토테 달려간다.


#9

 오늘의 추적은 성공적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해가 동쪽에 있는 동안 주변을 가볍게 살피는 정도였음에도, 사냥꾼들은 물소 두 무리, 말 한 무리, 가젤 한 무리의 흔적을 발견하고 그들을 추적해 모습을 확인하는데 성공했다. 이제 부족으로 돌아가 사냥 계획을 짜고 내일부터는 사냥에 나설 수 있을 것이다. 사자 무리의 흔적도 보였던 것이 마음에 조금 걸리지만, 사자는 강인하기는 해도 부지런한 짐승은 아니다. 놈들은 주로 밤이나 새벽녘에 사냥하며, 낮에는 보통 새끼들이 있는 보금자리 근처에서 늘어지게 잠을 잔다. 심지어 배가 부르면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으며, 이런 때에는 사냥꾼들이 사자 무리 근처를 지나가도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그러니 놈들의 활동하는 시간만 피하면, 사자들과 사냥감을 두고 신경전을 벌일 일은 좀처럼 없다.

 “일단 내일부터는 물소 먼저 잡죠. 무리가 꽤 커 보이던데. 고기도 많이 얻고, 가죽도 좀 더 확보해 둡시다.”
 “그래, 그러자고. 보니까 아주 물가에 자리를 잡은 것 같던데. 벌써 새끼들 데리고 있는 암놈들도 꽤 보였어.”
 “몰이는 역시 북쪽 작은 바위산 쪽으로 모는 걸로?”
 “그래도 되고. 반대로 우리 바위산 쪽으로 몰아와도 될 것 같던데? 거리는 꽤 되지만, 부족원들이 호응해줄 수 있으니까 더 확실하지.”

 사냥꾼들은 벌써 내일부터의 사냥 계획을 그리며 보금자리로의 발걸음을 재촉한다. 올해 우기에 예년보다 비가 많이 왔기 때문인지, 지난해보다 물도 풍부하고 사냥감도 많았다. 사냥꾼들을 따라 걷던 ‘검은 바람’ 녀석도 연신 헥헥거리며 꼬리를 흔든다. 오늘 사냥감 추적에는 녀석의 공로가 컸다. 부족에게 길들여진 이리들은 사냥감이 보이지도 않는 거리에서부터 사냥감들의 냄새를 맡고 사냥꾼들을 안내한다. 여간 기특한 녀석들이 아닐 수 없다.

 “컹”

 그 때, ‘검은 바람’이 낮은 소리로 작게 짖더니,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킁킁거리기 시작한다. 녀석이 새로운 냄새를 감지했을 때의 반응. 그렇게 한참 킁킁거리던 녀석은,

 “컹!”

하고 한 번 더 작게 짖더니, 부족의 거처인 바위산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한다. 바위산 쪽에 무슨 일이라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냥꾼들은 손에 들고 있던 나무창과 투석구 따위를 고쳐잡고는 재빠르게 ‘검은 바람’을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수십 년간 부족이 거처로 사용했던 바위산이기에, 겁 없이 인간의 영역에 침범하는 짐승은 이 근방엔 없다. 하지만, 자연은 종종 ‘검은 죽음’처럼 상정 외의 괴물을 낳기도 하는 것이다. 잔뜩 긴장하고 바위산을 향해 달려가는 사냥꾼들. 잠시 뒤, 그런 사냥꾼들의 귀에 사냥감을 위협하는 ‘검은 바람’의 울음소리와 함께, 그다지 듣고 싶지 않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컹! 컹! 으르르르르....”
 “테차아아앗!! 테치, 테치, 텟샤-!!”

 ‘곰을 꿰뚫는 자’는 발걸음을 느리게 하며 이마를 짚었다. 또 이 놈이냐. 연분홍빛에 적록의 두 눈, 언청이처럼 벌어진 입, 사람의 옷처럼 생긴 녹색의 털. 숲의 여신인지 뭔지라던 그 놈이다. 그 놈은 바로 어제 처음 놈을 보았을 때처럼, 바위틈에 몸을 밀어넣고는 ‘검은 바람’을 향해 뭐라뭐라 짖고 있다. 불과 어제 부족의 대표단이 데리고 가 ‘작은 턱’들에게 돌려주었을텐데, 이놈은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아, 잠깐, 다른 놈인가? 그는 어젯밤 대장로에게 들었던 말들을 떠올린다. 그래, 분명 이것보다 큰 놈이 하나, 그리고 이렇게 작은 놈들이 여럿 있었다고 했지. 어제의 그 놈과는 다른 놈일 수도 있다. 사냥꾼 무리와 함께 있던 ‘통역꾼’이 앞으로 나와 놈에게 말을 건넸다.

 “데스, 데스데스, 데-스우.”
 “텟샤아아아앗! 테치, 테치테치.”
 “데스? 데스데스우?”
 “텟챠! 테치, 텟테치. 텟튠, 테치치.”
 “데즈아! 데뎃, 데-스데스.”
 “테치, 테텟치테치. 치프프프프프프....”

 사냥꾼들 중에는 어젯일을 보지 못한 이들도 많았기에, 다들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 장면을 지켜본다. 작은 짐승이 사람 비슷하게 행동한다는 것도 신기하고, ‘작은 턱’들의 언어이긴 해도 어쨌든 ‘말’이라는 걸 한다는 점도 신기하고.....그런 호기심과 신기함이 섞인 반응들이 오가지만, 어제 충분히 보았던 ‘곰을 꿰뚫는 자’에게는 그저 골칫거리일 뿐이다.

 “뭐래냐? 어제 그 놈이냐, 아니면 다른 놈이냐?”
 “어제 그 놈 맞다는데요? 또 길이라도 잃었냐고 물어보니까 그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찾아온 거랍니다.”
 “아니, 내가 숲 밖으로 기웃거리지 말라고 한 게 바로 어제 같은데....뭔 볼일이 있어서 나왔다냐?”
 “그게....뭐 해줄 말이 있어서랍니다.”
 “엥? 해줄 말이 있다니, 뭔데?”
 “그건 아직 못 들었습니다. 지금 배고프니 먹을 것부터 달라고 자꾸 그래서...”

 ‘곰을 꿰뚫는 자’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챙겨왔던 말린 고기 몇 조각을 던져준다. 저 짐승은 어딘가 불쾌해서 다시는 엮이고 싶지 않았는데, 무슨 악연이 있어 이젠 자기 발로 찾아오기까지 한단 말인가? 사실 따지고 보면 그냥 작은 짐승이다. 겉보기 모습은 작달막하고 동글동글한 게 귀엽다고 할 만한 구석도 많다. 어제는 다짜고짜 잠자리를 준비하라느니 먹을 것을 달라느니 심지어 그의 자존심과도 같은 ‘검은 죽음’의 가죽옷을 내놓으라느니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소 과민반응한 면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철없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새끼가 자기 잘난 줄 아는 것은 그리 드문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냥꾼으로서 날카롭게 다듬어온 그의 감각은 이 작은 짐승에게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함을 느끼게 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이 짐승과는 엮이지 않는 것이 좋다고, 불행을 몰고 다니는 짐승이라고 그의 본능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쓸데없는 소리면 가만 안 둔다고 전해.”
 “뭐 자기 입으로는 중요한 일이라고 하는데요... 한 번 들어볼게요. 데스, 데스데스. 데스우-.”
 “텟츙~♡ 테치테치, 테치치. 테치, 테치잇! 테에, 텟틀~”
 “데즈아? 데스데스, 데스?”
 “텟챠아-! 테치테치테치! 테테치! 치프프프프프....”

 대화를 나누면서 중간중간 ‘곰을 꿰뚫는 자’를 바라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짓는 짐승과, 그에 따라 실시간으로 기묘한 표정이 되어가는 ‘통역꾼’.

 “지금 짐승이 ‘작은 턱’들 말로 ‘통역꾼’이랑 대화하고 있는 거 맞죠? 말하는 짐승은 생전 처음보네요... 허, 참!”
 “저 놈 저거, 웃기도 하는 꼴이 사람하고 똑같구만?”
 “뭔 말인데 그래?”

 호기심에 한마디씩 거들며 ‘통역꾼’ 주위로 몰려드는 사냥꾼 무리에게 ‘통역꾼’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러면 그럴수록 사냥꾼들의 궁금증도 증폭된다.

 “아, 저기, 그게.....”
 “아,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봐.”
 “어...그러니까, 이놈이 형님 가죽옷이 앵간히 마음에 들었나 봐요.”
 “뭐야. 할 말이 뭔가 했더니, 설마 또 가죽옷 자기한테 달래?”
 “네, 어, 그러니까 그게... 가죽옷을 주면 목숨은 살려준답니다.”
 “...뭐? 목숨이 어쨌다고?”
 “자기가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그렇게 말하네요.”

 너무도 황당한 소리에 어처구니를 잃어 서로를 바라보는 사냥꾼들. 하지만 잠시 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터져 나온 폭소가 사냥꾼들 사이를 옮아간다.

 “목숨을 살려준다고? 아이고 크큭크크크....”
 “어휴 무서워라 이거 오줌지리겠구만, 푸, 푸풉!”
 “푸히히힛... 아이고! 우리가 아-주 무서운 맹수를 만나부렀어! 다 죽게 생겼어! 하하하!”

 모두가 자기를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팔짝팔짝 날뛰며 뭐라뭐라 짖어대는 작은 짐승. 모두가 웃느라 눈물까지 흘려대고, ‘통역꾼’조차 웃음을 참느라 입을 막은 채 끅끅거리고 있는 가운데 ‘곰을 꿰뚫는 자’만이 냉정하게 놈을 바라보고 있다. 뭔가, 뭔가 불길하다.

 “어이, ‘통역꾼’, 그만 웃고 좀 더 자세히 물어봐. 가죽옷을 주지 않으면 우릴 죽이겠다는 거냐고.”
 “텟샤!! 테치! 테프프...”
 “그렇다는데요? 우리 부족 전부 죽을거랍니다.”
 “....우릴 어떻게 죽일거냐고 물어봐.”
 “치프프프프.... 테치, 테-엣치. 테치치테치잇. 테헤이, 테치!”
 “어, 그게, 곧 자기 엄마랑 노예 군대가 우릴 다 죽이러 올 거랍니다. 그런데 자기한테 그 가죽을 바치면 자기가 잘 말해서 목숨은 건지게 해줄 수 있다고.”

 ‘통역꾼’이 짐승의 말을 옮기자, 간신히 웃기를 멈춘 사냥꾼들이 다시 발작하듯이 폭소를 터트리고 만다.

 “노예 군대래 크크크큭큭끅.... 노예 군대....아이고 나 죽네.”
 “저 한 뼘도 안 되는 놈 노예면 지렁이 떼 정도는 되는거냐? 아이고 무서워 키키키킥....”
 “형님! 저 놈 말대로 우리 다 죽겠는데요? 웃다가! 푸하하하하하!”
 “야, 안 그래도 웃느라 죽겠는데 더 웃기지 마, 푸흡!”

 하지만 이번에도 ‘곰을 꿰뚫는 자’는 웃지 않는다.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친다.

