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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받은 자 1~3 (완)

 


어둠 속에 잠겨있는 의식을 깨운 것은 처음 듣지만, 왠지 따스함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 ~로게 ~  -

' 레후? '

자신이라는 존재를 자각한 작은 한 마리의 저실장은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에 점차 익숙해지자, 주변에 그 저실장만이 아닌 수많은 저실장들이 둥근 막에 싸인 채 잠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잠에서 깬 이 저실장과 같이 이미 눈을 뜬 몇몇 저실장은 눈을 뜨고 주변을 살펴보는데 정신이 없었다. 그때, 그들을 잠에서 깨운 그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 뎃데로게~ 뎃데로게~ 자들은 어서 나오는데스~ 마마는 자들이 보고싶은데스~ -

' 마마? '

' 마마인레후? '

' 우지챠도 마마를 얼른 보고 싶은레후! '

친실장의 태교에 반응하여 하나둘 깨어나는 저실장. 잘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을 파닥거리며 흥분한 저실장들에게 다시 한번 태교의 노래가 들렸다.

- 밖의 세상은 험난한데스~ -

- 위험한 동물도, 위험한 닝겐도 가득한데스~ -

- 자들은 항상 조심해야 하는데스~ -

' 레후? '

' 밖은 위험한레후? '

' 그런데 조심이 뭐인레후? '

한시라도 빨리 세상의 빛을 보고 싶은 저실장들의 소망에 찬물을 끼얹는 태교. 기대했던 따뜻한 말이 아닌 냉혹한 현실을 알려주는 친실장의 노래에 저실장들은 혼란에 빠졌다.

' 이런 세상에서 우지챠는 살 수 없는레후! '

- 파킨 -

한 저실장이 위석을 자괴해서 자신의 삶을 포기했다. 그러나 형태가 저실장일 뿐, 태내의 저실장들은 사실은 저실장조차 되지 못한 갓 태어난 태실장에 불과했다. 선천적 저실장과는 달리 자실장이나 엄지실장으로 자랄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친실장의 배 밖으로 나가서 태어나야 완성되는 것. 아직은 그 저실장만도 못한 지능과 감성으로는 자매의 죽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덤덤히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사지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엄지실장이나 자실장의 형태를 갖춘 상태였더라도, 완성되지 않은 지능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을 보듯이 그저 고개를 갸웃거렸을 것이다.
죽은 태실장을 감싸던 막은 곧 물에 녹듯이 스르르 벗겨져 몸의 보호 기능을 정지했고, 태실장의 유해는 이내 친실장의 분대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자들의 반응을 살피듯이 잠시 끊어졌던 친실장의 태교가 다시 이어졌다.

- 뎃데로게~ 뎃데로게~ 자들은 어서 나오는데스~ -

- 닝겐들은 위험한데스~ -

- 학대파 닝겐들은 자들을 때리고 학대하는데스~ -

- 학살파 닝겐들은 자들을 햣-하! 하는데스~ -

' 닝겐도 위험한레후? 마마가 우지챠를 못 지키는레후? '

' 레훼에에엥 무서운 말은 그만두는레후 '

' 마마는 우지챠가 싫은레후? 왜 자꾸 무서운 말만 하는레후? '

' 마마 미운레후! 우지챠는 다른 마마의 자가 되는레후! '

- 파킨 -

계속되는 비관적인 태교에 태실장들은 울상을 지었다. 이번에도 태교가 알려주는 현실을 거부하고 한 마리가 자신의 삶을 마쳤다. 그러나 같은 상황에서도 받아들이는 태도는 서로 다른 법. 계속되는 태교에 좌절한 태실장들도 있었지만, 마마가 자신들을 괴롭히기 위해 잉태한 게 아닐 거라 믿고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 태실장들도 있었다. 이윽고 친실장의 노래는 마지막에 접어들었다.

- 뎃데로게~ 뎃데로게~ 자들은 어서 나오는데스~ -

- 구더기쨩은 쓸모없는데스~ 세상은 구더기쨩에게 위험한데스~ -

- 그러니 무럭무럭 자라 자실장으로 태어나는데스~ -

- 뎃데로게~ 뎃데로게~ -

친실장으로부터 태교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조용해진 친실장의 뱃속에서 태실장들은 각자의 생각을 중얼거렸다.


' 손발 긴긴씨가 되는레후... '

' 힘내서 마마한테 칭찬받는레후! '

' 밖은 무서운레후. 하지만 마마를 보고 싶은레후 '

친실장이 들려주는 태교의 노래를 듣는 잠깐의 순간조차 빈약한 체력을 가진 태실장들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다. 이미 지친 태실장들은 친실장이 불러준 태교의 노래를 상기하며 몸을 둥그렇게 말고는 고된 피로를 풀기 위해 잠을 청했다.
작은 저실장도 몸을 둥글게 말고는 눈을 감았다. 고요해진 친실장의 태내에는 잠든 태실장들이 작게 코를 고는 소리만이 들렸다. 
그러나 태실장들은 결코 쉬지 않았다. 그들의 의식은 이미 꿈나라로 떠났지만, 태실장들의 위석은 태교의 노래를 듣고 주인이 품은 그 소망을 이루기 위하여 빛을 발하며 모체인 친실장으로부터 영양분을 게걸스럽게 빨아들였다.


- 뎃데로게~ 뎃데로게 -

' 죽어라 하고 노력했는데도 더 이상 크지 않는레치.. 마마에게 미움받느니 차라리 지금 죽어버리는레치! '

- 파킨 -

몇일의 시간이 흘렀다. 태실장들은 반복되는 친실장의 노래를 들으며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반복되는 태교의 노래에 적지 않은 수의 자들이 스스로 자괴하여 목숨을 끊었지만, 여전히 많은 태실장이 뱃속에 남아있었다.
태실장들은 많이 자라있었다. 스스로 영양분을 흡수한 만큼 성장한 그들의 대다수는 저실장의 태를 벗고 엄지실장이나 자실장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실장들의 일과는 변한 게 없었다. 처음보다 월등히 성장한 체력으로 태교의 노래가 끝나고도 한참은 깨어 있을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없는 친실장의 몸속에서 출산의 때를 기다리며 무료하게 앉아있다가 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간혹 일어나 친실장의 체내를 걸어 다니며 구경하는 자도 있었지만, 태실장들이 머무는 공간은 작은 태실장의 몸으로도 금세 둘러볼 수 있을 만큼 넓지 않은 공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친실장의 넓은 체내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는 육벽을 앉아서 노려볼 뿐이었다. 
물어뜯어서라도 나가고 싶을 정도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실 태실장들의 부실한 치아와 치악력으로는 친실장의 육벽에 흠집을 내기도 힘들 것이다. 그리고 아직 영특함과는 거리가 먼 태실장들의 사고로도 저 육벽이 없다면 자신들의 목숨도 위험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안전을 대가로 그들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한창 자라고 있는 태실장들이 항상 안전한 것은 아니다. 위험은 늘 외부에서만 오지는 않기 때문이다.
분충성. 실장석이 깨어난 순간부터 숨을 거두는 그 순간까지도 지겹게 따라다니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그 저주받을 품성. 그 분충성은 태실장이라고 해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다. 다른 자실장들 보다도 신발 하나정도는 더 큰 한 자실장의 위석은 이미 그 분충성을 듬뿍 받아들였다. 남들보다 앞서는 그 덩치를 기반으로 다른 자매들을 괴롭히는 그 분충의 오늘의 목표는 엄지실장인듯 하였다. 이미 한 엄지실장의 앞에 서 있는 그 분충은 손으로 엄지실장을 콕콕 찔러대며 울먹이는 엄지실장을 비웃었다.

' 치프픗, 아직도 엄지밖에 안되는테치? 오마에는 마마의 자가 될 자격이 없는테치!

' 레에엥! 그만 괴롭히는레치! 같은 자매인데 왜 자꾸 아타찌를 못살게 구는레치! '

사육실장이던지 들실장이던지 분충성이 그렇게나 골치 아픈 이유는 자신보다 약한 개체에 대한 멸시도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같은 자실장도 덩치의 비교우위를 통해서 우월함을 느끼는 분충의 생각으로는 비록 자매이기는 하나 엄지밖에 못 되는 녀석이 자신과 동등하다고 말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험악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그 뭉툭한 손에 힘을 꽉 준 분충 자실장은 자신의 폭력성을 엄지에게 거침없이 드러내었다.

' 오마에같은 패배자가 와타치랑 똑같다고 생각하는테치? 이런 모욕은 참을수 없는테치! 오마에는 지금 죽는테치! '

' 레챠아앗! 그만두는레치! 아픈레치! 마마! 도와주는레치! 마마앗! '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고 자실장에게 두들겨 맞던 엄지는 애타게 자신의 마마를 찾았다. 그러나 엄지의 급박한 도움요청에도 친실장은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친실장을 부르는 엄지의 행동에 잠시 주춤했던 분충 자실장은 이내 씩씩거리며 더욱더 맹렬하게 엄지의 몸을 두들겼다. 비명을 지르는 엄지는 누구한테도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없었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엄지가 느끼는 고통은 스스로가 만든 환상에 불과했다. 물만 있다면 신체 대비 엄청나게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몸을 보호하는 게 바로 점막이다. 그 강도가 완성되는 때는 출산으로 친실장의 체내를 빠져나가는 순간이기에 아직은 완벽하지 않으나, 고작 태어나지도 않은 자실장의 공격으로 해를 입을 만큼 약하지 않다.
하지만 인간들이 소위 카오스 파워라고 부르는 위석의 능력, 비록 그 한도가 너무 보잘것없지만 힘이 닿는 한에서는 현실을 왜곡하기도 하는 그 능력은 고통을 지레짐작한 엄지의 생각에 반응하여 자신의 위석을 자괴하기에는 충분했다. 

' 레... 레에.. 마...마.. '

- 파킨 -

구슬프게 울먹이던 엄지는 결국 자신이 만든 환상을 이겨내지 못하고 위석이 붕괴하였다. 씩씩거리며 엄지를 맹공격하던 분충 자실장은 의기양양해 하며 엄지의 시체를 걷어차고는 주위를 돌아다녔다. 아직 엄지정도 밖에 성장하지 못한 자들은 그 자실장을 두려워하며 머리를 땅에 박고 벌벌 떨었고, 다른 자실장들도 분위기에 압도되어 감히 그 자실장을 쳐다보지도 못하여 분충의 태도는 더 기고만장해졌다. 잔혹한 유희를 마친 분충 자실장은 곧 피로를 풀기 위해 잠을 청했고, 다른 자들도 얼른 출산의 때가 오기를 바라며 두려움 속에서 잠을 청했다.

' ... '

뱃속의 태실장들이 코츄코츄 소리를 내며 모두 잠든 그때, 소동이 있기 전부터 눈을 감고 자는 것처럼 가만히 있던 한 자실장은 눈을 떴다. 친실장의 태교에 깨어난 그 작은 태실장은 어느새 영양분을 흡수해 무럭무럭 자라서 자실장의 형체를 갖춘 것이다.
막 생겨난 처음보다 발달한 지능은 엄지의 죽음에 ' 가엽다 ' 는 생각이 들 정도로 크게 성장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마마는 태교의 노래로 자실장이 돼서 태어나도록 반복해서 강조했다. 엄지가 별일 없이 무사히 태어나더라도 자실장이 되지 못한 엄지를 마마가 곱게 볼 리 없을 것이다. 아직 얼굴도 모르는 마마였지만, 그렇게나 강조하는 걸 보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잠시 엄지의 죽음을 생각하던 자실장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어내고 자신의 목적에 집중하기로 했다. 자신들을 가로막은 벽에 다가가서 쫑긋 솟은 귀를 벽에 밀착시키고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집중했다.

- ~~, ~~~~ 있는테치 -

- ~~~는데스 장녀 -

꽤 오랜시간을 집중하던 자실장의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힐 무렵, 마침내 자실장은 자신이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단지 마마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는 일념하에서 무의미하게 육벽에 귀를 대고 있다가 우연한 발견한 마마의 목소리를 듣는 방법. 이렇게나 듣기 힘드니 아까 엄지가 그렇게나 마마를 불러도 마마가 듣지 못하는 건 무리도 아닐 것이다. 두꺼운 육벽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잡아낸 자실장은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더욱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실장의 몸 안의 위석이 주인이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환한 빛을 발하며 자실장의 영양분을 빠르게 소모하기 시작했다. 비록 자실장은 급격하게 지쳐가고 있었지만, 윙윙거리던 잡음을 모두 걸러내어 외부의 목소리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었다.

- 이번에 태어나는 이모우토챠들은 와타치들이 들었던 노래와는 다른걸 듣고 있는테치? -

- 그런데스. 항상 같은 노래를 하는게 아니라 상황에 따라 다른 노래를 하는게 좋은 자를 낳는데 도움이 되는데스. -

- 그렇지만 그렇게 엄격하게 태교하면 태어날 이모우토챠들이 많이 줄지 않는테치? 그리고 왜 자실장만 태어나라고 태교하는테치? -

- 장녀를 뱃속에 품었을 때는 기르던 자가 독립한 뒤여서 많은 자를 기를 여유가 있었고, 와타시도 자가 독립해서 생긴 외로움을 새로 태어나는 자들이 채워주길 바랬기에 스스로 꽃을 따서 임신한데스. 설령 자가 구더기라고 해도 와타시는 신경쓰지 않았던데스. - 

- 하지만 이번의 임신은 다른데스. 그저 와타시가 부지런히 돌아다니다가 꽃가루가 들어가 우연히 임신한 것에 불과한데스. 그리고 장녀, 이제 곧 겨울이 찾아오는데스. 마마가 아무리 보살펴도 약한 자들은 추운 날씨을 견디지 못하고 파킨하는데스. 아무리 엄지쨩이나 구더기쨩이 사랑스러워도 죽을 가능성이 높은 자들을 마마의 욕심때문에 낳으면 안되는데스. -

- 테에에... 그래도 이모우토챠가 많으면 좋겠는테치. 팔녀쨩도 드디어 이모우토챠가 생긴다고 기대하고 있는테치. -  

- 팔녀의 심정은 마마도 이해하는데스. 그렇지만 이것도 자들에게 와타시가 가르치는 수업이라고 생각하는데스. - 


- 수업인테치? -

-  마마는 자들이 앞으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잘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데스. 지금 와타시가 기르고 있는 자의 숫자만 해도 왠만한 친실장이라면 보존식을 모으기는커녕 매 끼니를 먹여 살리기도 버거운데스. -

- 솔직히 마마는 이번에 태어나는 자들 전부를 길러도 여유가 있다고 자신하는데스. 하지만 그건 마마가 보스여서 그런데스. -

- 잘듣는데스. 장녀가 독립한다고 해도 분명히 와타시의 자인데스. 하지만 그때가 되면 장녀는 와타시의 보호를 받는 자가 아니라 장녀가 가질 자들을 부양해야 할 책임을 가진 마마가 되는데스. 보스의 자인 장녀는 다른 실장들이 함부로 건드리지 못하겠지만, 딱 거기까지인데스. 장녀가 앞으로 필요한 식량, 물건, 보온재 어떤 것을 모을 때도 장녀는 혜택을 받지 못하는데스. -

-  마마는 장녀가 무리하게 자를 많이 기르다가 일가실각당하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으면 하는데스. 언제나 스스로 부양할 수 있는 자의 수보다 적게 길러야 갑작스러운 상황에서도 일가실각을 피하는데스. 꼭 기억하는데스. -


- 테에... 알겠는테치. 그럼 마마는 이번에 이모우토챠를 몇이나 낳길 바라는테치? -

- 하나인데스. 그보다 더 많이 기르지 않는데스. -

그 말을 끝으로 목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자실장은 자매들이 모여서 잠을 청하는 곳으로 가서 땀으로 범벅이 된 몸을 뉘었다. 옆에서 잠들어 있는 자매들은 꿈속에서 밝은 미래를 상상하며 배시시 웃고 있지만 그들의 장래는 밝지 않았다. 
오직 하나. 수많은 자매 중에서 단 하나의 자만이 마마의 자로 인정받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는 반드시 자신이 되어야 한다. 마음을 무겁게 하는 현실을 생각하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고민하던 자실장은 다가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하고 잠에 빠졌다.


수일의 시간이 흘렀다. 공포로 가득할 것 같던 친실장의 태내는 의외로 평온하였다. 다른 자들을 괴롭히며 으스대던 분충 자실장은 더는 같은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지 가만히 누워 있었고, 분충의 눈치를 보던 자들은 분충이 더는 자신들을 괴롭히지 않자 자신과 마음이 맞는 다른 자매들과 분충이 있는 곳 멀리에서 삼삼오오 모여서 놀고 있었다.
분충 자실장만이 외톨이였던 것은 아니었다. 친실장의 대화를 엿듣던 자실장도 홀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그날 이후 늘 벽 앞에 벽에 머리를 기대고 앉아있는 그 자실장에게 처음에는 관심을 표하던 다른 자매들도, 대답도 없이 늘 벽에서 떨어지지 않는 자실장에게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제각기 무료한 시간을 보내던 자들. 눈을 감고 벽에 기대 있던 자실장은 미세하게 느껴지는 진동에 몸을 돌려 벽을 바라보았다.
자실장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시선을 돌린 몇몇 자들이 아무런 변화도 없자 다시 흥미를 잃고 자신들이 하던 놀이에 집중하려는 찰나, 모든 자들이 느낄 수 있을 만큼의 커다란 진동이 울렸다.
한곳으로 뭉쳐서 불안한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자들의 눈에 여전히 벽 앞에서 꼼짝도 않고 있는 자실장의 모습이 비쳤다.
한 자실장이 위험하니 이리로 오라고 말을 하던 순간, 벽에 있는 자실장 앞의 육벽이 꿀렁거리며 움직이더니 큰 구멍을 만들어냈다.


모든 자들의 시선이 벽을 향했다. 도저히 열릴것 같지 않던 벽이 드디어 열렸다. 육벽에 난 구멍을 채운 투명한 뿌연 막이 덧씌워져 있었으며, 그 너머로 보이는 것은 어두운 친실장의 체내와 저 아래에서 빛이 보이는 유일한 구멍이었다. 벽 앞의 자실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구멍으로 발걸음을 옮기려던 때, 누군가 뒤에서 잡아당기는 느낌을 받으며 뒤로 넘어졌다.

' 테칫! '

' 와타치가 1등인테챳! 장녀는 고귀한 와타치의 몫인게 당연한테치! '

단지 제일 먼저 나가겠다는 이유로 벽 앞의 자실장을 뒤로 당겨 넘어뜨린 분충 자실장은 가장 먼저 육벽을 빠져나갔다. 다른 자매들도 뒤늦게 출산의 때가 되었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나 달리자, 넘어진 자실장도 급히 일어나서 벽에 있는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구멍을 통과하는 자실장의 몸을 감싼 투명한 막은 자실장을 보호하던 막과 합쳐져 평상시보다 끈적끈적하고 더 튼튼한 하나의 점막으로 완성되었다. 자실장의 체적보다 넓게 주위를 감싼 점막은 낙하속도를 크게 줄여서 친실장의 분대 끝에 멈추게 했다.
엄청난 낙하속도에 눈을 감았던 벽 앞의 자실장이 멈춘 것을 깨닫고 눈을 뜨자, 먼저 나갔던 분충 자실장이 자신과 같이 분대의 끝에 머물러있다가 빛이 들어오는 구멍으로 빨려들어가듯이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도 그 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자신의 눈을 덮어오는 환한 빛을 받으면서 친실장의 체내에서 나가고 있음을 깨달은 자실장은 본능을 따라 크게 외쳤다.

" 텟테레~! "

- 첨벙 -

세상의 빛을 보았다는 환희로 가득 차 본능적인 기쁨을 표현한 것도 잠시, 자실장은 자신이 두 번째로 태어났음을 깨닫고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차라리 마마가 순서도 잘 모르는 바보였으면... 그러나 여태까지 엿들은 대화를 생각하면 그럴 가능성은 없었다. 만약 분충이 자로 인정받는다면 두번째로 태어난 자신은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버림받을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어쩔 줄 모르던 자실장은 자신의 얼굴을 감싼 점막을 혀로 핥아서 제거하기 시작했다. 자실장이 얼굴의 점막을 제거하느라 분투하는 사이, 친실장은 어느새 몸에 품고 있던 자들을 전부 내보내는 데 성공했다.

" 데에... 사랑스러운 자가 태어난 데스우♡ "


잠시 변기 안에 떨어진 새로 태어난 자들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친실장은 곧 신중한 얼굴로 가장 먼저 태어난 자를 집었다.

"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와타치가 태어난테치! 어서 점막을 핥아주는테치! 

누가 들어도 분충인 게 분명한 발언을 내뱉는 분충 자실장. 태어난 동생들을 두근거리며 지켜보던 기존 친실장의 자들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이미 행복회로를 돌리고 있는지 스시 스테이크를 중얼거리며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뜬 자실장의 얼굴을 무표정하게 내려보던 친실장은 손에 든 자실장을 한편에 놓아둔 비닐봉투에 떨어뜨렸다. 이미 충격을 한차례 흡수해 재기능을 하지 못하는 점막은 낙하된 충격에서 주인을 보호할 수 없었고, 갓 태어난 자실장의 두 다리는 그 충격을 버티기엔 너무나 연약했다.

" 테갸아악! "

처음 겪는 고통에 빵콘하며 눈물을 글썽이던 분충 자실장은 이내 얼굴에 노기를 드러내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 똥마마 미친테치? 세레브한 와타치에게 이런 대접을 하다니 고귀한 와타치를 낳아준 공이 있는 마마라도 용서가 안 되는테치! 스스로 독라가 되어서 절을 해야 용서해주는테치! 그리고 와타치가 먹을 스시와 스테이크는 어디있는테치? 얼른 가져오는테챠앗! "

두 다리가 부러진 채 봉투 안에서 몸을 굴리며 발광하는 분충을 냉랭한 시선으로 보던 친실장은 고개를 돌렸다. 자를 낳은 순서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친실장은 혼자서 점막을 떼어내느라 낑낑대던 두 번째로 태어난 자실장을 손으로 집었다.
자실장의 마음에 떠오른 감정은 안도감보다는 다급함이었다. 운 좋게 분충이 선택되지 못하고 기회가 자신에게 돌아왔지만, 만약 자신도 마마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저렇게 가차 없이 버려질지 모른다. 그리고 서서히 몸을 압박해오는 점막의 무게감이 한층 더 자실장의 마음을 조급하게 했다. 다급해진 자실장은 태어나기 전 어떻게 하면 친실장에게 좋은 인상을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며 고른 많은 인사말을 모두 잊어버리고 그저 본능에 따라 말을 뱉었다.

" 마마! 얼른 할짝할짝해주는테치! 혼자서는 혀 근처밖에 핥을 수 없는테치! "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만 보는 친실장.  긴장감에 자실장의 심장이 터질 듯이 뛸 때가 돼서야 친실장은 혀를 내밀어 자실장의 점막을 핥아주기 시작했다. 모든 긴장감이 풀리며 안도한 자실장은 뒤늦게야 친실장의 주변에서 자신을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언니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특히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가장 작은 자실장의 눈은 유달리 반짝거렸다.
한편, 아무것도 모르고 친실장이 점막을 떼어주겠거니 생각하다가 점막이 단단해지며 몸을 압박할 쯤이 돼서야 뭔가 잘못된 것을 깨달은 새로 태어난 자들은 얼굴이 흙빛이 되어 날뛰기 시작했다.

" 마마! 점막을 취해주는테치! 와타치 이대로는 구더기쨩이 되어 버리는테치! "