 “야, ‘통역꾼’. 저 놈이 말하는 ‘노예’라는게.... 저 숲의 ‘작은 턱’들을 말하는 것 같은데.”
 “어....그러려나요? 하긴 숲 속 놈들이 얘들을 여신인지 뭔지로 모신다고 했었죠.”
 “....그 놈 챙겨. 빨리 돌아가자.”

 ‘곰을 꿰뚫는 자’는 허리를 펴고, 저편에 펼쳐진 숲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을씨년스러워 보이는 것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듯 바람에 흔들거렸다.

 “여기서부터는 장로님들이 들으셔야 할 것 같으니까.”


#10

 친실장은 가마에 올라 자기 앞에 줄지어 선 노예들의 군대를 바라보았다. 이 군대라면 분명 이 세상을 끝까지 정복하고 모든 닝겐을 그녀 앞에 무릎 꿇리기에 손색이 없으리라. 저 바위산의 똥닝겐들이 이 성전의 첫 번째이다.

 -이 중요한 순간에 장녀는 또 어디로 간 데스우....

 어제부터 장녀가 또 보이지 않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군대가 출정하고 난 뒤에 남아서 숲을 지키는 일을 맡은 노예들에게 돌아올 때까지 장녀를 찾아 놓으라고 엄명을 내려놓았지만, 아직 어린 자이니 걱정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신신당부해 두었으니 또 숲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겠지.... 친실장은 고개를 흔들어 불길한 생각들을 떨쳐낸다. 괜찮을 것이다. 호기심이 많은 장녀의 성격상, 전쟁 준비를 하는 노예들을 구경하며 다니다가 잠깐 길을 잃은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장녀 하나 때문에 이 거룩한 원정을 늦출 수도 없는 노릇. 가슴 아프지만 이 숲의 여신으로서 공과 사는 구분해야한다. 마음을 굳게 다잡은 친실장은 다시 한 번 그녀의 노예 군대를 훑어본다. 마지막으로 준비 상태를 점검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는 노예들의 모습은 다시 보아도 듬직하고 뿌듯했다. 이제 곧 해가 지고 어둠이 드리우는 밤이 찾아오면, 똥닝겐들이 잠에 빠져 있을 때를 노려 야습을 감행할 것이다.

 -여신의 사자시여, 정말로 함께 가시겠습니까?

 백발의 노예가 어느새 곁으로 다가와 다시금 묻는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는데스. 와타시도 갈 것인데스.
 -하지만 전쟁터는 위험합니다. 아무리 저희가 잘 지켜드린다고 해도, 만에 하나라는 것이 있사옵니다.
 -오마에는 지금 와타시의 권능을 의심하는데스? 저 똥닝겐들이 감히 숲의 여신인 와타시에게 상처 하나라도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스? 와타시를 걱정하는 그 마음은 갸륵한데스가.... 쓸데없는 걱정인데샤! 와타시는 가야만하는데스. 와타시의 거룩한 권위에 반항한 똥분충들이 솎아내지는 장면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아야하는데스! 놈들의 더러운 보금자리를 내 두 발로 짓밟아주어야하는데스! 그것이 이 세상이 와타시에게 부여한, 와타시의 거룩한 임무인데스.
 -....알겠사옵니다.
 -오마에는 그것보다 어서 장녀를 찾는데스. 와타시가 정벌을 마치고 개선식을 할 때에는 반드시 장녀도 나와서 와타시를 맞이해야 하는데샤아아앗!!!

 전사들 사이에는 침묵과 함께 긴장이 흐른다. 그들은 본래 이 숲에서 평화롭게 살아온 부족. 아주 가끔 이 숲을 노리고 쳐들어온 떠돌이 집단을 싸워 쫓아낸 적은 있어도, 이런 제대로 된 전쟁은 수행하는 것은 처음이다. 이들에게 전쟁이란 조상들로부터 전해들은 지식들을 통해 막연하게 배운 무언가일 뿐. 하지만 승리를 의심하는 이들은 없다. 비록 놈들이 노련한 사냥꾼이라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큰 키’들은 키만 클 뿐 체격도 왜소하고 근력도 그들보다 부족하다. 머릿수도 그들보다 우리가 더 많고, 무엇보다 한밤중에 기습하는 것이다. 아무리 노련한 사냥꾼이라도, 해가 뜬 동안 힘들게 사냥하고 지쳐 잠자리에 들었을 때 기습해오는 데에는 속수무책일 것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가마 위에서 꾸벅꾸벅 졸던 친실장은 가마가 움직이는 느낌에 화들짝 깨어난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방은 칠흙같은 어둠. 희끄무레한 달빛이 비추어 친실장의 주위만이 간신히 보일 뿐이다. 어둠 속에서 전사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놈들도 보초는 설 것이니, 은밀히 움직이지 않으면 기습은 실패다. 조용히, 은밀히. 하지만 신속하게 움직인다. 다행히도 숲을 빠져나가기 전까지는 숲이 그들을 가려줄 것이고, 숲을 빠져나가고 나면 바위산까지는 멀지 않다. 이미 선발대가 다다가 바위산 기슭에 몸을 숨긴 상태. 그저 신속하게 움직여 놈들을 덮치는 것만이 남았다.
 신속하고 빠르게 움직여 바위산을 오른다. 놈들에게서 기습을 눈치 챈 기척은 없다. 동굴 앞에 피워진 모닥불만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그 앞에서 불을 쬐는 보초들은 졸고 있는 것인지 움직일 기색이 없다. 완벽한 기습 타이밍. 신속하게 보초들을 죽이고 나면, 동굴 안에서 잠에 빠져 있을 나머지 ‘큰 키’들은 구덩이에 빠진 사냥감과 다를 바가 없다. 굳이 동굴 안으로 들어갈 필요도 없이, 동굴을 틀어막고는 나오려는 놈들만 죽이면 될 뿐.
 녀석들의 거처를 완전히 둘러싸고, 선발대에 신호를 보낸다. 선발대의 날랜 전사들이 순식간에 뛰어들어 보초들을 등 뒤에서 나무창으로 찌른다. 가죽이 뚫리는 소리와 함께 보초들이 힘없이 쓰러진다. 너무도 손쉽게 보초들을 해치웠다. 본대는 포위를 좁혀간다. 너무도 쉽다. 이상하다. 이상하게 쉽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선발대원 하나가 쓰러진 보초의 시신을 뒤집어본다. 시신이...아니다. 나무로 뼈대를 만들고 거기에 가죽옷을 입혀 꾸며놓은 가짜.

 -함정이다!

 그렇다. 동굴 안에서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뭐지? 어떻게 된 것이지? 혼란스러움을 느낄 찰나,

 휘리릭
 빡!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전사 하나가 어디선가 날아온 큼지막한 돌멩이 하나를 머리에 맞고 쓰러진다. 그것이 신호탄이었는지, 산 위쪽에서 돌멩이의 세례가 쏟아진다. 고개를 들어보니 바위산의 저 위쪽 봉우리에서, 달빛을 등지고 ‘큰 키’들의 형상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낸다.

 -응전해라! 돌을 던져!

 그들의 투석꾼들도 신속하게 허리춤에서 돌멩이를 꺼내어 던진다. 닿지 않는다. 그렇잖아도 놈들은 높은 곳에 있고, 우리는 낮은 곳에 있다. 원거리에서의 투석전은 녀석들이 유리하다. 게다가 놈들이 있는 곳은 이상하게 멀다. 아무리 높은 곳에 있다고는 해도 돌멩이가 닿을 거리가 아니다. 눈이 좋은 정찰병은 놈들이 돌멩이를 손으로 던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 기다란 줄 같은 것을 하나씩 손에 든 ‘큰 키’들은 천천히 손에 든 줄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하더니- 무엇을 어떻게 한 것인지, 놈들의 손에서 무시무시한 속도로 돌멩이가 날아든다.
 본대가 혼란스러워진다. 곧 지휘관이 정신을 차리고는 상황을 파악한다. 야습을 어떻게 눈치 챘을까. 놈들은 우리의 생각보다 신중한 녀석들이었던 모양이다. 숲 쪽에 초병이 있었겠지. 우리가 숲을 벗어나고 얼마 안 되어 바로 우리를 발견했다면, 이 정도 대응을 할 시간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상정 내이다. 갑작스레 날아든 돌멩이에 놀라긴 했지만, 산 위에 자리 잡은 녀석들의 숫자는 많아 보이지 않는다. 물론 봉우리로 올라가는 길에 놈들이 매복해있긴 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수가 더 많고, 봉우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있다. 놈들에게 도망갈 곳은 없으니 포위망을 좁혀나가면 제압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놈들은 수가 적다! 당황하지 마라. 가죽옷을 벗어 팔에 두르고, 머리 위로 들어 머리를 보호해라! 서서히 포위하며 올라간다! 놈들의 매복이 있을 것이다. 경계하면서 올라간다! 놈들이 돌을 던지면 그 쪽의 전사들은 웅크려서 피해라. 그 사이에 다른 방향의 전사들은 빠르게 올라가라! 놈들은 수가 적으니 모든 방향으로 돌을 던지지는 못할 것이다. 사각을 이용해라. 어서!

 지휘에 따라 전사들이 신속하게 움직여간다. 또다시 전사 몇몇이 돌에 맞아 쓰러진다. 하지만 치명상을 입은 전사는 많지 않다. 놈들이 다음 투석을 준비하는 동안, 우리의 전사들은 이미 재빠르게 바위산을 오르고 있다. 길도 없는 바위투성이의 산이지만 우리의 강인한 전사들을 막을 수는 없다. 순식간에 좁혀지는 놈들과의 거리에 전사들의 사기가 오른다. 본대의 가운데에서 지켜보고 있는 친실장도 신나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

 -데프프프프픗.... 모두 잡아오는데스! 독라로 만드는데스! 반항하면 죽여도 좋은데스가.... 잘 생긴 놈은 살려서 잡아오는데스! 총구노예로 써주는뎃스-웅~

 우르르르르

 그 때, 무시무시한 소리와 함께 산이 울린다. 뭐지? 각기 나무창을 고쳐 잡고 경계하는 전사들의 위로,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물 하나 없는 이 바위산에 무슨 폭포란 말인가? 그 폭포는 물이 아니라...돌더미로 이루어져 있다.

 -놈들이 돌을 굴려 내리고 있습니다!
 -후퇴! 후퇴하라!
 -도와줘! 이쪽에 완전히 깔렸다!

 한 쪽, 또 한 쪽. 놈들이 위치한 봉우리 위에서 계속해서 바윗덩이들이 쏟아져 내린다. 선두에 있던 전사들은 완전히 파묻혀 비명조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뒤에 있던 전사들도 속수무책. 그나마 후위에 있던 전사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간신히 도망쳐 내려오고 있다.

 -뭐하는데스! 똥노예들, 도망치지 마는데샤!! 놈들은 한 줌도 안 되는데스! 진격하는데스! 도망치는 놈은 독라형인데스!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친실장의 옆에서, 지휘관은 손톱을 깨물었다. 잘못 생각했다. 놈들이 아무리 빨리 자신들을 발견했다고 해도, 그 사이에 저런 함정을 준비할 수 있을 리는 없다. 그 짧은 시간에 저렇게 많은 돌들을 봉우리에 쌓아올린다고? 있을 수 없다. 적어도 하루 전에는 미리 준비해야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 미리 알았지? 하지만 지휘관은, 그런 고민 따위를 할 여유조차 없다는 것을 곧 깨닫는다. 본대 뒤쪽에서 부족원들의 비명과 고함이 들려온다.

 -뒤쪽이다! 뒤쪽에 놈들의 본대가-크악!
 -매복이다! 놈들이 옆에서....

 포위하고 있던 것은 우리가 아니란 말인가. 처음에는 후방이나 측면의 기습에 대비해 전사들을 충분히 흩어놓았다. 하지만 놈들이 봉우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고, 모든 전사들에게 산을 오르게 하면서 자연스레 다른 방면의 경계는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기습적으로 투석을 한다면, 아무리 유리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해도 몸을 숨기고 상대가 투석 방향을 파악하기 전에 계속 이동하면서 혼동을 주는 것이 정석일 것이다. 헌데 놈들은 달빛이 훤히 비쳐 밝게 빛나는 바위 위에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었다. 함정이다. 후퇴해야한다. 패인에 대한 분석은 나중에 하자. 지휘관은 침착하게 본대 전원에게 명령을 내린다.

 -후퇴하라! 포위망이 가장 얇은 곳을 찾아라! 한 방향으로 전력을 집중시켜 돌파한다!
 -무슨 똥소리인데샤!! 와타시의 군대에 후퇴란 없는데샤! 승리의 여신인 와타시가 함께하는데샤! 싸우면 무조건 이기는데샤! 겁먹지 말고 싸우란데챠아아앗!
 -서쪽입니다! 서쪽 방향의 포위가 비었습니다!
 -전원 서쪽으로! 서쪽 방향으로 돌파한다!

 다시금 위에서 돌멩이들이 날아든다. 본대에 합류하지 못한 전사들의 비명이 여기저기서 밤하늘을 찢는다. 서둘러야한다. 전황은 불리하지만, 아직 남은 전사들의 숫자는 많다. 숲에 남은 이들도 적지 않다. 여기서 큰 손실 없이 후퇴하는데 성공한다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은 그저, 포위망에 완성되기 전에 산을 빠져나가야 한다. 적이 없는 서쪽방향으로 길을 달려 산을 내려간다. 산 위의 비명도 잦아든다. 놈들의 투석도 닿지 않는다. 놈들이 미처 포위를 완성하지 못한 것이 다행이라 여기며 그들은 산 아래로, 산 아래로 내달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놈들에게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생각할 무렵, 선두가 멈춰 선다. 앞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탄식 소리. 전투의 소리는 들리지 않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한 지휘관이 대열을 헤치며 앞으로 나아간다.

 -무슨 일이냐?
 -그, 그것이... 낭떠러지입니다!
 -뭐...라고?
 -막혔습니다! 이 앞은 낭떠러지입니다!

 못해도 사람 키의 5~6배는 되어 보이는, 깎아지른 듯한 바위 절벽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뛰어내리면 죽는다. 우회로를 찾아보지만, 양 옆으로는 거대한 바위들이 길을 가로막고 있다. 모든 것이 놈들의 손바닥 위였다. 봉우리 위에서 훤히 모습을 보여주면서 투석을 했던 것도, 포위망의 한 쪽만 뚫려있었던 것도. 야습 준비는 완벽했다. 하지만 놈들은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모두 받아쳤다. 언제, 어떻게 공격할 것인지를 미리 알고 있지 않은 이상은 불가능하다. 설마 부족 중에 배신자가? 그럴 리가 없다. 군대를 소집하면서 부족원 숫자도 완벽하게 파악했다. 도중에 사라진 부족원이 있었다면 진작 알았을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것일까?
 전사들은 완전히 혼란에 빠졌다. 나무창을 쥐고 마지막까지 싸우다 죽겠다고 외치는 이들. 반대로 전의를 상실하고 주저앉은 이들. 그나마 친실장이 소리를 질러가며 싸우라고 독려하지만, 말 그대로 싸움을 종용할 뿐 이렇다 할 대책을 내 놓지는 못 한다. 이윽고, 산의 저편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너희들은 끝이다. 항복하면 목숨은 건질 수 있다.

 그래, 놈들 중에는 우리의 말을 할 줄 아는 자가 있었지. 애초에 그는 우리의 동족이었던가. 항복을 종용하는 소리에 전사들 가운데 불안이 퍼져간다. 지휘관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큰 소리로 대답한다.

 -숲의 전사들에게 항복이란 없다! 승리를 원한다면 용감하게 나와 싸워라!

 저편에서 다시금 목소리만 들려온다.

 -그 동안 너희와 우리, 두 부족은 평화롭게 지내지 않았나? 왜 신의를 저버리고 전쟁을 꾸민 것이지?
 -너희가 숲의 여신의 사자를, 그 딸들을 모욕했기 때문이다!
 -그 여신의 딸인지 뭔지가 우리에게 부당한 요구를 했기에 거절했을 뿐이다.
 -대화가 무슨 소용이냐! 이제 싸워서 승패를 가릴 뿐이다!
 -싸움의 영광을 원하나?
 -명예를 아는 자라면 모습을 드러내고 싸워라!
 -부족 간의 화합을 일방적으로 깨고, 밤을 틈타 몰래 기습한 주제에 명예를 논하나? 너희에겐 싸우다 죽을 자격이 없다. 그 낭떠러지에서 굴욕적으로 죽어라.
 -닥쳐라!
 -마지막으로 고한다. 항복할 자는 무기를 버리고 머리를 가리고 땅에 엎드려라. 항복하면 목숨은 구할 수 있다.

 잠시간의 침묵. 그리고는 잠시 뒤, 바람을 찢는 섬뜩한 소리가 침묵을 깬다.

 휘리릭
 휘익
 쎄엑-

 산 위쪽의 커다란 바위 위에서 투석이 시작된다. 놈들은 정말로, 우리를 단지 돌로 쳐 죽일 셈인가. 창을 맞댈 기회조차 주지 않는가. 투석꾼들이 부랴부랴 대응 투석을 하지만, 역시 이상하게도 놈들의 사정거리가 훨씬 길다. 용감한 몇몇 전사들이 나무창을 앞세우고 적진으로 돌격해 보아도 쏟아지는 투석에 곧 머리가 깨지고 뼈가 부러져 쓰러진다. 단지 우리를 유인하기 위해 행했던 아까의 투석과는 숫자도, 위력도 다르다. 비 오듯 쏟아지는 돌의 무리에 전사들이 하나둘씩 쓰러져간다. 돌을 피하려다가, 그 피하려는 이에게 떠밀리는 바람에, 혹은 차라리 명예롭게 죽겠다며 낭떠러지로 떨어져 내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많은 이들이 이미 전의를 상실하고 바닥에 엎드려 덜덜 떤다. 이렇게 불명예스러운 죽음이라니. 하지만 ‘너희에겐 싸우다 죽을 자격도 없다’는 그들의 말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명예를 원한다면 애초에 이런 전쟁 따위 벌이지 말았어야 했다. 피식. 실소를 지은 지휘관은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커다란 돌덩이를 본다. 고개만 틀어도 충분히 피할 수 있는 궤도.... 하지만 그는 돌을 피하기보다는 그저 조용히 눈을 감는 것을 택했다.



#11

 정말로 쓸모없는 노예들이다! 어째서, 어째서 고귀한 와타시가 있는데 적에게서 도망이나 친단 말인가? 와타시의 노예 군대가 저 한 줌도 안 되는 똥닝겐들 따위에게 패배할 리가 없다.

 -뭐하는데샤아아아! 노력하는데스! 산 채로 잡아오지 않아도 좋은데스! 일어서는데스! 일어서는데스 노예!!

 사기를 돋우기 위해 친실장이 연신 소리를 질러보지만, 그녀의 노예 전사들은 창 한번 적진으로 찔러보지 못 하고 속수무책으로 쓰러져나간다. 이건,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 그녀의 노예 군대가 저 한 줌도 안 되는 똥분충들 따위에게 패배할 리가 없다. 그래, 이것도 뭔가 작전일거다. 저 똥분충들을 한 곳으로 유인해 놓고 뒤에서 덮치기 위한 작전. 아마 와타시의 최정예 전사들이 저놈들 배후에 숨어 불시에 덮치기 직전일 것이다! 와타시가 지금 여기에서 위기에 빠져 있는 것도 작전일 것이다. 똥분충을 유인하려면 강력한 미끼가 필요했겠지. 세상의 여신인 와타시보다 귀중한 것은 세상에 없으니, 그녀야말로 가장 강력한 미끼인 셈이다. 좋은 작전이다. 과연 그녀의 노예 지휘관이다. 그러니까 이제 빨리 적들을 덮쳐! 아무리 와타시가 미끼 역할을 맡았다고는 해도, 지고의 존엄한 여신인 와타시가 다치기라도 하면 백 번의 승리로도 갚지 못할 너무 큰 손실이잖아?
 어느 샌가 망상 속에 빠져든 친실장. 하지만 친실장은 곧 강제로 망상에서 깨어나야만 했다. 그녀가 앉은 가마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한 것이다.

 -뭐인데스? 가마도 제대로 못 드는데스? 저 놈들에게 똥분충이 옮은데스?

 화를 내며 가마꾼을 돌아보는 친실장. 그녀의 눈에 가마꾼이 이마에서 피를 흘리며, 눈을 허옇게 까뒤집고는 쓰러지는 모습이 보인다. 기우뚱. 가마꾼이 쓰러짐에 따라 가마도 함께 뒤집어지며, 친실장은 중심을 잃고 공중에 붕 뜬다.

 -뎃! 데뎃! 데갸아악! 데복!!