" 오네챠타치는 뭘 구경하고 있는테치! 사랑스러운 이모우토가 구더기쨩이 되어버려도 좋은테치? 얼른 점막을 핥아주는테치! "

애타게 도움을 요청하는 동생들의 모습에 움찔거리며 몸을 숙이던 자실장들을 팔을 뻗어서 멈추게 한 것은 친실장이었다. 고개를 단호하게 젓는 친실장의 모습에 친실장의 자들은 피눈물을 흘리는 동생들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 태어난 자들이 아무리 애달프게 도움을 요청하여도 어느 누구도 도와주지 않고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국 서서히 경화되던 점막은 시간이 지나도 제거되지 않자, 자들을 체내에 있는 것으로 간주하고 막의 재생을 위해 보호하고 있던 자들의 신체를 다시 구더기의 상태로 되돌리기 시작했다.

" 구더기쨩이 되기 싫은테치! 얼른도와주는테챠아... 레후? 뭔가 싫었던게 있었던레후? "

" 레에엥! 마마가 아타치를 버린레치! 레에엥! 레에...레후? 마마가 여럿인레후? 누가 우지챠의 마마인레후? "

" 마마! 손씨와 발씨가 녹는테치! 싫은테치! 시.... 시끄러운레후. 나쁜 구더기들은 무시하고 우지챠한테 프니프니 해주는레후~ "

결국 친실장이 점막을 핥아준 자실장을 제외한 다른 자매들은 모두 구더기가 되었다. 분충이 날뛰던 봉투도 어느새 잠잠해져서 ' 레후 ' 하는 소리만 들리고 있었다. 친실장은 자신의 손에서 주위를 호기심을 가지고 둘러보고 있는 자실장에게 말했다.

" 이제부터 오마에는 구녀인데스. 구녀는 막내이니 언니들의 말을 잘 따르는데스. "

" 알겠는테치! "

친실장은 손 안의 구녀를 땅에 내려주며 다른 자들에게 말했다.

" 자들도 잘 본데스? 마마가 태교로 자들의 수를 많이 줄였는데도 이렇게나 자들이 많이 태어난데스. 그러니 태어난 자들을 전부 기른다는 건 말아 안되는 소리라는 걸 가슴에 새기는데스. 중요한 일이니 자들이 마마가 되더라도 잊지 않는데스. "

" 특히 아까 본 분충의 행동을 기억하는데스. 자를 가지는 건 행복한 일이지만, 저렇게 완벽한 분충은 가르쳐도 듣지 않고 일가실각이나 부르는 패망의 지름길인데스. 절대로 키우면 안 되니 결코 잊지마는데스. "

" 알겠는테치! x9 "

" 이제 서두르는데스. 날이 많이 어두워져서 학대파 닝겐이라도 만난다면 일가실각당하는데스. "

말을 마친 친실장은 변기에서 일어나 구더기가 된 자들을 봉투에 휙휙 담았다.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아 울던 저실장들은 봉투에 떨어진 충격으로 ' 레뺫 ' 하는 짧은 비명을 질렀다. 봉투를 어깨에 멘 친실장은 문을 살며시 열고 주위를 살펴보더니 이상이 없음이 확인되자 문을 열고 밖으로 향했다. 친실장의 자들도 걸어가는 친실장의 뒤를 쪼르르 쫓아갔다. 


자신의 손을 잡아 이끄는 팔녀를 따라가는 구녀의 눈에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아까 태어났을 때 처음 보는 풍경, 저 도저히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천장과 커다란 마마와 자신을 바라 보는 언니들도 엄청 컸지만 화장실 밖의 세상은 화장실 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만큼 크고 넓었다. 길가에 나있는 이름도 모르는 잡초, 곳곳에 배치된 의자, 부지런히 공원을 돌아다니고 있는 자신과 닮은 많은 동족들... 바라보는 눈에 호기심이 깃들때 마다 잠시 멈춰서는 구녀를 앞에서 이끄는 팔녀는 몇 번이고 다독여야 했다.

" 구녀챠 서둘러야되는테치. 깜깜한 밤이 되면 무서운 학대파 닝겐이랑 마주칠 수도 있는테치. 궁금한 건 집에서 말해줄 테니 얼른 따라오는테치. "

구녀는 순순히 팔녀의 말을 따랐지만, 잠깐의 실랑이가 있는 시간조차 나머지 가족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는 가족들을 쫒아가기 위해 팔녀와 구녀는 수시로 달려야만 했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던 노을도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별도 하나둘 보이는 하늘을 보며 친실장과 자들은 발걸음을 더 서둘렀다.
선두의 쌩쌩한 친실장과는 달리 자들의 얼굴은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특히 갓 태어난 구녀는 땀에 절어 완전히 지쳐있었다. 

" 테헥....테헥...테히.. 테히이... "

" 구녀챠 좀만 참는테치. 집에 거의 다 온테치. 집에 가면 안전하게 쉴 수 있는테치. "

앞에서 다독이는 팔녀의 말에도, 지친 구녀는 대답할 힘도 없어 바닥에 들러붙은 것 같이 떨어지지 않는 발을 간신히 떼어 옮겼다.
선두에 걸어가던 친실장이 걸음을 멈췄다. 갓 태어난 구녀가 지친 것은 그럴 수도 있겠지만, 봄에 태어났던 장녀도 내색은 하지 않고 있으나 점차 숨결이 거칠어지고 있었다. 너무 늦게 집을 나섰기 때문에 서둘러야 했던 게 자들에겐 부담이 큰 모양이었다.

" 어쩔 수 없는데스. "

뒤돌아선 친실장은 멈춰 선 자들을 지나쳐 제자리에 주저앉아 숨을 몰아쉬는 구녀와 그런 구녀를 걱정스럽게 바라보고 있는 팔녀의 앞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돌려 친실장을 바라보는 팔녀와는 달리 구녀는 고개를 숙이고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친실장이 허리를 숙여 구녀를 손으로 안아 들자 힘겹게 고개를 들어 바라보는 구녀. 친실장은 손으로 구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구녀, 미안한데스. 마마가 자들을 너무 독촉했던데스. 지금까지 걸어오느라 수고했으니 마마의 품에 안겨서 가는데스. "

구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몸에 준 힘을 풀며 친실장에게 몸을 기댔다. 가까이서 보니 땀에 범벅이 된 구녀의 모습이 친실장의 눈에 들어왔다. 이렇게 될 때까지 내색하지 않고 따라오다니, 구녀의 몸을 적신 땀을 아랑곳하지 않고 품 안에 꼭 껴안는 친실장이었다.
더 이상 걷지 않아 체력이 조금 회복된 구녀는 친실장의 품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자신의 눈높이에서 보는 세상과 친실장의 품 안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구녀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뒤따라오는 언니들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엄청 커 보이는 언니들은 이제 자신보다 아래에서 부지런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언니들의 얼굴에도 피로가 역력했지만, 마마는 오직 자신만을 품에 안아주었다. 친실장의 따뜻한 품 안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던 구녀는 어느새 스르르 잠에 빠졌다.


" 다 온데스. 이제 눈 뜨는데스. "

친실장의 말에 잠들었던 구녀는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다. 구녀는 주변을 두리번거렸으나 이미 어둠이 깔린 주위를 살펴보기는 힘들었다. 친실장의 손을 잡고 수풀 속 길을 걷던 구녀가 몇 발자국을 떼기도 전에, 작은 공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터의 가운데는 커다란 골판지 상자가 있었다. 작은 자들이 올라가기 쉽도록 발판까지 있는 그 골판지 상자는 친실장과 자매들이 모두 들어가도 될 정도로 넓어 보였다. 골판지 옆에는 컵이 하나 놓여 있었는데, 구녀의 키 보다도 더 커 보였다. 

" 보스, 다녀오신데스? "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말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구녀의 눈에 수풀 근처에 서 있는 왠지 험악해 보이는 한 성체실장이 보였다. 친실장은 그 성체실장에게 다가가서는 고개를 까닥이며 그 인사를 받고는 등을 두드려주었다. 
친실장이 성체실장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자매들을 따라 골판지 앞에 도착한 구녀는 골판지의 윗부분에 휘갈겨진 글씨를 올려다보았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그 글씨를 보면 왠지 구녀의 가슴이 두근두근 뛰는 듯했다. 

자신도 모르게 까치발을 들며 그것을 더 가까이서 보려던 구녀, 그러나 그 글씨는 구녀에게는 까마득히 높은 위치게 있었다. 울상을 지으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다른 언니들은 자리에 앉아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팔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뤄줄 능력이 없는 듯하였다. 발을 동동 굴리며 어떻게든 그 글씨에 닿아보려고 애쓰는 구녀의 행동을 자매들은 피식거리며 바라보고 있었다. 급기야 제자리에서 방방 뛰기까지 하는 구녀의 머리를 무거운 손이 아래로 눌렀다. 구녀가 돌아보니 어느새 뒤에 서있던 친실장이 머리에서 손을 떼면서 앞으로 가더니 골판지의 문을 열어젖히며 구녀를 돌아보았다.

" 여기가 구녀가 살아갈 집인데스. 집에 잘 온데스. "

친실장이 연 문 안으로 다른 자매들이 들어가고도 멍하니 바라보던 구녀의 등을 친실장이 손으로 툭 치자, 정신을 차린 구녀는 도로 밖으로 나온 팔녀의 손에 이끌려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두 자매를 웃으며 보던 친실장도 집 안으로 들어간 뒤 문이 닫혔다.



고된 행군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친실장 일가는 지친 몸을 이끌고 각자의 자리를 찾아서 분주히 움직였다. 
구녀를 손잡고 이끌던 팔녀도, 문을 닫고 뒤이어 들어온 친실장도 구녀를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구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었다. 익숙하게 집 안을 돌아다니는 친실장이나 다른 자매들과는 달리, 구녀는 빛이 거의 없는 골판지의 내부에서 한 걸음도 뗄 수 없었다. 
골판지 내부에 익숙해질 때까지 눈을 계속 깜빡이던 구녀는 어느새 자신의 앞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깨닫고 위를 올려보았다.

그것은 구녀보다 머리가 하나는 더 큰 자실장이었다. 깨끗했지만 온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독라의 자실장. 
구녀와 눈이 마주친 독라 자실장은 고개를 꾸벅 숙이더니 엎드려서 구녀에게 절했다. 
몸을 일으킨 독라 자실장은 혼란해 하는 구녀를 놔두고 손에 쥔 천 조각으로 구녀의 신발과 옷을 정성스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자매에게 물어보려고 주위를 두리번거린 구녀가 깨달은 사실은 독라가 한 마리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미 다른 자매들에게도 독라들이 한 마리씩 달라붙어서 옷과 신발을 닦고 있었고, 친실장에게는 다른 독라들보다 확연하게 큰 자실장 한마리가 낑낑대며 천을 문지르고 있었다. 그리고 가족들도 당연하다는 듯이 독라들에게 몸을 맡기고 있었다.
다른 자매들이 대답해줄 때까지 기다릴 수 없었던 구녀는 자신을 깨끗하게 닦아주고 있는 독라에게 물어보았다.

" 오네챠는 누구인테치? 왜 머리가 없는테치? "

구녀의 질문에 움찔하며 손을 멈춘 독라 자실장. 그러나 구녀는 원하는 대답을 들을 수 없었다.
독라는 곧 멈췄던 손을 다시 움직이더니 고개를 더욱 숙인 채 구녀의 몸을 깨끗하게 닦는 일에만 집중했다. 
독라 자실장은 자기 일을 마치고 뒤로 물러날 때까지 구녀와 다시는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풀리지 않는 의문에 답답함을 느끼는 구녀에게 근처에서 독라에게 몸을 맡기던 팔녀가 다가와 입을 열었다.

" 구녀쨩, 이 독라들은 마마의 자가 아닌테치. 우리 가족이 부리는 노예인테치. "

" 노예인테치? 왜 노예가 밖에 나와 있는테치? 노예는 운치굴 안에만 머무르는 거 아니었던테치? "

" 마마는 노예를 많이 부리는테치. 이 노예들은 집 안과 와타치타치를 깨끗하게 닦아주는 노예인테치. 노예들은 마마가 집을 나서기 전에 운치굴에서 나와서 종일 청소를 하다가 마마가 돌아오면 다시 운치굴 안으로 들어가는테치. "