 통, 통, 데구르르. 여기저기 부딫히고 구르다 바닥에 자빠진 친실장. 다행히 가마에 깔려 있던 폭신한 털가죽과 먼저 쓰러진 가마꾼 노예의 몸이 충격을 완화해주어 어디가 부러지거나 터지지는 않았으나, 온 몸이 쑤시는 통증에 친실장은 잠시 몸을 가누지 못 한다. 한참을 비틀거리다 겨우 일어선 친실장은 가마꾼을 꾸짖기 위해 주변을 둘러본다. 없다. 가마꾼이 없다. 아니, 가마꾼만이 아니라 닝겐 노예가 아무도 없다. 어디갔지? 고개를 들고는 두리번거리자 그제야 닝겐 노예들이 보인다. 닝겐 노예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아무도 서 있지 않을 뿐. 대부분의 노예가 몸 어딘가에서 피를 흘리며, 혀를 빼물고 눈을 허옇게 뒤집은 채 바닥에 아무렇게나 쓰러져있다. 그렇지 않은 노예들도 땅바닥에 구더기처럼 엎으려 머리를 손으로 가리고는 덜덜 떨고 있을 뿐이다. 뭐지? 와타시의 강력한 전사들이 왜 다들 파킨한 구더기처럼 바닥에 쓰러져있는 것일까?
 더 이상 일어서 있는 닝겐 노예가 없어서일까, 어느덧 돌덩이들이 빗발치던 소리는 가라앉았다. 더 이상 고함도, 비명도 들리지 않는다. 보이는 것은 땅바닥에 엎드리거나 널부러져 있는 친실장의 노예 전사들. 들리는 것은 무서울 정도의 적막. 그제야 친실장은 깨닫는다. 졌다. 적의 배후에 매복하고 있던 와타시의 군대 같은건 없다. 그녀의 무시무시한 대군은 지금 그녀의 주변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있을 수 없다. 졌다고? 와타시의 노예 군대가 저 한 줌도 안 되는 똥닝겐들 따위에게 패배할 리가 없다. 하지만 졌다.
 ‘와타시의 군대는 질 리가 없다’는 굳은 믿음과 ‘졌다’라는 현실 인식 사이의 괴리감에 친실장이 혼란을 느끼며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찰나, 커다란 바윗덩이 사이로 난 길에서, 그 길을 덮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을 그녀는 느낀다. 어둠 속을 뚫고 뿜어져 나오는 무서운 기운에 친실장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든다. 어둠의 저 편에서 꿈틀거리는 희끄무레한 인영. 키 큰큰하고 팔다리 긴긴하고 두 발로 걷는 닝겐의 그것이다. 하지만.... 뿜어져 나오는 느낌은 그녀가 아는 닝겐의 그것이 아니다. 닝겐은 모름지기 그녀의 노예가 되어야 마땅한 존재. 오직 그녀를 섬기기 위해 조물주가 창조한, 이 세상이 점지한 그녀의 노예. 그런 닝겐이 저렇게 무서울 리가 없다. 본능적 공포에 친실장의 턱이 덜덜 떨린다. 이빨이 딱딱 부딪치며 소리를 낸다. 와타시의 노예 군대가 저 한 줌도 안 되는 똥닝겐들 따위에게 패배할 리가 없다. 하지만 졌다. 아까부터 친실장의 뇌를 헤집는 모순. 순간 한 줄기 돌파구가 친실장의 사고를 꿰뚫는다.

 -혹시....저것들 닝겐이 아닌데스?

 인영들은 점차 선명해진다. 한둘이 아니다. 어둠을 뚫고 끝없이 나타난다.

 -닝겐이 아니면....무엇인데스?

 친실장은 기억 저편의, 마마의 마마의 마마의 마마의 마마....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떠올린다. 숲의 바깥에는 네발 분충들이 산다. 하지만 저들은 두발로 걷는다. 네발 분충 말고 또 뭐가 산다고 했다. 뭐였지? 친실장의 머릿 속에 두 글자가 선명히 떠오른다.

 -악...마...인데스?

 인영은 어느새 확실한 형상이 된다. 인간처럼 키가 큰큰하고, 팔다리 긴긴하고, 두 발로 걷는 이들. 흰색 진흙으로 피부에 그린 전쟁 분장(war paint)이 달빛을 받아 하얗게 빛난다.

 -악마, 악마인데스!

 온 몸이 흰 색인 닝겐 같은 그것들의 손에는 긴 막대가 하나씩 들려있다. 노예 닝겐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있는 기다란 막대의 끝에서 시뻘건 선혈이 뚝뚝 방울져 떨어진다.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친실장을 향해 다가오는 그 무시무시한 형상이 친실장의 뇌리에, 위석에 선명하게 새겨진다.

 -하, 하얀.... 하얀 악마인데스....

 죽어 나자빠진 노예들 사이를 해치며 하얀 악마가 다가온다. 아직 숨이 붙어있거나, 항복의 표시로 엎드린 노예들은 악마들에게 붙들려 하나둘 어둠의 저편으로 끌려간다. ‘하얀 악마’라는 네 글자만 멍하니 되뇌던 친실장의 앞에 하얀 악마 하나가 멈추어 선다. 친실장은 그녀의 본능이 말해주는 대로, 그 상황에서 그녀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을 취한다.

 -데, 데스~웅♡

 하얀 악마는 물끄러미 친실장을 바라보더니, 친실장과 눈을 마주치고는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섬뜩하게 씨익 웃는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압도적인 공포. 친실장은 필사적으로 미지의 공포를 향해 연신 아첨을 보내다가, 결국 두려움에 짓눌려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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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장석 구제 전문업체 "짓스코" 이용자 QnA 게시판, 게시물 287691번

Q: 구제업자들이 입는 방역복은 왜 전부 하얀색인가요? 
운치나 피 등이 묻으면 너무 티나고 금방 더러워져서 세탁도 어렵지 않나요? 

A: 저희 짓스코 게시판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실제로 실장석 방역복이 하얀색인 데에 따른 어려움도 많습니다 ㅠㅠ
조금만 더러워져도 티가 팍팍 나구요.... 특히 운치 같은건 빨아도 잘 안 지죠. 
하지만 그럼에도 저희 짓스코맨들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구제업체 직원들이 하얀색 방역복을 입는 이유는,
실장석들이 본능적으로 하얀색 방역복을 입었을 때 가장 큰 공포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실장석 연구의 선두주자인 도쿄대 생물학과 토시아키 교수팀의 2007년 연구에 의하면,
실장석들은 하얀색 복장을 입은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를 느끼며,
심지어 인간이 전신을 하얀색으로 감쌀 경우에는
해당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하얀 악마'라는 별개의 대상으로 인식한다고 합니다.
실장석 구제의 목적은 실장석의 박멸 뿐 아니라 
살아남은 실장석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어 민폐를 끼치는 짓을 못 하게 하려는 것에도 있죠!
그런 목적에서, 실장석들이 본능적으로 가장 큰 공포를 느끼는 하얀색 복장을 하는 것입니다.

다만 실장석들이 하얀색 복장을 한 인간에게 가장 큰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네요~

도움이 되셨기를 바라며 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12

 -하, 하얀 악마데스!!

 눈앞에 익숙한 광경이 보인다. 높다란 동굴의 천장. 집인가? 친실장은 꿈틀꿈틀 상체를 일으켰다. 와타시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멍하니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도리도리 흔들어본다. 뇌에 피가 돌면서 조금씩 어젯밤의 기억이 돌아온다. 피를 흘리며 하나둘 쓰러져가던 닝겐 노예들. 무시무시한 적막. 그리고 어둠 속에서 나타나던...하얀 악마들.

 -데뎃!? 여긴 어디데스? 침대인데스?

 되살아난 끔찍한 기억에 소스라쳐 벌떡 일어나는 친실장. 식은땀을 흘리며 후욱 호흡을 가다듬는다. 괜찮다. 와타시는 살아있다. 여기엔 하얀 악마들도 없다. 그 때, 가슴을 쓸어내리는 친실장의 등 뒤에서 익숙하고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온다.

 -마마, 깨어난테치?

 귀엽고도 예쁜, 지저귀는 듯한 목소리, 어찌 잊을 수 있으랴.

 -장녀? 장녀가 여기 있는데스?
 -그런테치! 마마, 와타치 장녀인테치!
 -장녀! 어떻게 여기에 있는데스! 무사한데스?
 -와타치는 먼저 여기 와 있었던테치! 똥닝겐들을 메로메로시켜서 대접받고 있었던테치!

 똥닝겐들을 메로메로시켰다고? 장녀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친실장은 동굴 안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얼핏 보기엔 친실장의 궁궐과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니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여긴 와타시의 궁궐이 아니라 다른 곳인가? 잠깐, 방금 장녀가 똥닝겐들을 메로메로시켰다고 하지 않았나? 확실히, 장녀는 제법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던 듯하다. 장녀가 앉아 있던 곳에서 먹다만 큼지막한 구운 꼬기가 놓여 있고, 바닥에는 폭신한 털가죽이 놓여 있다. 따스한 모닥불이 동굴 안을 밝히는 동시에 딱 좋은 온도로 덥히고 있다. 친실장은 다시금 혼란스러워진다. 그 하얀 악마들은 지금은 어디로 간 것일까? 꼼짝 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눈을 떠보니 무사할 뿐 아니라 아늑한 동굴에 사지 멀쩡하게 누워 있었다. 게다가 없어졌다고 생각했던 장녀까지 함께. 어떻게 된 일이지?

 -장녀, 어떻게 된 것인데스? 마마가 어떻게 여기에 온데스?
 -와타치가 똥닝겐들에게 마마를 데려오라고 한테치. 그랬더니 명령대로 마마를 데리고 온테치! 똥닝겐들이 와타치에게 메로메로돼서 말 잘 듣는 노예가 된테츙~♡
 -똥닝겐들을 메로메로시켰다고 한데스? 뭘 어떻게 한 것인데스?
 -노예 닝겐들이 똥닝겐들을 솎아내기 한다고 와타치도 들은테치. 하지만 와타치는, 와타치가 똥닝겐을 메로메로시키면 솎아낼 필요 없이 똥닝겐들을 노예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테치. 그래서 와타치가 마마보다 먼저 온테치!
 -장녀! 숲 밖은 위험하다고 하지 않은데스? 왜 위험하게 또 나온데스!
 -테엥.... 마마, 그것은 잘못한테치! 하지만 메로메로해서 노예로 만들 수 있는 닝겐들이 솎아내지는건 아까운테치!
 -뎃, 그, 그건 그런데스. 하지만 그래도 마마의 말을 듣지 않는 것은 분충인데스!
 -잘못한테치.....테에에에엥.....
 -아, 아닌데스. 그것은 나중에 이야기하는데스. 장녀는 일단 어떻게 된 일인지 이야기해보는데스,
 -테에.... 그러니까 와타치가 마마보다 먼저 와서 똥닝겐들을 만난테치! 그래서 똥닝겐들에게 와타치타치를 여신으로 모시라고 이야기한테치. 그러면 목숨도 살려주고 와타치타치의 축복을 베풀어주겠다고 말한테치! 처음엔 반응이 별로여서 와타치의 필살 애교를 보여줬던테치! 그랬더니 똥닝겐들이 메로메로돼서 와타치타치를 여신으로 모시겠다고 말한테치. 와타치에게 우마우마한 구운 꼬기도 바치고, 폭신한 잠자리도 마련해준테치! 와타치의 마음에 꼭 들었던 세레브한 털가죽도 조만간 와타치에게 바치겠다고 약속한테치. 노예 군대에 대해 자꾸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어봐서 귀찮았던테치가, 와타치를 세레브하게 잘 모시기에 관대하게 대답해준테치. 그러다가 와타치가 메로메로시킨 새 노예들을 마마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마마를 데려오라고 명령한테치. 그랬더니 노예들이 마마를 모시러 간다고 나간테치. 시간이 좀 오래 걸리긴 한테치. 하지만 결국 마마를 찾아서 와타치에게 데려온테치! 와타치가 새 노예들을 메로메로한테치! 마마는 착한아이를 해주는 텟츙~♡

 장녀의 말을 들으며 친실장의 머릿속이 맑아진다. 그랬던 것이다. 세상의 주인인 와타시에게, 하얀 악마에게 붙들려 죽는 운명 따위가 준비되어 있을 리 없다. 닝겐 노예들이 죄다 하얀 악마에게 실각당할 때만 해도 정신이 아득했지만, 사실 더 강하고 싸움 잘하는 노예를 얻기 위한 도움닫기였을 뿐이다! 역시나 자들 중에서도 가장 기대했던 장녀가 새로운 닝겐 노예들을 메로메로시켜 와타시를 하얀 악마들의 손에서 구하고 더욱 위대한 여신으로 만들었다.

 -자를 먼저 보내서....메로메로시키면 되는 것이었던데스?

 생각해보면 정말 손쉬운 일이었다. 아름다운의 현현 그 자체나 다름없는 그녀가 보아도 이렇게 귀엽고 사랑스러운 자인데, 똥닝겐 따위가 보면 얼마나 귀여울까? 그러니 자를 먼저 보내어 닝겐을 메로메로시키게 하면, 메로메로되어 노예가 된 닝겐이 알아서 그녀까지 모실 것이다! 그러면 귀찮게 전쟁 같은 것을 일으킬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 노예들이 하얀 악마들에게 실각당하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데뎃, 하지만 괜찮은데스. 노예는 다시 구하면 되는데스!

 그래봤자 무능한 똥노예들이었다. 그녀에 대한 충심만큼은 갸륵하여 너그러이 노예로 삼아주고 있긴 했지만, 세상을 정복해 그녀의 발아래 놓아야 할 자신들의 거룩한 사명을 수행하는 데에 결국 실패하지 않았나. 어차피 새 노예를 구할 때라고 생각했던 참이다. 이렇게 장녀가 새 노예들을 훌륭히 메로메로시켜 데려오지 않았는가? 앞으로도 새 노예가 필요하면 귀여운 자를 보내 메로메로시키게 하면 그만인 것이다. 새 노예를 부려 세상을 호령할 생각을 하며 기분 좋게 웃는 친실장. 옆에 있던 장녀도 친실장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함께 웃는다.

 -데프프프프프프픗.....
 -치프프프.....

 얼마를 웃었을까. 인기척과 함께 세 노예 닝겐이 들어온다. 백발이 성성한 닝겐이 하나, 키가 큰 닝겐이 하나. 이 두 노예 닝겐들은 이전 노예들보다 키가 조금 크고 깡마른 것이, 이전의 노예 장로들이 말한 ‘큰 키’들인 모양이다. 반면 나머지 하나의 노예는 친숙한 모습이다. 키는 다소 작은 대신 근육질에 건장한 것이 이전의 노예들과 같다. 세 노예가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로 서로 짖더니, 이윽고 친숙한 모습의 노예가 말을 건낸다.

 -일어났군. 정신이 좀 드나?
 -데프프프픗. 오마에가 와타시의 새로운 노예인데스? 와타시를 하얀 악마에게서 구한 공은 칭찬해주는데스.
 -하얀 악마? 그게 뭔가?
 -오마에가 와타시를 여기 모시고 왔으면서 그것도 모르는데스? 똥멍청이인데스? 게다가 왜 말이 짧은데스? 오마에는 여신에게 합당한 예를 갖출 줄도 모르는데스?

 옆에서 듣고 있던 장녀가 친실장에게 살짝 귀뜸한다.

 -마마, 새 노예들은 말을 못 하는테치. 지금 이 노예가 말을 할 줄 아는 유일한 노예인테치. 하지만 이 노예도 말이 유창하지는 않은테치. 잘 못하는테치. 와타치도 처음엔 무례한 놈들인줄 안 테치. 하지만 와타치에게 잘 대접하는걸 보니 그냥 말을 잘 못해서 그럴 뿐인 것 같은테치.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장녀가 처음 했던 말들이 기억난다. 이 새 노예들은 말을 못하고 짖는 소리만 낸다고 했다. 말할 줄 아는 노예가 하나뿐이라고. 끙. 새 노예가 생긴 것은 좋으나 말을 처음부터 가르쳐야 한다는 건 좀 골치 아프다.

 -뎃, 오마에타치가 좀 멍청한건 와타시가 너그러이 봐주는데스. 지금부터 배우면 되는데스. 와타시는 관대한데스. 하지만 와타시타치를 섬기는 데에는 소홀함이 없어야 하는데스!
 -그런테치! 명심하는테치! 치프픗.
 -우선 확인하겠다. 너가 저 숲의 여신의 사자인가? 맞나?
 -당연한데스! 딱 보면 모르는데스? 그런 뻔한 걸 왜 묻는데스? 와타시말고 지고의 여신이 또 어디에 있는데스?
 -숲의 여신을 섬기던 부족은 전쟁에서 패해 멸망했다. 전사들은 죽거나 항복했고, 숲에 남아있던 여자들은 우리 부족이 취했다. 알고 있나?
 -데프프픗....상관 없는데스. 어차피 쓸모없는 노예들이었던데스. 노예는 다시 구하면 되는데스. 오마에들이 와타시타치를 섬기면 되는데스.
 -숲의 여신이 우리 부족의 여신이 되어 준다는 건가?
 -데프픗! 그런데스. 와타시타치가 오마에들의 여신이 되어주는데스! 이전의 똥노예들에게 베풀던 숲의 은혜를 오마에들에게 베풀어주는데스. 오마에들이 와타시타치를 잘 섬기면, 오마에들은 저 숲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게 되는데스. 숲은 더 풍성해지고 많은 열매를 맺는데스. 오마에들이 자도 많이 낳아 기를 수 있게 해주는데스. 풍요와 다산의 축복인데스!
 -너희의 힘을 얻으면 저 숲이 우리 것이 된다. 맞나?
 -뭐, 대충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뎃승~♡
 -....숲의 여신이 우리의 여신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알고 있나?
 -물론인데샤!! 와타시는 이 세상의 유일한 여신인데스! 여신의 일에 대하여 와타시보다 잘 아는 이는 이 세상에 없는데스! 오마에가 그런 것을 와타시에게 물어보는 것 자체가 무엄한데스!!
 -알겠다. 숲을 얻기 위해 숲의 여신을 섬기겠다.
 -데프프프프픗! 데퍄퍄! 당연한 것인데스! 숲의 여신을 섬기는데스! 하지만 여신께 합당한 예를 다해야 할 것인데스. 여신을 섬기는 데에 부족함이 있으면, 오마에들도 예전의 똥노예들처럼 숲의 여신에게 버림받고 다른 닝겐들에게 숲의 축복을 빼앗길 것인데스!

 말할 줄 아는 노예가 말을 못하는 다른 두 노예와 서로 뭐라뭐라 짖는 소리를 낸다. 아무래도 친실장의 말을 받들어 합당한 예를 지시하는 것이겠지. 한참 울음소리를 주고받더니, 말할 줄 아는 노예가 싱긋 웃으며 친실장에게 대답한다.

 -걱정마라. 숲의 여신을 위한 성대한 축제를 준비해 오기 때문에, 기다리고 있어라.

 말을 마친 노예가 동굴을 떠난다. 뻣뻣한 놈. 말만이 아니라 예의범절까지 새로 가르쳐야겠다. 하지만 성대한 축제를 바친다니! 예의범절이 없는 것과는 다르게 여신을 섬길 줄은 아는건가? 축제는 좋다. 신나는 춤과 노래, 풍성한 먹을거리. 문득 장녀를 보니 장녀는 친실장보다 더욱 신이 났다.

 -마마! 축제인테치! 축제라고 한테치! 축제 좋은테치!!
 -태도는 조금 무엄해도 쓸만한 노예들인뎃승~ 와타시타치는 지금까지보다 더욱 세레브해지는데스! 데프프프프!!
 -테프프프프!







*친실장은 탁아(을)를 습득했다!



#13

 숲의 한가운데, 넓은 공터. 예전의 노예들도 부족 전체의 모임이나 축제 등을 벌일 때에 사용하던 곳, 그 곳에서 신나는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군데군데 크고 작은 모닥불이 피워져 있고, 그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불더미가 지펴져 혓바닥을 넘실거린다. 모닥불마다 둘러앉은 ‘큰 키’ 노예들이 두런두런 즐겁게 대화를 나눈다. 중간 중간 예전의 노예들도 보인다. 예전의 노예들은 다 실각한 것이 아니었나?하고 물어보니, 예전 노예들 중에서 항복하고 ‘큰 키’ 부족에 합류하기를 원한 전사들과 숲에 남아있던 여자들은 부족의 일부로 받아들여졌다 한다. 쓸모없는 예전 노예들은 솎아내도 될텐데?하고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말할 줄 아는 노예가 하나 뿐인 것은 불편했기에 그냥저냥 납득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친실장은 공터 한가운데의 커다란 불 앞쪽에 마련된 화려한 제단에 앉아있다. 널찍한 큰 바윗덩어리로 만들어지고 갖은 장신구로 치장되어 있는 제단은 이전의 똥노예들도 숲의 여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마다 사용하던 친실장의 전용석. 이 자리에 다시 앉으니 새로운 노예를 얻어 여신으로서의 고귀한 삶을 이어가게 되었다는 것이 새삼 실감되었다.

 -마마! 축제 정말 기대되는레치!
 -맛나맛나한 꼬기는 아직인테치?
 -마마와 함께 축제를 대접받는 것은 정말 오랜만인데스우....오로롱....
 -와타치는 마마의 자라서 너무 기쁜텟츙~♡

 단상 주위를 둘러싸고 옹기종기 모여 앉은 것은 그녀의 사랑스러운 자들. 아직 어린 자들부터 다 커서 독립했던 자들까지 모든 자들이 여신의 축제를 함께 즐기러 모여 왔다. 친실장이 새로운 노예들을 거느리고 막 숲으로 돌아왔을 때, 처음 보는 닝겐들이 잔뜩 몰려온 것에 잔뜩 겁먹었던 자들. 하지만 친실장과 장녀가 근엄하게 나타나 더욱 강하고 우수한 새로운 노예들을 거느리게 된 경위를 이야기해주자 곧 상황을 이해하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거기에 나아가 숲의 여신을 찬미하는 축제를 열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에는, 모든 자들이 입을 모아 친실장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역시 마마가 세상의 주인이었던테치.
 -마마의 자라서 너무 행복한레치!
 -와타시는 한 번도 마마의 권능을 의심하지 않았던데스~

 지금도 친실장을 둘러싸고 들려오는 자들의 기쁨에 찬 찬미 소리가 그녀를 만족스럽게 한다. 축제 시작 전 막바지 준비로 왁자지껄한 공터를 둘러보며 친실장은 나지막이 중얼거린다.

 -이것이야말로 행복인데스. 그야말로 고귀한 와타시에게 어울리는 삶인데스.

 잠시 뒤, 흥겨운 노랫소리와 함께 축제가 시작된다. 옹기종기 모여 앉은 노예들 사이로 제사장을 맡은 백발의 노예가 앞장서 들어오고, 그 뒤로는 악기를 연주하는 노예들이, 그 뒤로는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르는 노예들이, 그 뒤로는 춤추는 노예들이 줄줄이 입장한다. 곰의 넓적다리뼈로 만든 플루트가 지저귀는 듯한 소리를 연주하고, 사슴 가죽 북을 치는 이들이 흥을 돋운다. 삘릴리, 쿵, 쿵쿵. 군중들이 하나, 둘 노랫소리에 합류한다. ‘큰 키’들의 언어는 친실장과 자들에게는 그저 짖는 소리로 밖에 들리지 않아 무어라 노래하는지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틀림없이 숲의 여신인 그녀를 찬양하는 노래일 것이다. 뒤이어 무희들이 제단 앞까지 춤추며 나오자 노예들의 무리는 앞 다투어 일어나 함께 춤추기 시작한다. 뛰고, 돌고, 다시 뛰고. 흥겹다. 흥겹고 신나는 축제다. 친실장은 저도 모르게 체통도 잊고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있다.