팔녀가 손으로 가르키는 방향에는 과연 팔녀의 말대로 방금까지 자매들을 닦아주던 독라들이 아래로 뚫린 구멍 앞에 줄을 서서 한 마리씩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운치굴에 스스로 들어가는 독라들을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던 구녀는 누군가가 스쳐 지나가는것을 느꼈다. 

그것은 친실장이었다.
운치굴 앞으로 걸어간 친실장은 손에 든 봉투를 거꾸로 쥐고는 구더기가 된 자들을 그 안에 털어 넣었다. 
갑작스럽게 운치에 떨어져 울기 시작한 구더기들에게 운치굴 안의 독라노예들이 달려왔는데, 아까 보았던 깨끗한 노예들과는 달리 운치가 몸의 곳곳에 묻어 지저분해 보였다. 
집안이 떠나가라 울던 구더기들은 독라들이 한 마리씩 정성을 다해서 프니프니를 해주니 곧 울음을 멈추고 조용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구녀는 유달리 자신의 옆에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는 팔녀에게 물어보았다.

"저기는 운치굴 아닌테치? 이모우토챠들을 왜 운치굴에 넣는테치? "

" 운치굴 맞는테치. 앞으로 구녀쨩도 운치는 저기서 보면 되는테치. "

팔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구녀의 귀에 속닥거렸다.

" 이제 이모우토챠들은 잊는테치. 저 구더기들은 평생 저기서 살테니 다시는 이모우토챠라고 부르면 안되는테치. "

" 테? 왜 안되는테치? "

" 마마가 자로 기르는 구더기쨩은 운치굴이 아니라 다른 자매들과 함께 사는테치. 그리고 운치굴 안의 구더기들은 밤에 같은 구더기를 잡아먹는 분충인테치. 마마는 분충을 절대 용서하지 않으니 구녀쨩도 잘 기억하는테치. "

" 알겠는테치! "

사실 구녀는 운치굴로 쫓겨난 같이 태어난 자매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아무것도 몰랐었다면 모를까, 단 한 마리만이 자로 선택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던 상황에서, 다른 자매들은 피를 나눈 혈육이 아니라 단순히 경쟁자에 불과했다. 그저 선택받지 못한 다른 자매들을 왜 저 운치굴 안에 몰아넣었는지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버림받으면 더는 자라기 힘든 구더기로 평생 산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모자라서 아예 운치굴 안에서만 산다는 것은 꽤 충격이었다. 
만약 자신이... 끔찍한 상상을 한 구녀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 오마에타치, 밥시간인데스. 잡담은 그만하고 얼른 이리로 오는데스. "

대화 중이던 두 자매를 부르는 소리. 팔녀와 구녀를 제외한 다른 자들은 이미 친실장의 앞에 횡으로 나란히 서 있었다. 
자신을 내버려둔채 도도도 달려가는 팔녀의 행동에 당황한 구녀는 팔녀를 서둘러서 쫓아야 했다. 
힘차게 달려간 팔녀는 칠녀의 옆자리에, 허겁지겁 팔녀를 쫓아간 구녀는 눈치를 보고 팔녀의 옆에 섰다.

" 아침부터 마마를 돕고 자를 고르는법을 배우느라 지금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배고플텐데 불평도 안하다니 대견한데스. 그러니 평소보다 많이 주는데스. "

환호하는 새끼들의 반응을 뒤로한 친실장은 상자에서 푸드를 잔뜩 꺼내 바닥에 내려놓고 자들에게 분배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민 장녀부터 팔녀의 손에 동일한 양의 푸드를 얹어준 친실장은 다른 자매들을 흉내 내 손을 내밀고 있는 구녀는 무시한 채 팔녀의 앞에서 몸을 돌리더니 상자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 테? "

" 구녀는 이리와서 마마의 밀크를 먹는데스. 마마의 밀크를 먹어야 구녀의 몸이 튼튼해지고 빨리 자라는데스. 그리고 아직 약한 구녀의 이빨로는 푸드를 먹기 힘든데스. "

혹시 자신도 버려진 다른 자매들처럼 차별받는 것인가 긴장했던 구녀는 안도하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구녀가 아장아장 걸어서 친실장에게로 다가가는 동안에 친실장은 자신의 옷을 손으로 들어 올렸다. 
위로 든 옷자락을 겨드랑이에 끼워 고정한 친실장은 구녀를 두 손으로 들어 올려 조심스레 자신의 가슴쪽으로 끌어들였다.

" 얼굴을 너무 가슴에 묻지 않게 조심하는데스 "

이미 젖을 빨고 있는 구녀에게 친실장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무엇인가를 먹는다는 것에 푹 빠졌는지 구녀는 오히려 머리를 더욱 앞으로 들이밀며 열정적으로 친실장의 모유를 빨아들였다. 
고개를 저은 친실장은 한손으로 구녀의 몸을 받치고는 다른 손으로 구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뒤로 밀어서 자세를 교정해주었다.
갓 태어난 자는 언제나 사랑스러웠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친실장은 정신없이 젖을 탐하는 구녀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 구녀는 이번에 태어난 자들 중에서 유일하게 자로 선택받은데스. 버려진 다른 자매들을 기억하라고는 안하는데스. 다만 선택받지 못한 다른 자들의 몫까지 건강하고 똑똑하게 자라줬으면 하는게 마마의 바램인데스. "

' 선택받은 자 '. 다른 말들은 흘려들으며 식사를 하던 구녀의 뇌리에도 깊게 박히는 가슴에 묘한 울림을 만드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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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녀가 빠는 힘이 많이 약해진 것을 느낀 친실장은 구녀를 몸에서 떼서 조심스럽게 땅에 내려놓았다. 
배가 볼록 튀어나온 구녀는 자리에 앉아 자신의 배 위에 손을 얹으며 트림을 했다. 자신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친실장의 손길을 즐기며 눈을 감고 몸을 맡기던 구녀는 문득 눈을 뜨고 다른 자매들을 바라보았다. 
나머지 자매들은 여전히 자신의 몫으로 받은 푸드를 앉아서 열심히 갉아먹고 있었다. 눈에 호기심이 깃든 구녀는 손으로 땅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식사 중인 팔녀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친실장은 상자를 뒤적여 자신의 몫을 꺼냈다.

튀어나온 배를 붙잡고 힘겹게 팔녀에게 도달한 구녀. 하지만 구녀가 옆에서 보고 있는데도 팔녀는 푸드를 먹는 데만 열심이었다. 
팔녀가 먹는 푸드를 뚫어지게 쳐다보던 구녀는 팔녀에게 물어보았다.

" 오네챠 뭘 먹고있는테치? "

" 이건 푸드인테치. 다른 오바상들의 자들은 가끔이나 먹을수 있는 귀중한 것이지만, 와타치타치는 매일 이걸 먹는테치. "

" 푸드는 맛있는테치? "

" 맛있는테치. 너무 맛있어서 한번 먹으면 다른 음식들은 입에도 못댄다고 하는테치. 구녀도 더 자라면 푸드를 먹을수 있는테치. " 

친절하게 대답해주고는 있지만, 팔녀는 여전히 구녀를 쳐다보지도 앉고 식사를 계속했다. 
아까까지는 그렇게나 붙어서 떨어질 생각을 안 했는데 지금은 쳐다보지도 않는 팔녀에게 살짝 심통이 난 구녀는 뾰로통해졌다. 

팔녀가 먹고 있는 저 푸드란 것이 귀여운 동생도 무시할 정도로 맛있는 것일까? 그렇게나 맛있는 거라면, 푸드를 먹어보고 싶다. 
구녀의 그런 생각에 호응했는지 배불러서 잠깐만 움직여도 힘들 정도로 볼록 튀어나왔던 배가 살짝 꺼졌다.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깨달은 구녀는 입에 고인 침을 삼키며 팔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 그렇게 푸드가 맛있는거면 와타치도 조금 주면 안되는테치? "

" 테? "

팔녀는 그제야 먹고 있던 푸드를 내려놓고 구녀를 보았다. 구녀의 시선은 분명히 자신이 내려놓은 푸드를 쫓고 있었다. 
혹시나 밥이 부족했을까? 아니었다. 혼자서 친실장의 젖을 독식한 구녀의 배는 눈에 띄게 볼록 튀어나와 있었다. 
곤란한 일이었다. 친실장은 아무리 어린 자라도 분충 짓을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눈으로 흘끔 보니 아니나 다를까, 친실장은 푸드를 먹으면서 정확히 이쪽을 보고 있었다.

' 이모우토챠가 마마한테 크게 혼날지도 모르는테치 '

어떻게든 구녀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며 팔녀는 좀처럼 대답을 하지 않았다. 
조급해진 것은 구녀였다. 자신이 부탁했는데도 망설이는 팔녀의 모습에 더욱 푸드에 집착하게 된 구녀는 오른뺨에 손을 갖다 댔다.

" 오네챠는 귀여운 이모우토챠에게 맛있는 푸드를 나눠주는텟츙♡ "

" 와타치가 마마한테 허락을 받아보는테치. "

그렇게나 동생이 가지고 싶었던 팔녀는 그만 구녀의 애교에 껌벅 넘어가고 말았다. 
마마한테 혼날지 몰라도, 자신에게 의지해오는 유일한 동생인 구녀에게 무엇이라도 해주고 싶었다. 
쭈뼛거리며 친실장에게 다가간 팔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 마마, 이모우토챠도 푸드가 먹고싶은것 같은테치. 마마가 허락해주시면 와타치의 몫을 좀 나눠주고 싶은테치. "



' 마음에 들지 않는데스 '

저쪽에서 눈을 빛내며 팔녀와 자신을 주시하는 구녀의 모습을 본 친실장의 미간에 주름이 살짝 잡혔다. 
나눠 먹을 자매도 없었으니 젖이 부족할 리 없었다. 그리고 푸드를 아직 먹지 못하는데도 언니들의 밥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부탁하지도 않고 자신에게 약한 태도를 보이는 언니를 이용하는 것을 보아하니, 안 좋은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간다. 

공원에서 살아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들이 구하는 음식, 물병과 같은 모든 것은 전부 인간한테서 얻은 것에 불과하다. 
그러니 언제나 자신의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걸 일부라도 이해 못 하는 어리석은 동족은 금세 공원에서 모습을 감췄다.
이러한 당연한 사실을 외면한 채 단지 자라고 어여쁘게만 보는 어리석은 친실장이 있다면, 그 일가는 머지않아 파멸할 것이다.
물론 그렇게나 자를 아낀다면, 친의 희생으로 자들만큼은 살지 모른다. 그러나 친을 잃은 자는 결코 오래 살지 못한다.
따라서 단지 자를 가지기만 원하는 멍청이가 아니라면, 이러한 지식을 자에게 꾸준히 가르쳐야 그 자가 무사히 자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녀는 친실장에게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을 행동을 저절로 골라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친실장은 매정하게 딱 잘라서 안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친실장의 앞에서 자신의 일인듯이 안절부절못하는 팔녀의 모습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구녀가 팔녀에게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동생이라면 친실장에겐 팔녀가 딱 그랬다. 
다른 자들과는 달리 팔녀는 엄지 태생의 자이기 때문이었다.

엄지는 자실장보다도 약하고, 자실장만큼도 똑똑하지 않다. 생존에 있어서 이보다도 불리한 조건은 없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성체실장들의 기본적인 생각이었다. 한날한시에 태어난 자라도, 거의 모든 경우에서 자실장은 자로 받아주지만, 엄지는 단지 내다 버리거나 새로운 프니프니노예, 심하면 체력보충용 고기에 불과한 취급을 받았다.
그 엄지가 착한 자인지 분충인지, 혹은 똑똑한지 멍청한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단지 버려야 할 엄지를 기르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동족들의 시선에는 멍청한 친실장이었고,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생각하는 대상을 비웃으며 우월감을 채우는 것이다.

그래서 정말로 모든 것을 감수하고 엄지를 자로 기르려는 친실장이 아닌 경우. 즉, 단지 자신이 낳은 자여서 엄지를 기르는 별생각 없는 친실장, 또는 엄지마저도 훌륭히 키울 수 있다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고자 기르던 허영심 많은 친실장은 동족들의 비웃음에 모멸감을 참지 못하고 기르던 엄지를 가차 없이 버리는 것이다.