 -뎃데로게~ 와타시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뎃승~ 세상의 여신인뎃승~ 모두가 와타시를 숭배하는 뎃승~~ 닝겐 노예들을 잔뜩 거느린뎃승~ 와타시야말로, 세상의 중심인뎃승~ 뎃데로게~

 친실장의 주위를 둘러싼 자들도 행복하게 함께 노래 부른다. 개중에 활기찬 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팔다리를 붕쯔붕쯔 흔들며 춤까지 춘다.

 -텟테로게~ 와타치타치는 여신인테치~
 -렛레레~ 구운 꼬기! 날생선! 알록달록 과일! 렛레레이~

 한참을 춤추고 노래하던 군중들. 흥이 자연스레 식어갈 때 즈음 제사장인 백발의 노예가 제단 앞으로 와 군중을 향해 손을 들어올린다. 순식간에 잦아드는 춤과 노래의 물결. 이윽고 제사장은 군중을 향해 뭐라 뭐라 연설을 시작한다. 제사장은 연설의 중간 중간 큰 호령을 섞고, 군중은 그 때마다 환호와 함성으로 응답한다. 보나마나 숲의 여신, 지고의 여신, 천부의 여신인 친실장의 영광을 찬양하는 연설이겠지만, 정작 장본인인 그녀가 알아듣지 못 한다는 것은 불편하다. 빨리 말을 가르쳐야겠어.

 축제는 절정을 향해 달려간다.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어도, 친실장은 그들이 하는 행동을 통해 축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있었다. 다시금 악기 소리가 울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음악을 연주하기 위함이 아니라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함. 두둥. 두둥. 두둥. 규칙적으로 울리는 북소리와 함께 지금까지 흥분해 날뛰던 군중이 단정하게 줄지어 선다. 군중을 바라보며 연설하던 제사장은, 이번엔 뒤로 돌아 친실장 방향을 보며 하늘을 우러러 뭐라 뭐라 외치고는 친실장 앞에 엎드려 절한다. 물론 군중들 역시 제사장을 따라 땅에 엎드려 절한다. 제단 위에 선 친실장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짐짓 여신의 위엄을 뽐내었다.
 절하던 제사장과 군중들이 일어선다. 제사장이 다시금 하늘을 우러르며 부르짖는다. 둥둥. 북소리에 맞추어 모두가 다시 절한다. 자기들끼리 도란도란 떠들던 자들도, 뭇 닝겐 노예들이 일제히 친실장에게 엎디어 절하는 장엄한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모습인가! 둥둥. 계속되는 북소리에 맞추어 닝겐들은 일어서고, 하늘을 우러르며 무언가를 외치고, 다시 절한다. 뒷짐을 지고 닝겐들을 바라보는 친실장의 두 눈에서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린다.

 -마마, 마마의 마마, 마마의 마마의 마마의....모든 마마들, 보고 있는데스? 보이는데스? 와타시가 우리 일족의 숙원을 이루어낸데스. 지금까지 와타시타치가 받아왔던 흠숭은 자실장들 장난이었던데스. 오늘, 와타시타치가 이 세상의 진정한 여신으로 등극하는데스!! 와타시타치의 천부적 권리를 성취하기 위한 역사를 시작하는데스!! 이 노예 닝겐들로 다시 군대를 만들어 이 세상의 지배자가 되는데스!! 와타시를 지켜보는데스우!!

 북소리가 빨라진다. 둥! 둥! 둥! 절하던 닝겐 노예들은 이제 아예 엎드린 상태로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속해서 무언가를 왼다. 온 몸을 화려하게 치장한 닝겐 노예 대여섯이 가운데로 나와 춤추기 시작한다. 뛰고, 돌고, 구르고! 별안간 엎드려 있던 닝겐들이 일제히 일어나 구령을 맞추어 발을 구른다. 우르르! 구르르르! 군중은 광기에 빠져들어 가고, 이를 지켜보던 친실장과 그 딸들도 자기도 모르게 흥분에 달아오른다.
 그 사이에도 하늘을 우러러 두 손을 모으고 무언가를 외치던 제사장이 갑자기 군중을 향해 큰 고함을 외치며 두 손을 치켜든다. 일제히 침착함을 되찾는 군중들. 분위기만 보아도 축제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 시작되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제사장은 제단으로 다가와 친실장의 겨드랑이 아래에 두 손을 넣고는, 군중을 향해 그녀를 들어 보인다. 일제히 환호하는 군중들. 개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는 이들도 있다. 친실장 역시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끼며 오른손을 흔들어 군중에게 화답해준다. 제사장은 친실장을 다시 제단에 내려놓더니, 이번에는 친실장을 제단에 눕힌다.

 -데뎃, 뭐하는데스? 왜 갑자기 와타시를 눕히는데스?

 마라 닝겐 노예가 갑자기 그녀를 눕힌다면 ‘그것’밖에 더 있겠는가? 하지만 이런 백주대낮에, 수많은 닝겐 노예들이 지켜보는 곳에서? 그녀의 마음에 드는 잘생긴 마라 노예가 있다면 총구 노예로 삼아주는 것은 나쁘지 않지만... 이건 좀 그렇지 않나?

 -오마에들의 축제에는 이런 절차도 있는데스? 설마 와타시에게 무엄한 짓을 하려는데스? 응큼한데스? 오마에들은 변태 부족이었던데스?

 제사장은 왼손으로 누워있는 친실장의 몸을 가볍게 꾸욱 누르며, 오른손을 허리춤에 넣어 까맣고 예쁜 돌조각을 뽑아든다. 새까맣고 윤기나는, 태양을 받아 날카롭게 빛나는 돌은 친실장이 보아온 그 어떤 돌보다도 예뻤으나, 어딘가 소름끼치는 느낌이 들었다. 뭔가, 뭔가 이상하다.

 -테챠아아앗!!
 -오마에들, 뭐하는레치? 이 손 놓는레치!!
 -무엄한데스! 오마에들 뭐인데스! 지금 와타시가 누구인지 모르는데스?
 -마마! 마맛!! 도와테치! 도와주는테치!! 똥노예들이 전부 미친테치!!

 예상치 못한 축제의 절차에 당황하는 친실장의 귀에 갑자기 자들의 노성이 들려온다. 몸을 일으켜보려 하나 제사장 노예의 손이 그녀의 몸을 누르고 있어 여의치 않다. 불길한 예감에 겨우 고개만 돌려 자들이 있던 곳을 바라보는 친실장.

 닝겐 노예들 여럿이 몰려들어 자들을 손에 집어 든다. 성체실장, 자실장, 엄지실장 할 것 없이 갑자기 몰려들어 자신들을 억세게 잡아 올린 똥노예들을 꾸짖는다. 하지만 닝겐 노예들은 들은 척도 않고 –아니, 애초에 알아들을 수도 없겠지만– 귀여운 자들을 차례차례 손에 들고는 옷을 벗긴다. 아랫도리를 가리던 속곳도, 앙증맞은 발을 감싼 신발도 벗긴다. 머리를 뽑는다. 우악스럽게 머리채를 잡아 뽑는다. 사랑스러운 자들이 독라가 되어간다.
 왜? 어째서? 친실장은 너무도 당황한 나머지 머리가 하얗게 되어버린다. 이상하다. 너무 이상하다. 악몽이라도 꾸고 있는 것일까? 방금 전까지 숲의 여신을 위해 축제를 벌이던 닝겐 노예들이, 와타시타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숲의 은혜를 받겠다고 고개를 숙이던 닝겐 노예들이 갑자기 왜 이러는가?

 파킨-

 한 엄지실장이 독라가 되어버린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하얗게 뒤집으며 죽어 늘어진다. 다른 자들도 두 눈에서 적록의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을 붙잡은 닝겐 노예들을 손을 토닥토닥 때린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닝겐 노예들은 계속해서 불충을 저지른다. 손에 돌칼을 집어 들고는 자들의 배를 가른다. 능숙하게 내장을 들어내고 피범벅이 된 자들의 뱃속을 물로 씻는다.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너덜너덜해진 자들의 몸뚱이를 꽂는다. 그러고는 모닥불로 다가가....자들을 불에 굽기 시작한다.

 -테챠아아아앗!! 아파테치! 뜨거테치!! 살려테치!!!!!
 -데즈앗! 데즈아아아아!! 데갸아아아악!! 와타시가 타는데스! 타는데스우-!!

 자지러지는 자들의 비명이 광활한 하늘을 채운다. 기름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 고기가 구워지는 고소한 냄새와 함께 자들이 구운 꼬기가 되어간다.

 -이게...지금 무엇인데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스?

 아직도 멍하니 정신을 차리지 못 하는 친실장의 눈에 생지옥이 펼쳐진다. 하나 둘 실장 꼬치구이가 되어가는 자들. 자기보다 앞서 자매들이 구워지고 있는 모습을 보며 아직은 무사한 다른 자들도 발광을 한다.

 -싫어테치! 싫어테치! 와타치는 맛나맛나가 아닌테치!!
 -레히이!! 맛있어지는레치!! 맛있어지는레치이-!
 -데샤아아앗!! 더 이상 못 참는데스! 와타시의 왕주먹 맛을 보여주는데스!!

 다 커서 독립했던 자들 중 하나가 두 손을 붕쯔붕쯔 흔들며 닝겐에게 주먹질을 날린다. 여신의 딸인 그녀의 신성한 주먹이라면 이런 똥노예 따위는 한 방에!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덩치만큼은 거의 친실장만한 듬직한 그녀 역시 순식간에 꼬치에 꿰어 모닥불 곁에 세워진다.

 파킨!
 파킨!
 파킨!

 산 채로 불에 구워지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성체실장들, 독라가 된 충격을 이기지 못한 자실장들, 그런 자매들을 보며 공포심에 짓눌려버린 엄지실장들의 소중한 돌씨가 차례차례 깨져나가며 그 소리가 청명하게 울려 퍼진다.

 -또오오옹닌겐!! 저주하는테챠아아앗!!
 -렛츙~♡ 똥닝겐은 와타치에게 메로메로되어 와타치를 잡아먹지 않는렛츙~
 -마마! 구해테치!! 마마의 가장 보배로운 딸이 맛나맛나가 되는테치!!
 -데스아!! 데갸아아아아아악!! 데갸아아아아아악!!
 -데스앗! 데에엥데에엥!
 -똥마마!! 똥마마가 미친 닝겐을 데려온테챠아아앗!!

 딸들의 고통에 찬 비명소리, 닝겐 노예에게 아첨하는 소리, 울며 항의하는 소리, 닝겐 노예를 저주하는 소리, 그리고 마마를 저주하는 소리를 들으며 친실장은 퍼뜩 정신이 든다. 미친 똥노예의 습격이다! 친실장은 황급하게 몸을 일으키려다 다시금 자신을 누르고 있는 제사장 노예의 손아귀를 느끼고는, 계속해서 하늘만 바라보며 기도하는 제사장 노예를 부른다.