지금도 출산의 때가 도래하면 화장실 근처에서 자신을 버린 마마를 찾아 울며 돌아다니다 금방 사라지는 엄지들을 볼 수 있다. 

공원에 영문도 없이 막 버려졌던 초기의 시절, 지금보다 한없이 약하고 멍청했던 그때에는 단 둘뿐인 자와 자신조차 건사하기 힘들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공원 생활에 익숙해지고 많은 것을 배운 후에는 자실장보다 어리석은 엄지가 가져올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과, 너무나 연약한 엄지를 무사히 독립시킬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감당하지 못하고 엄지를 기르고자 하는 생각을 고이 접어야만 했다.

마침내 보스의 자리에 오르고 나서야 엄지도 자로 기를 수 있다는 확신이 든 친실장이 이후의 첫 출산에서 얻은 가장 먼저 태어난 엄지가 지금의 팔녀였다.
다른 자실장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만큼 똑똑하면서도 연약한 엄지인 팔녀는 금방 온 가족의 관심과 사랑을 차지했다.
자들은 동생인 엄지를 끔찍하게 아꼈고, 친실장도 교정이 필요한 잘못을 하지 않는 이상 사랑을 아낌 없이 베풀어줬다.
그러나 친실장의 일가가 결코 해줄 수 없었던 단 하나, 그것은 바로 팔녀에게 동생을 안겨주는 것이었다.

당시 팔녀와 같이 태어난 당시의 구녀 엄지는 계속된 교육에도 불구하고 분충성이 나아지지 않아서 솎아내야 했고, 동생의 죽음에 상심한 팔녀를 달래기 위해 자로 받아들였던 구더기 두 마리조차 엄지로 성장하니 분충성이 폭발해서 눈앞에서 직접 솎아내야만 했다.
계속되는 동생들의 죽음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었음이 분명함에도 비뚤어지지 않고 밝게 자라는 팔녀의 모습은 친실장에게 대견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안겨주었고, 이전에 분충이 아님에도 버림받았던 많은 엄지들에 대한 사랑과 속죄까지 모두 담아서 아껴서 길렀다.
그 결과 팔녀는 얼마전 무사히 자실장이 될 수 있었고, 팔녀가 그토록 바라던 동생도 오늘 품에 안겨줄 수 있었다.



그렇게나 소중한 엄지의 조급한 모습을 본 친실장은 자신이 팔녀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 오늘은 새로운 자를 낳은 기쁜 날이니 특별히 허락하는데스. 이리로 가져오는데스. "

" 마마 감사하는테치! "

혹여나 친실장의 마음이 변할까 재빨리 달려가는 팔녀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친실장.
그러면서도 저쪽에서 눈을 빛내고 있는 구녀를 슬쩍 노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구녀가 미운 것은 아니었다. 단지 아무리 귀여운 아이어도 분충이 된다면 기를 수 없는 법, 실장석들을 파멸로 이끄는 분충성은 자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막아야만 했다.

식사 중인 자매들 사이를 헤치며 푸드를 집은 팔녀는 구녀의 손을 잡고 친실장에게 돌아왔다.
팔녀는 말없이 앞으로 내민 친실장의 손에 자신이 먹던 푸드를 조심스럽게 올렸다.
눈이 마주친 구녀를 슬쩍 노려보며 다시 한번 경고를 준 친실장은 양손 사이에 푸드를 놓고 힘을 주었다.

손안에서 계속 돌리면서 꾹꾹 누르던 푸드를 구녀에게 건네주는 친실장. 
푸드를 받은 구녀는 적지 않게 실망했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원통형의 모양에서 거칠고 울퉁불퉁한 구의 형상이 된 푸드는 너무 볼품없고 맛없어 보였다. 이런 마음도 모르는지 팔녀는 구녀에게 얼른 먹으라며 채근할 뿐이었다.

마지못해 입을 작게 벌리고 푸드를 조금 베어먹은 구녀. 오물오물거리며 푸드를 느리게 씹던 구녀의 입이 동작을 멈췄다.
손에 푸드를 들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구녀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가더니 탄성을 뱉으며 푸드를 다시 입에 넣었다.
귀를 파닥이며 푸드를 먹고 있는 구녀와 그런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배시시 웃는 팔녀.
식사를 마친 친실장과 다른 자매들은 두 자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구녀가 짭짭거리며 입안에 남은 푸드의 맛을 되새길 시간도 없이, 팔녀는 구녀를 일으켜 친실장의 앞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다른 자매들 곁으로 데려갔다. 
식사 후의 일과는 하루에 한 번 있는 교육 시간이었다.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아침에 일어난 친실장은 자들과 함께 아침을 먹고 집 밖으로 나가 볼일을 본 뒤 해가 질 무렵에 돌아와 자들을 교육하는 것은 늘 있던 일상이었다.
그러나 친실장은 고민하고 있었다. 밥을 잔뜩 먹고도 자들의 얼굴에선 피로한 기색이 남아 있었다,
또한 친실장이 염려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젖을 먹은 구녀가 푸드를 또 먹는 혜택을 받았던 것이다.

바로 눈앞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하지만, 어린 자를 조금 더 챙겨줬다고 질투할 정도로 교육을 엉망으로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한 자만 특별히 편애하는 것으로 보이면 좋지 않았다. 
특히 구녀는 팔녀와는 다르게 태생부터 자실장이다. 
자를 열심히 가르쳤다고 자부하는 친실장이었지만, 자들을 과대평가하지도 않았다. 겉으로는 별말 없이 넘어가도 왜 막내만 특별한 대우를 받는지 의문을 가지는 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무리 어리니 막내라니 하더라도 엄연히 다른 자들과 동격이다.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한동안 고민하던 친실장은 마침내 입을 열었다.

" 오늘은 교육이 없는데스. 피곤할테니 적당히 놀다가 일찍 자는데스. "

경사로운 날에 생긴 뜻밖의 행운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고생한 다른 자들에 대한 보상임과 동시에 구녀의 일도 그의 연장선으로 보이게 할 것이다.
아무래도 살짝 분충끼가 보이는 구녀가 눈에 밟혔지만, 팔녀가 곁에 붙어서 알려주고 있으니 하루 정도는 괜찮다고 생각했다.
친실장은 몸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풀기 위해 옆으로 누워 눈을 감았다.



한 핏줄이고 사이 좋은 자매들이라도 좋아하는 정도의 차이는 있는 법, 가장 마음이 잘 맞는 자매끼리 뭉쳐서 놀다가 다른 자매들도 같이 끼어서 노는 것이 평소 자매들이 자유시간에 하는 행동이었다.
오늘은 달랐다. 친실장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모든 자들은 구녀의 앞으로 몰려들었다.
여태까지 그다지 신경 안 쓰이는듯한 모습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오랜만에 생긴 또 다른 동생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다.
자매들은 쪼그마한 구녀의 몸을 신기한 듯이 만져대고 손으로 콕콕 찔러보기도 하고, 애정을 담아서 핥아주기도 했다.

구녀의 정신을 쏙 빼놓을 만큼 엄청난 관심을 보내던 자매들. 
자신의 옆구리를 누군가 찔러서 돌아본 장녀는 친실장의 자 중에서 가장 눈치가 빠른 차녀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는 엉겁결에 자신보다 덩치가 큰 언니들에게 밀려난 팔녀가 볼을 부풀리고 애꿎은 바닥을 발로 차며 심통을 부리고 있었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자매들은 웃으면서 구녀를 내버려 두고 흩어졌다. 팔녀는 즉시 구녀에게 달려갔다.
나중에 정신을 차린 구녀가 놓아달라고 할 때까지, 팔녀는 구녀를 품에 꼭 껴안은 채핥아주고 있었다.

단 둘이 남은 팔녀는 친실장의 기대에 부응하여 구녀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공원에서 살아가기 위한 마음가짐, 왜 분충이 되면 안 되는지에 대한 이유, 귀엽고 착한 자가 되기 위한 태도.
끝없이 이어지는 팔녀의 말이었지만, 그 지식의 중요함을 깨달은 구녀는 전혀 지루해하지 않고 귀를 기울이며 집중하고 있었다.

어느새 팔녀는 친실장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친실장이 미도리라는 이름을 가진 사육실장이었다는 것, 그리고 공원의 보스가 바로 미도리라는 것.
또다시 듣는 ' 보스 ' 라는 말. 궁금함을 참지 못한 구녀는 팔녀의 말을 끊고 보스가 무엇인지 물어보았다.

" 보스는 공원의 모든 오바상과 자들을 다스리는 왕인테치. 마마의 말을 듣는 부하 오바상들이 잔뜩 있는테치! "

" 대단한테치~ "

" 그렇다고 다른 오바상들한테 함부로 대하면 안 되는테치. 보스는 마마지 와타치타치가 아닌테치. "

" 그리고 와타치타치가 제멋대로 행동하면 보스인 마마의 명성에 먹칠을 하는테치. 그러니 더욱 행동에 조심해야되는테치. "

" 그런테치? "

" 그런테치! 그러니까 앞으로 구녀가 어떻게 행동해야 되냐면.... "

자신의 말에 관심을 보이는 구녀의 모습에 신이 난 팔녀는 더욱 재잘거리며 설명하였다. 구녀의 집중력이 풀리고도 한참 뒤까지도.
끝없는 팔녀의 수다에서 구녀를 구한 것은 미도리였다. 벽 한편에 잘 개어둔 두꺼운 수건을 널게 편 미도리는 잘 시간이라며 팔녀의 말을 끊었다. 아쉬워하는 팔녀의 눈빛을 뒤로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구녀를 품에 안은 미도리는 걸음을 옮겼다.

수건의 끝부분을 잡은 미도리는 이미 잘 준비를 마치고 수건에 나란히 누워있는 자들을 지나쳐 자신의 자리에 몸을 뉘며 수건을 덮었다. 수건에 파묻힌 구녀를 손으로 빼낸 미도리는 한쪽 팔로 구녀의 몸을 껴안으며 눈을 붙였다. 
입을 물로 헹군 팔녀도 반대쪽 옆구리로 꼬물꼬물 기어들어 와 자리를 잡고는 눈을 감았다. 
왁자지껄했던 미도리의 골판지는 금세 조용해졌다.

.
.
.
.


밤을 넘겨 새벽에 닿은 시간. 미도리일가의 집에는 뭉쳐서 잠든 자실장들이 낮게 코 고는 소리만이 들리고 있었다.
정적을 깬 것은 부스럭거리는 소리였다.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작은 인영은 오늘 태어난 막내, 구녀였다.

보통 실장석은 출산을 아주 이른 아침이나 인간의 왕래가 비교적 적은 한낮의 시간을 노려서 출산한다. 순식간에 일가실각을 불러올 인간과 만남을 피하기 위해서다. 임신한 실장석을 노리는 동족들도 경계해야 했지만, 그건 미도리에겐 고려할 가지가 없었다.
보스인 미도리도 그 규칙은 철저히 지켰지만, 오늘은 집의 보수에 욕심을 내다보니 비교적 늦은 시간에 자를 낳게 되었다.

그게 바로 구녀가 새벽에 일어난 이유였다. 
갓 태어난 자의 체력은 너무나 형편없어서 챙겨주지 않고 스스로 걷게 한다면 집으로 돌아가기도 버겁고, 다른 자매들과 같이 잠들어도 다음 날 아침에 가족들이 깨워줄 때까지 눈을 뜨지 못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구녀의 경우는 반대였다. 미도리와 자들은 종일 집을 보강하느라 꽤 체력을 소모했지만, 늦게 태어나 별다른 체력소모 없이 잠들었던 구녀는 모두 잠든 새벽에 눈을 뜨고야 만 것이다.

미도리의 따뜻한 품속에 안겨서 억지로 잠을 청하던 구녀는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어서 미도리의 품을 빠져나온 구녀가 새벽의 추위에 화들짝 놀라며 다시 미도리의 품에 안긴 것도 잠시, 지루함에 답답한 구녀는 다시 수건 밖으로 빠져나왔다.

" 오네챠 심심한테치 "

지루함을 이겨내지 못한 구녀는 차라리 수다쟁이인 팔녀를 깨우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참을 흔들고 손으로 콕콕 찔러도 팔녀는 일어날 기미조차 없었다. 
팔녀를 포기한 구녀는 다른 자매들이나 미도리를 깨우려고 했지만, 팔녀도 깨우지 못한 구녀가 팔녀보다 더 큰 언니들이나 미도리를 깨우는 것은 무리였다. 심지어 발로 차도 소용이 없었다. 
큰소리를 내서 깨워볼까 했지만, 그런 짓을 한다면 가족들에게 미움받을 것 같았다.