 -어이 오마에! 기도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스! 오마에의 똥노예들이 미친데스!! 와타시의 자들이 큰일인데스! 어서 구하는데스! 이 손 놓는데스! 축제는 중지인데스!! 오마에!!

 하지만 무아지경에 빠진 제사장 노예에게 친실장의 명령은 닿지 않는다.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친실장. 곧 제사장 노예의 곁에서 예식을 돕는 다른 노예 둘을 발견하고는 급하게 외친다.

 -오마에들! 뭐하는데스! 미친 닝겐들이 반란을 일으킨데스! 와타시의 귀여운 자들이 죽는데스! 어서 구하는데스! 어이! 안 들리는데스? 똥노예들!!

 새 노예들은 그녀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다는 것도 잊고 계속 소리를 지르는 친실장. 무표정하게 서 있던 두 노예들은 친실장의 고함에 그저 두 눈을 끔뻑끔뻑하더니, 곧 그녀가 자신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다.

 -그래데스! 빨리 와타시의 자들을 구하란읍- 읍읍!

 그러나 두 노예는 친실장의 명에 따르기는커녕, 두 손을 뻗어 친실장을 더욱 단단히 누른다. 한 노예는 친실장의 팔다리를 잡고, 다른 노예는 그녀의 입을 막아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한다. 이제는 읍읍거리는 소리 밖에 낼 수 없는 친실장. 안 돼, 안 돼, 와타시의 자들이! 다급하게 온 몸을 비틀며 고개를 내젓는 친실장의 눈에 더욱 무참한 광경이 비친다.

 세상에서 친실장 다음으로 고귀하고 존엄한 그녀의 딸들이 구워지고 있는 불가로 축제를 벌이던 노예 닝겐들이 모여와 줄지어 서 있다. 잘 구워진 실장석 고기가 앞 사람부터 차례대로 주어진다. 다 커서 독립한 성체는 서너 닝겐에 한 마리씩. 자실장은 한 닝겐에 한 마리씩. 엄지는 어린닝겐에게 두세 마리씩.

 -테히이.....

 완전히 잘 구워져 기름기를 줄줄 떨어뜨리는 자실장. 하지만 아직도 숨이 붙어 고통에 찬 숨을 흘리고 있다. 이미 비명을 지를 기운도, 발버둥 칠 정신력도 없이 그저 아직도 죽지 않는 자신의 질긴 생명력을 저주하고 있을 뿐. 자실장 구이는 한 닝겐 소년에게 건네진다. 닝겐 소년은 군침을 흘리며 그녀를 입가로 가져가 한 입 베어 문다.

 -텟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베어 먹히는 자실장은 검은 눈물을 흘리며 마지막 생명력을 쥐어짜 비명을 지른다. 이곳은 지옥. 지옥이다. 방금 전까지 그녀들은 천국에 있었다. 축제가 끝나고 자신들에게 주어질 구운 꼬기를 기대했다. 하지만 한 순간에 그녀들은 지옥에 떨어졌다. 축제 음식은 그녀들 자신이었다. 모두가, 모두가 미친 닝겐이었다. 이 축제에 모여든 무수한 닝겐 노예들 전부가.

 이 ‘큰 키’인지 뭔지 하는 닝겐들도 분명 와타시타치를 여신으로 섬기겠다고 하지 않았나? 모두 거짓말이었나? 망연자실해진 친실장은 피눈물을 흘리며 제사장 노예를 부르려 고개를 돌렸다. 마침 한참 전부터 하늘만 바라보며 기도하던 제사장도 기도를 마치고는 고개를 내린다. 순간, 친실장과 제사장의 눈이 마주쳤다. 제사장의 눈은 다 늙어빠진 무기력한 똥닝겐의 그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 살기를 내뿜는 노련한 사냥꾼의 눈이었다. 불과 이틀 전, 어둠 속을 뚫고 나오던 하얀 악마들의 그 눈이었다. 그 한 번의 눈 마주침으로 비로소 친실장은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이들은 사냥꾼이었다. 자연이 빚어낸 최악의 폭군들, 조물주가 만들어낸 이 세상의 ‘진짜’ 지배자. 어제 말할 줄 아는 노예가 그녀에게 던졌던 질문이 문득 떠올랐다.

 ‘숲의 여신이 우리의 여신이 된다는 것의 의미는 알고 있나?’

 그 말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이었는지 뒤늦게 깨달은 친실장은 검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소중한 돌씨가 아파왔다.

 -치이이이잇!! 챠아아아아앗!! 살려주는레치!!
 -뜨거테치! 뜨거테치! 불타는테치이이이잇!!
 -먹지마는데스! 와타시 먹지마는데스앗!!

 끝없이 들려오는 딸들의 비명소리. 살아남은 자, 살아남은 자는 없는가? 정녕 모든 자들이 똥닝겐들에게 당해버렸나? 필사적으로 눈을 굴리던 친실장에게 아직 무사한 단 하나의 자실장이 보였다. 유독 시커멓게 윤기나는 가죽옷을 입은 건장한 닝겐의 손에 붙잡혀 적록의 눈물을 흘리며 절규하는 자실장. 하지만 머리카락도 옷도 무사했다. 장녀였다. 장녀만이라도, 장녀만이라도 살려야만 한다. 제사장 노예가 다시 무언가 중얼중얼거린다. 날카로운 돌조각을 두 손으로 모아 쥐고는 하늘 높이 번쩍 들어올린다. 친실장의 입을 막고 있던 노예가 손을 놓더니 이번에는 친실장의 두 손을 붙들어 그녀의 머리 위로 번쩍 들어올린다. 그 덕에 친실장의 입에 찰나의 자유가 주어진다. 친실장은 마지막 숨을 토해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 한껏 고조되던 북소리가 순간 끊어졌다.

 -장녀는 도망치는데수우우우우우!! 살아남는데수우! 하얀 악마와 미친 닝겐을 피해, 반드시 살아남아서, 이 세상을 자로 가득 채우는데수우우우우!! 귀여운 자들을 닝겐에게 보내 메로메로시키게 하는데수우우우!! 그렇게 닝겐들을 노예로 삼아, 노예 군대를 만들어, 똥닝겐들에게 마마의 복수를 하는데수우우우우우!!

 제사장의 손에 하늘 높이 쳐들렸던 흑요석 돌칼이 친실장을 향해 내리꽂혔다.










*참고자료


"...이와 같이, 선사 시대의 호모 사피엔스들의 종교관에서 포식 행위는 단순히 배를 채우는 행위 이상의 것이었다. 어떠한 '힘'을 지닌 사냥감을 포식하는 행위는 그 '힘' 자체를 흡수하는 행위로 여겨졌다. 적어도 40,000년 이전부터 이러한 관념의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가령, 터키 차탈회위크의 선사 유적지에서는 조상의 유골을 집터 아래에 매장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매장되기 이전에 종교적 의식이 행해진 흔적들은 물론 매장 전에 조상의 시신에서 살점을 발라낸 흔적들이 발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원시 시대의 식인행위 조차도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조상의 힘과 지식을 물려받기 위한 '종교적 포식'이었던 것이다......그들은 강인한 힘을 얻기 위해 곰을, 빠른 발을 얻기 위해 말이나 사슴을, 민첩한 움직임을 얻기 위해 살쾡이나 표범을, 재생과 다산의 힘을 얻기 위해 실장석을 포식했다...... 이렇게 신 자체, 혹은 신의 사자나 화신으로 여겨지는 동물을 포식하던 관념은 신앙의 대상이 '태양'이나 '물'과 같이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으로 옮겨짐에 따라 그 신을 상징하는, 혹은 그 신의 축복을 받았거나 그 신의 힘이 깃들었다고 여겨지는 음식을 섭취하는 것으로 변화했다. 가령 메소 아메리카 문명에서는 옥수수에 태양의 힘이 깃든 것으로 여겼으며......시간이 흘러 고등 종교가 출현한 이후에도 이러한 관념의 흔적은 남아 있는데......불교의 공양, 유교의 제사, 조로아스터교나 유대교 등의 번제, 그리스도교의 성찬례 등 상당수의 고등 종교의 제의(祭儀)가 '식사'와 연관되어 있는 것에서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티카 오쉬(Tika Oshi),『원시종교의 제의(祭儀)로서의 '잡아먹기'』, 박철웅 옮김,  서울대학교출판부, 2001, 45~88쪽.-





#14

 장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와타치가 이런 일을 겪어야하는가? 부당했다. 부조리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 세상 전부가 잘못되었다.

 숲 속을 토테토테 걷던 그녀는 발씨를 주무르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멀리 가야하건만, 아직도 어제의 끔찍한 기억이 그녀의 두 다리를 덜덜 떨리게 해 제대로 걷기 힘들었다.

 마마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고귀한 이 세상의 여신이었다. 이 세상 만물이 마마의 소유물이었고, 뭇 닝겐 노예들이 마마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마마의 장녀였다. 마마의 딸들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장녀. 마마의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될, 여신의 적통. 그녀만은 못해도 말 잘 듣고 귀여운 이모토챠들도 있었다. 세상의 중심은 와타치타치, 친자였다. 닝겐 노예들을 부리며 매일매일 구운 꼬기와 신선한 날생선, 알록달록 새콤달콤 과일들을 질리도록 입에 우겨넣었다. 졸리면 자고, 운치가 마려우면 운치를 누었다. 사소한 사고로 이전에 부리던 노예들이 하얀 악마들에게 당해버렸지만, 그녀가 필살의 애교로 더 강하고 쓸모 있는 새 노예들을 메로메로시켰다.
 그런데 닝겐 노예들이 갑자기 미쳤다. 그녀에게 새롭게 메로메로되어 충실한 노예가 되기로 정해져있던 키 큰 닝겐들이 여신을 위한 축제를 열겠다고 하더니, 자매들을 독라로 만들고, 배를 가르고, 운치주머니를 끄집어내고, 불에 구워 구운 꼬기로 만들었다. 그녀가 피눈물을 흘리며 노예들에게 당장 멈추라고 소리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장녀는 급히 전지전능한 마마를 찾았으나- 세상의 여신이었던 마마는 장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친 노예들의 우두머리에게 반으로 갈라져 죽어버렸다. 피눈물을 흘리며 마마와 자매들이 똥닝겐들의 뱃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그녀는 결국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장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숲에 있었다. 아침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살랑살랑 시원했다. 쏴아아- 나뭇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기분 좋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여기는 어디일까. 마마가 말 잘 듣는 자가 되면 죽어서 갈 수 있다고 했던 낙원인가? 기억을 더듬으며 여기저기 조심조심 두리번거리던 장녀는 곧 자신을 지켜보는 거대한 그림자 둘을 발견하고는, 그만 빵콘하고 말았다. 놈들이었다. 똥닝겐들. 마마와 자매들을 죽이고 먹어치운, 증오스러운 일가의 원수들. 놈들이 장녀에게로 고개를 숙여 얼굴을 가까이하자, 장녀는 그들이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똥닝겐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유일하게 말을 할 줄 알던 노예, 그리고 그녀의 세레브한 검은 털가죽을 훔쳐 몸에 걸친 노예. 마마와 자매들의 복수를 위해 주먹을 꼬옥 쥐던 장녀의 머릿속에 마마의 마지막 단말마가 떠올랐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이 세상을 자로 가득 채우는데스! 자들로 닝겐을 메로메로시켜 노예로 만들고, 노예로 군대를 만들어 마마의 복수를 하는데스!’

 마마가 와타시에게 부여한 거룩한 사명. 살아남아서 자로 세상을 가득 채워야만 한다. 여기서 복수를 한답시고 저 두 똥노예를 죽여봤자다. 미친 닝겐들은 저 두 놈 외에도 굉장히 많았다. 저 두 똥노예를 왕주먹으로 쳐죽여도, 다른 똥닝겐들까지 쳐죽이기에는 손이 부족하다. 자들을 많이, 많이 낳아 길러야만 한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닝겐들을 메로메로시켜, 그들로 노예 군대를 만들어야한다. 주먹에 힘을 풀고 복수심을 달래기 위해 애쓰는 장녀. 그런 장녀에게 검은 세레브 털가죽을 입은 똥닝겐이 말할 줄 아는 똥닝겐을 통해 말을 걸었다.

 -!$!^@*(@#
 -여신의 힘은 충분히 받았다.
 -%@#!^@&*%!@&*$
 -네가 구운 고기와 검은 곰 가죽에 가족들과 ‘작은 턱’ 부족을 팔아넘겨 준 덕분이다.
 -$!@^@$*#(#@$%@$#&$*(@#$%@@#!$#^$%&%$^*@#^@&#
 -네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우리가 네 덕을 본 것은 사실이지. 네 덕분에 전쟁을 이기고, 이 숲의 여신의 힘을 얻어 이 숲을 차지했다.
 -#$$@&*&$@%^$
 -그러니 그 공을 보아 너는 살려준다.
 -#@%$#%^&#*#@*(@(~@^@@%*^!@#&^%*$@#%$&^^!*@!@~#!&&**&
 -사냥감을 사냥할 때에도 무리 전체를 전멸시키지 않고 반드시 몇 마리는 살려 보내는 것이 우리 부족의 원칙이기도 하고 말이야.
 -!#$@#$&*^*^@$^!#%@#%*
 -그러니 가라. 가서 살아남고, 어른이 되어 새끼를 잔뜩 낳고 번성해라.
 -....!#&#$(*@@))!$*(@^%!$^&*!%(!^*%*(#@%!
 -....나중에, 우리가 다시 풍요와 다산의 힘을 필요로 하게 될 때 다시 만나자꾸나.

 저 원수 놈들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가. 장녀는 끓어오르는 복수심을 달래기 위해 계속 머릿속으로 마마의 유언만을 되뇌느라, 똥닝겐들이 하는 말을 잘 이해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하나는 알 수 있었다. 그녀를 살려 보내주겠다고 말하는 것. 그렇다면 살아남아주마. 반드시 살아남아서, 마마와 같은 고귀한 여신이 되고, 자들로 이 세상을 가득가득 채우고, 자들을 닝겐에게 보내 닝겐들을 메로메로시키고, 그렇게 모은 닝겐 노예들로 군대를 만들어 네놈들에게 복수해주리라. 오늘 이 순간 와타치를 살려 보내는 것을 대대손손 후회하게 만들어 주리라.

 아침에 있었던 일을 머릿속에 그리던 장녀는 자신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하던 두 원수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마치 원수들의 얼굴을 머릿속에, 소중한 돌씨에 새기려고 하는 듯이. 그렇게 한참동안 의지를 불태우던 장녀는 다리를 두 손으로 토닥토닥 두드리고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똥닝겐들로부터 멀리, 멀리 가서 적당한 보금자리를 찾아야만 한다. 벌떡 일어선 그녀는 마지막으로 가족들과의 추억이 어린 숲의 저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적록의 두 눈으로 그렇게 한참 바라보던 장녀는, 이윽고 몸을 돌려, 반대편으로 끝없이 펼쳐진 숲 속으로 토테토테 걸어갔다.



#Epilogue

 장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와타치가 이런 일을 겪어야하는가? 부당했다. 부조리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 세상 전부가 잘못되었다.

 눈길 속을 토테토테 걷던 그녀는 발씨를 주무르며 자리에 주저앉는다. 한 발자국이라도 더 멀리 가야하건만, 아직도 어제의 끔찍한 기억이 그녀의 두 다리를 덜덜 떨리게 해 제대로 걷기 힘들었다.

 마마는 누구보다도 강하고 고귀한 이 세상의 여신이었다. 이 세상 만물이 마마의 소유물이었고, 뭇 닝겐 노예들이 마마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마마의 장녀였다. 마마의 딸들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장녀. 마마의 모든 것을 물려받게 될, 여신의 적통. ‘실험체 C-1’이라는 세레브한 이름도 있었다. 그녀만은 못해도 말 잘 듣고 귀여운 이모토챠들도 있었다. 세상의 중심은 와타치타치, 친자였다. 닝겐 노예들을 부리며 매일매일 스테이크와 스시, 알록달록 푸드와 새콤달콤 별사탕들을 질리도록 입에 우겨넣었다. 졸리면 자고, 운치가 마려우면 운치를 누었다. ‘대학원생’이니 ‘조교’니 하는 쓸모 있는 노예들이 그녀들을 극진히 시중들었다.
 그런데 닝겐 노예들이 갑자기 미쳤다. 그녀에게 메로메로되어 충실한 노예가 되기로 정해져있던 닝겐들이 ‘외부 자극에 의한 실장석의 위석 본능 교정, 혹은 억제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라는 걸 한다고 하더니, 자매들을 차례차례 독라로 만들고, 손발에 송곳을 꽂고, 찌릿찌릿씨와 화끈화끈씨로 지지기 시작했다. 그녀가 피눈물을 흘리며 노예들에게 당장 멈추라고 소리쳤으나 소용이 없었다. 장녀는 급히 전지전능한 마마를 찾았으나- 세상의 여신이었던 마마는 장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미친 노예의 우두머리들에게 더욱 끔찍한 고문을 당하고 있었다. 피눈물을 흘리며 마마와 자매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것을 지켜보던 그녀는 결국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었다.

 그리고 그날 밤, 장녀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케이지 안에 있었다. 노예들이 그녀들을 외출시켜 줄 때 사용하던 익숙한 가마였다. 그녀는 조심조심 케이지의 문을 밀어보았다. ‘조교’ 노예들이 실수라도 한 것일까, 문이 열려있었다. 케이지에서 나온 장녀는 가장 먼저 마마와 자매들을 구출하려했다. 하지만 그 순간, 소중한 돌씨에서 마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반드시 살아남아서, 이 세상을 자로 가득 채우는데스! 자들로 닝겐을 메로메로시켜 노예로 만들고, 노예로 군대를 만들어 마마의 복수를 하는데스!’

 마마가 와타시에게 부여한 거룩한 사명. 도망쳐야한다. 살아남아서 자로 세상을 가득 채워야만 한다. 여기서 복수를 한답시고 저 똥노예 한두 놈을 죽여 봤자이다. 미친 닝겐들은 이 놈들 외에도 굉장히 많다. 저 똥노예 몇 놈 정도를 핵주먹으로 쳐죽여도, 다른 똥닝겐들까지 쳐죽이기에는 손이 부족하다. 자들을 많이, 많이 낳아 길러야만 한다. 이 세상의 다른 모든 닝겐들을 메로메로시켜, 그들로 노예 군대를 만들어야한다. 주먹에 힘을 풀고 복수심을 달래기 위해 애쓰는 장녀.
 살아남아주마. 반드시 살아남아서, 마마와 같은 고귀한 여신이 되고, 자들로 이 세상을 가득가득 채우고, 자들을 닝겐에게 보내 닝겐들을 메로메로시키고, 그렇게 모은 닝겐 노예들로 군대를 만들어 네놈들에게 복수해주리라. 오늘 이 순간 와타치를 살려 보내는 것을 대대손손 후회하게 만들어 주리라..... 똥닝겐들의 눈을 피해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건물 밖으로 도망치며 장녀는 굳게 다짐했다.

 한참 생각에 잠겨 있던 장녀는 몰려오는 추위에 몸을 떨며 정신을 차렸다. 캄캄한 밤하늘에서 하얀 눈씨가 떨어지고 있었다. 춥다. 이대로 눈길을 걸어가다간 얼어 죽어버린다. 일단 오늘 밤만이라도 얼어 죽지 않고 보낼 수 있는 따스한 곳을 찾아야한다.
 주위를 둘러보던 장녀의 눈에, 길 한편에 수북하게 자라난 덤불이 보였다. 다소 좁긴 했지만, 장녀 혼자 들어가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녀가 서둘러 덤불로 기어들어가 웅크리고 앉자 추위가 조금은 잦아들었다. 장녀는 두 무릎을 꼬옥 껴안고 무릎 사이에 머리를 묻었다. 추워, 추워. 마마, 와타치는 어떻게 해야해? 어떻게 해야 살아남아 어른이 되고, 세상을 자로 가득 채워?

 그 순간, 그녀의 눈앞에 마마가 나타났다. 고급진 모피를 몸에 두르고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마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세레브해 보였다. 자매들도 보였다. 스테이크와 스시, 알록달록 과일의 산에 둘러싸여 텟테로게~ 노래하고 춤을 추는 자매들. 모피옷을 몸에 두른 닝겐 노예들이 마마와 자매들의 시중을 든다. 너무도 익숙하고도 당연한 광경. 아아, 이것이 정상이다. 어쩐지 무언가 이상하다 했다. 만물의 주인, 이 세상의 지고한 여신인 와타치타치가 그런 끔찍한 일을 당할 리가 없다. 그것은 꿈이었다. 그저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악몽을 꾸었을 뿐이다. 마마와 자매들이 장녀를 향해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든다. ‘테에엥.... 마마, 악몽을 꾼 테치.’ 장녀는 마마에게 달려가 안긴다. 마마는 그녀에게 착한아이를 해주며 따스하게 어른다. ‘장녀는 아직도 아기인데스.... 어쩔 수 없는데스. 오늘 밤은 마마와 함께 자는데스. 보에보에....’ 자매들도 하나둘 장녀에게 다가와 그녀를 안아준다. 가족들의 품이 따스하다. 졸리다. 몸이 나른해지며 잠이 쏟아진다. 괜찮아.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을 거야. 모두 끔찍한 악몽이었을 뿐이니까.

 그렇게, 장녀는 파랗게 얼어가는 몸을 끌어안고 몽롱한 정신에 스스로를 맡기며 소중한 돌씨가 보여주는 ‘시원(始原)의 기억’을 노래했다.

 -테프프픗..... 와타치는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인텟치~ 세상의 여신인텟치~ 모두가 와타시를 숭배하는 텟치~~ 닝겐 노예들을 잔뜩 거느린텟치~ 와타치야말로, 세상의 중심인텟치~ 텟테로게~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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