진이 빠지고 풀죽은 구녀는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애꿎은 바닥을 손으로 비비며 심통을 내었다.

- 꼬르륵 -

난동을 부린 대가로 구녀가 얻은 것은 허기였다.

" 테에에... "

소리 내며 요동치는 자신의 배를 바라보던 구녀의 눈은 무심코 미도리의 가슴을 향했다. 
아장아장 걸어 미도리에게 간 구녀는 자신을 꼭 껴안고 있던 팔이 어느새 배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 마마, 와타치 배고픈테치. 밀크 먹고 싶은테치. "

이번에도 미도리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구녀는 젖을 먹는 데 방해가 되는 팔을 치우기 위해 자신의 쪽으로 당기기 시작했다. 

" 테..챠아앗! "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힘을 주었지만, 미도리의 팔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몇번의 시도에도 도무지 꿈적도 하지 않는 미도리의 팔을 노려보며 헉헉대는 구녀.
숨을 진정시키고 다시 한번 힘을 쓰던 구녀는 그만 미도리의 옷을 놓치고 뒤로 놔 뒹굴었다.
생애 처음으로 느낀 큰 고통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구녀는 한참 후에나 느릿느릿 몸을 일으켰다.

" 테에에... "

아픔에 울먹이던 구녀는 간신히 울음을 참았다.
팔녀가 말했었다. 보스의 자는 그에 걸맞은 품격을 가져야 한다고. 아프다고 엉엉 우는 것은 보스의 자가 할 행동이 아니었다. 
아픈 뒤통수를 어루만지며 훌쩍이던 구녀는 문득 옆에서 나는 맛있는 냄새를 느끼고 작은 코를 벌름거렸다.

피곤한 미도리가 신경 쓰지 못했는지 완전히 닫히지 않은 상자. 그 작은 틈새로 고소한 푸드의 냄새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기억에 있다. 이건 분명히 친실장인 미도리가 맛있는 푸드를 꺼내던 상자였다.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구녀는 상자의 덮개를 위로 들어 올렸다.

팔녀에게 애교를 보여주며 졸라서 먹었던 푸드. 마마의 밀크도 맛있었지만 푸드는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맛있었다.
약간의 공간을 남긴 채, 상자 안에는 그런 푸드가 꽉꽉 찰 만큼 많이 들어있었다. 
황홀한 눈으로 상자 안의 푸드를 보던 구녀는 무심코 손을 뻗다가 주춤했다.
너무 길어 대부분을 졸면서 들었던 팔녀의 말. 그중에서는 자가 해서는 안되는 행동들이 있었고, 자가 허락도 없이 멋대로 보존식을 꺼내먹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구녀는 푸드를 향해 뻗던 손을 내리고 몸을 돌려 자는 친실장을 바라봤다.

미도리는 여전히 입을 벌리고 깊게 잠들어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배 위에 걸쳐있단 한쪽 팔은 여전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시 한번 마마를 깨워볼까? 하지만 도저히 깨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렇다면 팔을 치워보는 건? 그러나 아직도 작게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보면 그것도 무리였다.
눈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손도 댈 수 없는 현실에 울상이 된 구녀는 제자리에 쪼그려 앉아 다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배고프다는 생리적인 욕구를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쌓이는 스트레스, 타자에게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상황.
겉보기엔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구녀는 아직 오늘 태어난 어린 자실장에 불과했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해 백지처럼 깨끗하지만, 실낱같은 지성보다는 본능을 더 추구하는 아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서의 극도의 스트레스는 구녀의 몸에도 영향을 주어 두 눈에서는 색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변을 감지한 구녀의 위석은 주인을 지키기 위해서 맹렬하게 작동했다. 
몸속에서 위석이 환하게 빛을 발하자, 쪼그려 앉아 훌쩍이던 구녀는 갑자기 고개를 번쩍 들고 중얼거렸다.

" 와타치는 선택받은 자인테치. "
  
마마는 공원의 보스라고 했다. 공원에 사는 모든 실장석들의 정점,  
단 하나뿐인 절대적인 왕,  마마의 말에 힘세다는 부하 오바상들도 쩔쩔맨다고 들었다.
구녀 자신은 어떠한가? 단 하나뿐인 보스의 자, 공원을 다스리는 왕의 자식이다.
마마의 부하에겐 함부로 대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 오바상들도 자들이 있을게 분명하다. 
그러니 자신은 왕의 아이면서, 동시에 공원에 사는 모든 자들의 왕이었다.
물론 미도리의 자는 구녀 하나가 아니다. 그러나 다른 자매들과 함께 태어난 언니들과는 달리, 구녀는 혼자서 자로 편입됐다.

마마의 경우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희귀한 존재는 다른 존재들보다도 더 우월한 게 분명하다.
그리고 홀로 선택받았던 자신은 자매 중 누구보다도 우월하며, 더 좋은 대접을 받을 자격을 가지고 있었다.
증거는 있다. 언니인 팔녀는 망설이다가도 자신의 애교를 본 뒤 두말 않고 부탁을 들어주었고, 마마도 꽤 무서운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았지만 별말 없이 푸드를 자신에게 주었다.

자괴를 막기 위해 위석이 선택한 것은 본체가 행복회로를 돌리도록 유도하는 것.
오로지 본능의 영역을 주관하는 위석은 정작 그 행위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알 수 없이 행동을 유도할 뿐이었다.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구녀는 지체하지 않고 상자에서 푸드를 하나 집어서 가져왔다.

" 테햐~ "

구녀는 눈을 감고 코를 벌름거리며 푸드의 고소한 냄새를 즐겼다. 그러고는 침을 질질 흘리는 입을 크게 벌려 푸드를 깨물었다.

" 텝! "

이빨이 깨질 것 같은 고통에 구녀는 손에 든 푸드를 놓쳐버렸다.
아픈 이빨을 계속 문지르던 구녀는 글썽이던 눈물을 닦으며 바닥을 뒹구는 푸드를 다시 집어 들었다.
푸드는 희미하게 난 이빨자 국을 뺀다면 어떤 흠집도 없었다. 아무래도 이 푸드는 불량품인 게 분명했다.
불량품을 땅에 버리고 상자에서 다른 푸드를 꺼낸 구녀는 방금의 일이 생각나 크게 벌렸던 입을 오므려 조심스럽게 깨물었다.

" 테? "

아까보다도 더 희미해서 거의 보이지도 않는 이빨 자국. 당황한 구녀는 다시 한번 상자에서 푸드를 꺼내 입을 벌렸다.
이럴 리 없었다. 몇번이나 푸드를 바꿔가며 한입 물어보았지만, 죄다 불량품이었다.
어느새 구녀의 발밑에는 푸드가 잔뜩 쌓여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먹을 수 없었다. 결과도 없는데 시간과 체력만 낭비한 꼴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당황하던 구녀는 심한 공복감을 느끼며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 테챠앗! 이게 뭐인테치! "

제 성질에 못이긴 구녀는 푸드를 땅바닥에 집어 던진 뒤 씩씩거리며 발로 밟았지만, 푸드를 발로 뭉개기는커녕 오히려 밟다가 삐끗하여 아픈 다리를 붙잡고 땅을 뒹굴 뿐이었다. 구녀가 훌쩍거리는 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지만 누구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픔이 어느 정도 가신 구녀는 매섭게 푸드를 노려보다가 친실장이 손으로 푸드를 뭉갰던 것을 뒤늦게 기억했다.

그러나 어린 구녀의 생각으로도 그건 무리였다. 미도리는 손으로 간단하게 푸드를 뭉갰지만, 자신은 오히려 발만 다쳤을 뿐이니까.
다른 방법을 고심하던 구녀는 자매들이 어떻게 푸드를 먹었는지를 떠올려봤다. 기억나는 대로면 자신보다 살짝 큰 팔녀조차도 너무나 쉽게 이빨로 푸드를 베어 먹고 있었다. 
자가 혼자서 푸드를 먹을 수 있다면 자신도 가능하다. 언니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선택받은 자인 자신이 못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 이딴 똥푸드는 와타치의 날카로운 이빨에 산산조각나는테치! "



마치 불공대천의 원수를 보는 듯 이글이글 타는듯한 눈으로 푸드를 노려보던 구녀는 다시 한번 입을 벌렸다. 
작게 입을 벌리고 깨물어도 구녀의 이빨은 아직 푸드를 감당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구녀는 이빨의 통증을 무시하고 계속 깨물었다.
푸드를 미친 듯이 깨무는 구녀의 행동은 이미 공복감을 채우기 위함이 아닌 선택받은 자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이런 것조차 해낼 수 없다면 차라리 스스로 부서지는 게 나으리라고 생각하는 구녀였다.

자신의 파멸을 걸고 도전하는 구녀의 행동은 실장석의 본능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자괴를 막기 위해 위석은 어린 자실장의 욕망을 위하여 다시 한번 환하게 빛을 발했다.
푸드를 먹기 위해 필요한 더 튼튼하고 강한 이빨은 시간이 흐르면 머지않아 자연스럽게 얻게 될 결과, 그것을 미리 당겨오기 위해서는 그에 걸맞은 대가가 필요했다. 위석은 몸에 축적된 모든 영양분을 이빨을 강화하는 데 사용하기 시작했다.  
공원의 보스로 누구보다도 풍족하게 지내는 미도리가 임신 기간을 꽉 채워서 낳았던 구녀. 가정집에서 기르는 웬만한 사육실장의 자보다도 통통하던 그 몸은 급속도로 말라갔다.

친실장을 잃고 오래 굶주린 고아 자실장 수준으로 몸이 빼빼 말라서야 구녀의 이빨은 드디어 푸드를 이빨로 자를 수 있었다.
입안에 가득 퍼지는 푸드의 맛에 구녀는 감격하여 눈물이 줄줄 흘렀다. 자신은 결코 틀리지 않은 것이다.
자신의 자격을 입증했다면,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차례였다. 손에 든 푸드를 순식간에 먹어치운 구녀는 지체하지 않고 다른 푸드를 집었다. 

구녀가 자신의 발치에 쌓인 푸드를 다 먹어치우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푸드를 먹기 위하여 이빨을 단단하게 하는데 어찌나 에너지 소모가 컸는지, 그렇게나 먹어대고도 오히려 살짝 말라보였다. 

" 아직 부족한테치. "

자연스럽게 구녀의 시선이 활짝 열린 상자로 옮겨졌다.
또다시 팔을 뻗어서 꺼내려던 구녀는 순간 멈칫하더니, 발을 상자에 걸치며 상자에 들어가려고 시도했다.
낑낑대며 상자 안에 안착한 구녀가 아픈 다리를 문지르기도 잠시, 자신의 주위에 쌓인 푸드를 만족스럽게 보던 구녀는 손을 뻗었다.

" 테챱테챱 "

쌓여있는 푸드가 조금씩 줄어들수록, 홀쭉하게 말랐던 구녀의 배는 빠르게 통통해지고 있었다.
또 하나의 푸드를 집어 먹는 구녀의 뇌리속에 순간 보존식을 멋대로 꺼내먹으면 분충이라고 했던 팔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구녀는 개의치 않았다. 자신은 평범한 자가 아닌 ' 선택받은 자 ' 니까. 다른 자매들과는 차원이 다른 존재니까.

" 테프픗. "

모두가 잠든 골판지 안.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어린 자실장이 지칠 줄 모르고 푸드를 갉아먹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고요한 밤이 지나고 돌아오는 아침은 늘 활기찬 시간이었다. 
식사하며 오늘의 일정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점검하는 미도리와 마마가 나가 있는 동안에 무엇을 할까 이야기를 나누는 자들의 모습은 아침마다 볼 수 있는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마치 새벽인 것처럼 쥐죽은 듯이 조용한 집 안에는 얼음장 같은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침밥을 꺼내려던 미도리는 아무 말 없이 보존식 상자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 ... "


부족했다. 보존식상자를 푸드로 채운 게 엊그제니 이틀 만에 먹어치울 양은 아니었다.
그러나 상자 안에는 자실장 한마리가 마구 뒹굴어도 될 만큼 넓은 공간이 비어있었다. 어떤 자가 몰래 푸드를 먹은 게 분명했다.
생각에 잠긴 미도리를 자들은 굳은 얼굴로 숨죽이며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다른 자매보다 더 어린 육녀와 그 밑의 세 마리의 자실장은 침을 꼴깍 삼키며 긴장하고 있었다. 
벌벌 떨고 있는 팔녀는 그 와중에도 자신의 손을 붙잡고 떨고 있는 구녀를 품에 끌어안아 다독여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자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고 있던 미도리는 등을 돌려 자들을 보았다.

" 이거 보이는데스?

미도리의 손을 따라 보존식 상자의 안을 본 자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예상했던 대로 보존식 상자가 많이 비어있었다. 누가 보아도 어제 한 끼만으로 줄어든 양이 아니었다. 
게다가 몇몇 푸드의 색이 좀 더 진하고 역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푸드에 운치가 묻어있는 게 분명했다. 
미도리는 아무 말 없이 보존식 상자를 들고 운치굴 위에서 부어버렸다.
뜻밖의 횡재에 게걸스럽게 푸드를 먹어치우던 독라들은 하나라도 더 주워 먹기 위해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 당장 조용히 안 하면 달마로 만들어서 운치노예들의 먹이로 던져버리는데스. "

조용해진 독라들을 차갑게 쏘아보던 미도리는 다시 자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 몰래 보존식을 먹은 분충이 있는데스. 어제 자를 낳았다고 대충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면 착각인데스. 찾아서 엄벌을 주는데스! "

엄포를 놓은 미도리는 자들에게 다가가 하나씩 꼼꼼하게 확인하기 시작했다.
장녀, 차녀, 삼녀.... 구녀까지 확인을 마친 뒤 팔짱을 끼고 고민을 하던 미도리는 도로 장녀의 앞으로 돌아갔다. 
다시 한번 모든 자를 확인한 뒤, 잔뜩 긴장한 자들을 보던 미도리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대체 무엇부터 잘못된 것일까? 
단 하나의 자만 선택할 거면서 조금이라도 건강하고 똑똑한 자가 태어나기를 원해서 임신 기간을 꽉 채운 것?
허술해진 위장을 보강하다가 골판지의 강도가 약간 물렁물렁해진 걸 확인하고 내친김에 보강공사까지 해서 해가 중천에 뜨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출산을 위해 허둥지둥 집을 떠났던 것? 
늦은 시간에 출발하면서도 봄에 독립할 자들의 교육 욕심에 못 이겨 자들까지 데려가느라 시간이 더 걸렸던 것?
단 하나뿐인 여동생을 챙기려는 팔녀의 응석을 못 이겨 구녀에게 줄 생각도 없던 푸드까지 먹였던 것?
지친 자들을 보니 안쓰러워서 저녁을 먹고 해야 했던 교육을 하지 않았던 것?

범인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제 딴에는 몰래 먹은 사실을 숨기려고 물까지 마셔서 푸드의 냄새를 지우려고 했지만, 그래봤자 아직 어린아이의 생각에 불과했다. 
냄새를 지우는 데 집착하느라 정작 자신의 턱받이와 신발에는 탐욕의 흔적이 남아있음은 전혀 생각지 못한 것 같다. 
심지어 어제 태어났으면서 팬티는 이미 연녹색을 띠고 있었다. 보존식을 몰래 먹은 분충이 나타났다는 상황에 당황해서 그렇지, 자들도 침착함을 되찾는다면 금세 깨달을 정도로 허술한 뒤처리였다.

팔녀의 품에서 벌벌 떨며 자신을 보는 구녀의 불안한 눈을 보는 미도리는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어찌 안타깝지 않겠는가, 배 아파하며 낳은 자인데. 기르던 자들의 교육을 위해 많은 자들의 기회를 뺏고 선택했던 유일한 자였는데.
마음에 안 드는 점이 보이긴 했어도 그 정도는 교육을 통해 얼마든지 교정할 자신이 있다. 
고작 그 정도의 결점은 철없는 어린아이의 행동으로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용서하고 지나간다면, 다른 자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겨울이 다가오는 시점에 보존식을 몰래 털어먹는다는, 일반적인 들실장이라면 일가실각을 부를 수 도 있는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자를 아직 어리다고 봐주고 넘어간다면, 나중에 독립한 자들이 같은 상황을 겪을 때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여덟이나 되는 자의 미래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자 하나의 미래, 어느 쪽이 더 중요한 것인지는 제정신이 박혔다면 미숙아여서 그리 똑똑하지 않은 엄지실장도 알 일이었다.

마음을 정리하고 감고 있던 눈을 뜬 미도리는 마침내 입을 열었다.

" 가족들이 잘 때 보존식을 몰래 털어먹은 분충은 오마에인데스! "

" 테?x8 "  " 텟! "

미도리의 손은 단호하게 구녀를 가리키고 있었다. 
팔녀의 품에 있는 구녀를 거칠게 낚아채온 미도리는 구녀를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 
구녀의 입에서 비명이 나오기도 전에 등을 발로 밟아서 움직이지 못하게 한 미도리는 차가운 눈으로 구녀를 보며 말했다.

" 이 자는 가망이 없는데스. 솎아내는 수밖에 없는데스! "

" 테챠아앗?! 마마! 슬픈일은 하지 마는테치! 테츙! 테츙♡ "


발에 깔려 거동도 버거운 몸으로 힘겹게 팔을 얼굴에 가져가 애교를 부리는 구녀의 모습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미도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미도리의 뇌리에서 귀여운 막내는 이미 공원에서 흔하디흔한 분충 자실장이 되어 있었다. 
미도리의 한 손에는 뒷머리를 움켜잡힌 구녀는 미친 듯이 바동거렸지만, 억센 손아귀에 붙잡힌 머리카락만 아플 뿐이었다. 
미도리는 고개를 돌려 자들에게 말했다.

" 오늘 아침은 자들끼리 먹는데스. 마마는 이 분충을 멀리 버리고 오는데스. "

" 테에엥 테에엥! 와타치를 버리면 안되는테치! 와타치는 아직 어린 아이인테치! "

색눈물을 줄줄 흘리며 애걸하는 구녀에게 얼굴을 맞댄 미도리는 다른 자들이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말했다. 

" 오마에, 버릴 때까지 한 번이라도 시끄럽게 군다면 바로 죽이는데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면 입 다무는게 좋은데스. "

" 와타치...읍! "

미도리의 경고에 화들짝 놀란 구녀는 양팔을 모아서 입을 가렸다. 얌전해진 구녀를 옆구리에 낀 미도리는 집의 문을 열어젖혔다. 
거침없이 빠르게 내딛는 미도리의 발걸음에 집은 순식간에 멀어지고 있었다. 
구녀의 눈에는 후회와 공포가 가득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바로 그 순간, 멀어져가던 집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을 감지한 미도리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열린 문밖으로 구녀를 부르짖으며 집에서 뛰쳐나오는 팔녀를 다른 자매들이 뒤쫓고 있었다.
짧은 도주극은 달려오다 작은 돌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진 팔녀가 뒤쫓아온 언니들에게 붙잡혀 순식간에 제압당하는 것으로 끝났다.

" 이거 놓는테치! 와타치는 가야만 하는테치! "

" 절대로 안 놓는테치! 팔녀쨩 정신차리는테치! 쫓아가면 팔녀도 마마한테 크게 혼나는테치! "

" 그런 거 모르는테치! 와타치는 이모우토챠를 지켜야 하는테치! 이번만큼은 안 되는테치! 얼른 놓는테챠앗! "

" 저얼대로 못놓는테칫!! "

팔녀는 구속에서 해방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자신보다 크고 힘도 센 언니들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발버둥 치던 팔녀는 금세 지쳐서 씩씩거릴 뿐이었다. 
힘을 줘도 옴짝달싹 못 하게 완벽하게 제압된 몸과는 달리 머리만큼은 아무런 구속도 당하지 않았다. 
움직일 수 없는 팔녀는 힘겹게 목을 돌려가며 눈으로라도 구녀를 쫓으려고 애썼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저 멀리서 자신을 보고 있는 마마와 구녀의 모습을.

팔녀의 두 눈이 커졌다. 그 잠깐의 실랑이가 있는 사이에 구녀는 이미 팔녀가 쫓아가기도 힘든 만큼 멀리 있었다. 


" 안되는테치! 싫은테치! 구녀쨩! 구녀짜아앙! "

아무리 필사적으로 팔녀가 발버둥 처도 자신을 억누르고 있는 자매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죽을힘을 다해 쫓아도 이미 늦었다는 것을 팔녀는 깨달았다. 마마는 결코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고 떠날 것이다.
좌절한 팔녀의 몸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낀 다른 자매들은 팔녀의 속박을 조용히 풀었다.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 거친 숨을 몰아쉬던 팔녀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단 하나뿐인 동생이 집에서 쫓겨나고 있었다. 위기에 몰린 저 아이를 도울 수 있는 것은 자신만이 유일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언니인 자신은 동생을 지키기는커녕 쫓아가는 것조차 할 수 없었다.

" 테에엥! 테에엥! "


팔녀는 결국 제자리에 앉아 울기 시작했다. 다른 자매들은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서럽게 우는 팔녀의 등을 살살 토닥이며 달랬다. 
소란을 말없이 바라보던 미도리는 등을 돌리고 다시 발을 떼서 걷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집과 자매들. 구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우는 팔녀의 모습을 눈에 담고 양팔로 입을 가린 채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뿐이었다.

.
.
.
.

어제 집으로 돌아오던 길과는 완전히 다른 낯선 풍경의 길을 끌려가는 구녀의 눈은 불안하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혹여나 지나가는 착한 오바상이 자신을 구해주지 않을까 하는 구녀의 작은 소망은 미도리와 마주친 다른 성체실장들은 기겁을 하며 재빨리 멀어지거나, 또는 그 자리에서 멈춰서서 고개를 숙이며 인사한 뒤 미도리가 지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는 모습에 부정되었다.

미도리의 발걸음은 도무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공포에 질린 구녀에게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입을 막은 팔이 너무나도 아팠지만, 소리를 내면 자신을 죽이겠다고 했던 마마의 눈은 너무나 무서웠다. 
계속되는 육체적 고통과 버려진다는 공포에 휩싸인 구녀가 반쯤 정신을 놓고 있을 때, 어느새 걸음을 멈춘 미도리는 구녀를 거칠게 땅바닥에 내평개쳤다.

" 테갸아악! " 

눈물을 글썽이며 아픈 몸을 문지르던 구녀는 낯선 풍경에 시선을 뺏겨서 입을 헤 벌리고 멍한 정신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을 따라 끝없이 걸어서 도착한 곳. 울창한 숲이 길의 양옆에 있는 이 장소엔 많은 성체실장들이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간혹 길을 따라 걷는 거대한 인간들도 보였는데, 인간들에게 다가간 성체실장이나 자실장은 인간이 가볍게 내지른 발차기에도 저 멀리 날아가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바닥의 얼룩으로 변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회색의 거대한 실장석의 동상. 구녀의 마마인 미도리보다도, 아니, 지나가는 인간들보다도 커 보이는 그 거대한 동상은 뺨에 손을 갖다 대는 자세, 실장석들이 ' 애교 ' 라고 말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자신의 처지도 잊고 주변을 살피는데 정신이 팔린 구녀를 안타깝게 내려보던 미도리는 애써 냉혹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 오마에는 이제 와타시의 자가 아닌데스. 오마에의 능력으로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혹여나 돌아온다면 바로 죽일 테니 살고 싶으면 와타시의 근처에도 다가오지 마는데스. "

" 테에엥! 마마 와타치가 잘못한테치! 한 번만 용서해주는테치! "

" 끝난 일인데스. 오마에는 어제 그렇게 먹고도 욕심을 부린데스. 팔녀를 부추겨서 대신 말하게 하면 와타시가 모를 줄 알았던데스? 먹을 것에 자꾸 욕심을 부리는 것만으로도 자를 솎아낼 이유로 충분한데스. "

" 그리고 팔녀가 보존식은 건드리면 안 된다고 말을 해줬는데도 오마에는 자신의 욕심을 못 이겨 몰래 보존식을 먹은데스. 오마에는 오네챠인 팔녀를 무시한 거나 다름없는데스. 벌써 오네챠의 말도 안 듣는 아이라면 마마의 말이라고 들을 리 없는데스. "

" 오마에의 모든 행동이 오마에가 분충인걸 알려주는데스. 분충을 기르는 건 위험한데스. 이제부터는 혼자 알아서 살아가는데스. "

말을 마친 미도리는 등을 돌려서 걸어갔다. 
지금 미도리를 놓친다면 자신의 삶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아는 구녀는 필사적으로 달려가 미도리의 다리를 붙잡았다.

" 뭐인데스? 고아가 와타시의 다리를 붙잡다니 미친데스? 아직 어리다고 전부 용서받는 건 아닌데스. "

" 마마! 잘못한테치! 다시는 그러지 않는테치! 이대로 버려지면 와타치는 죽어버리는테치! "

" 이제 오마에는 와타시의 자가 아니라고 한 걸 벌써 잊은데스? 원래 분충을 솎아낼 때는 머리와 옷까지 뺏는데, 이번만은 봐준데스. 고마운줄 알고 저리 꺼지는데스. "

냉정하게 대답하며 발을 턴 미도리는 땅바닥을 나뒹구는 구녀를 내버려 두고 걸음을 옮겼다. 구녀가 몇 번을 매달려도 미도리는 번번이 발을 털어 구녀를 쫓아낼 뿐이었다. 
더는 쫓을 힘도 없는 구녀는 제자리에 주저앉아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구녀를 지나쳐 몇걸음 걸어가던 미도리는 갑자기 멈춰 섰다.

" 마지막으로 한마디 하는데스. 행여나 다른 동족이 오마에를 키워줄 거라 생각하면 큰 오산인데스. 정말 드물게 자를 가지지 못하는 동족이 버려진 아이를 자신의 자로 받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긴 하지만, 와타시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데스. "

" 그리고 공원에 사는 동족들한테 버려진 아이라는 건 잡아가 달라고 유혹하는 노예와 다름이 없는데스. 특히 겨울이 다 된 지금 잡혀간다면 바로 보존식으로 만들어버리는데스. 그러니 스스로 파킨하는게 좋은데스. "

"... 팔녀의 마음에 또다시 상처를 준 오마에의 행동은 용서가 안 되지만, 그래도 와타시에게서 나온 아이였으니 거기까지는 알려주는데스. 작별인데스. "

그 말을 끝으로 미도리는 빠르게 걸어서 사라져버렸다. 구녀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미도리가 떠난 길을 보았다. 
미도리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구녀가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돌아갈 곳도, 가야 할 곳도 없다. 어찌할 줄 몰라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던 구녀는 돌연 자신을 향한 시선을 느꼈다.
거대한 동상의 오른쪽에 나 있는 수풀길, 인간이 만든 길과 이어지는 그 입구에서 성체실장 둘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녀와 시선이 마주친 두 성체실장은 움찔하더니 천천히 구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구녀는 문득 미도리가 남긴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 공원에 사는 동족들한테 버려진 아이라는 건 잡아가 달라고 유혹하는 노예와 다름이 없는데스. 특히 겨울이 다 된 지금 잡혀간다면 노예로 쓰지도 않고 바로 보존식으로 만들어버리는데스. '

안색이 창백해진 구녀는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죽을힘을 다해 길옆의 수풀로 뛰어들었다.
구녀를 향해 다가오던 두 성체실장은 수풀로 뛰어 사라진 구녀의 뒷모습을 보고는 걸음을 멈추고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한 성체실장이 곁의 다른 성체실장에게 물었다.


" 오마에는 왜 꾸물대다가 저 꼬마를 놓친데스?

" 미친 소리 하지마는데스. 오마에는 저 고아를 버린 게 누군지 못본데스? 보스인데스 보스! 혼자서 전 보스 일파를 실각시켰다는 그 무시무시한 보스말인데스! "

" 아는데스. 그래서 오마에가 먼저 나서서 확인했으면 좋았던데스. 더욱이 그 꼬마는 옷과 머리도 멀쩡했던데스. 만약 보스가 자를 훈육하는 중이었는데, 좋다고 잡아간다면 일가실각당하기 딱 좋아서 와타시를 대신해 떠볼 미끼가 필요했는데 아쉬운데스. "

" 뎃? 미끼라고한데스? 말 다한데스? "

" 뭐 문제있는데스? 오마에도 살아있으니 아무 문제 없는 것 아닌데스! "

" ... "

" ... "

" 데샤앗! "

" 데샤앗! "

서로를 죽일 듯이 노려본 두 성체실장은 그대로 땅에 손과 발을 붙이고 서로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싸움의 승자가 누가 될 것인지, 또는 다른 성체들에게 둘 다 당할 것인지.
혹은 순찰 중인 깡패실장들에게 걸려 두 일가가 사이좋게 운치굴에 끌려갈지는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구녀는 수풀길 속 아무도 없는 공터를 없는 힘까지 짜내며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무서워 보이는 오바상들에게 잡힌다면 자신은 꼼짝도 못 하고 오바상 가족의 밥이 될 판이었다.
자신은 살아야 했다. 고작 다른 동족에게 먹히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정신없이 달리던 구녀는 미처 보지 못한 발밑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 테갸악! "

아픈 다리를 붙잡고 눈물을 글썽이기도 잠시, 자신이 도망가는 중이었다는 것을 자각한 구녀는 기겁하며 자신의 입을 가리고 주위를 불안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주변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데도 불안함을 떨치지 못하고 다시 일어나서 뛰려던 구녀는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고작 태어난 지 하루밖에 안 된 자실장이 밥도 먹지 않고 이토록 오래 달릴 수 있던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새벽에 잔뜩 먹었던 푸드는 이미 다시 잠들기 전에 운치로 내보낸 지 오래였다.
잡아먹힌다는 공포에 지배되어 한계를 넘어서 달렸던 구녀의 몸은 이제 걷기도 힘들었다. 
공포에서 해방되어 이성을 되찾은 구녀는 더는 몸을 움직일 원동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시 움직이려면 조금이라도 쉬어야 했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핀 구녀는 다리를 끌며 자신의 키보다 높은 풀숲에 몸을 숨긴 뒤 자리에 앉았다.

끙끙거리며 아픈 다리를 문지르던 구녀. 아까 흘린 눈물 자국이 채 마르지도 않은 두 눈에서 돌연 눈물이 흘러내렸다.

' 어째서인테치 '

세상의 빛을 보기 전에는 행복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너무나 차가운 마마의 태교에 상처받으며 자실장이 되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마마와 어느 언니의 대화를 엿들은 뒤에는 같이 놀자는 다른 자매도 무시하며 자로 인정받을 기회를 손에 쥐기 위해 초조한 마음을 억누르고 출산의 때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려야 했다.
자신을 넘어뜨리고 먼저 나간 분충에게 뒤처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점막을 필사적으로 핥아야 했다.

숨 막히는 경쟁의 승리자는 자신이었다. 괴로운 시간을 이겨낸 자신에겐 그 인내에 걸맞은 보답이 기다리고 있었다
공원의 모두가 우러러본다는 보스, 너무나 세레브한 마마, 
자신을 귀여워해 주는 그 많은 언니들.
부담스러울 정도로 달라붙었지만, 그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을 향한 사랑이 가득 담겨있던 바로 윗 언니인 팔녀.
이제는 다른 자매의 눈치를 보며 경쟁하지 않아도 되었다. 오로지 행복한 미래만이 눈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반드시 그랬어야 했다. 하지만 행복은 단 하루 만에 박살 났다.
어제 그토록 자신을 사랑스럽게 보던 마마의 두 눈은 무섭게 자신을 노려보고는 알지도 못하는 장소에 버리고 떠나갔다.
자신에게 그렇게나 관심을 보이던 언니들은 화난 마마를 두려워하며 끌려나가는 자신을 외면했다.
유일하게 자신을 구하려던 팔녀는 다른 언니들의 무정한 손길에 붙들려 자신을 구해주지 못했다.

' 이제 어떻게 하는테치? '

집에 돌아갈 수는 없다. 마마는 돌아온다면 자신을 죽인다고 했었다.
다른 오바상한테 길러 달라고 할 수도 없었다. 입에서 침을 흘리며 다가오는 두 오바상의 모습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마마의 말대로 혼자 살아야 한다. 어떻게?
밥이 필요하다고 배가 아우성을 치고 있지만, 구녀는 푸드를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어린 자실장이 버티기 힘든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몸을 덜덜 떨리게 하고 있지만, 어떻게 하면 집을 구할지 알지 못한다.
가족의 따스한 품에서 쫓겨난 자신은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

자신이 그렇게나 큰 잘못을 한 것일까? 멈추지 않는 눈물을 옷으로 닦으며 구녀는 생각했다. 
가족이 모두 잠들었을 때 일어난 자신은 너무나 배고팠다. 그때 푸드를 먹지 않았다면 자신은 분명히 무사하지 못했을 것이다.
마마의 잘못이었다. 마마가 팔로 가린 덕분에 젖을 먹을 수가 없어 부득이하게 푸드를 먹어야 했다.
보존식 상자를 마마가 제대로 닫지 않아 냄새가 새어 나오게 한 것도 마마였다.
잘못은 마마도 같이했는데, 그 대가는 자신만 치르게 되었다. 이건 부당한 일이었다. 

자신을 버린 미도리를 끝없이 원망하던 구녀는 곧 눈을 감으며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보존식이 그렇게나 중요하다고 팔녀가 알려줬는데도 푸드의 맛에 매혹되어 가족들이 자는 사이에 몰래 먹은 것은 자신이었다.
차라리 죽을힘을 다해 마마를 깨웠다면, 자신은 마마의 밀크를 배불리 먹고 지금도 집 안에서 언니들의 보살핌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자신이 문제였다. 주어진 행복을 제 발로 걷어찬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다.
무릎을 구부린 구녀는 팔로 다리를 감싼 뒤 말없이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조금만 쉬었다 가야겠다고 앉은 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이제 구녀는 손 하나도 움직이기 힘들었다.
차갑게 얼어가는 몸과 계속되는 자책에 찌르듯이 아픈 소중한 돌.
혹시 마마가 이제라도 반성했냐며 자신을 데리러 온다는 덧없는 희망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육체와 정신 양쪽으로 고통받는 구녀는 더는 사고를 이어갈 수 없었다.
점점 더 아파지는 가슴을 손으로 부여잡은 구녀는 고통에 몸을 구부리며 땅에 엎드렸다. 

' 오마에는 이제 와타시의 자가 아닌데스. '


" 마마... 와타치... "



추위에 오들오들 떨던 작은 자실장의 여린 몸은 서서히 활동을 멈추고 있었다. 어린 자실장의 진심 어린 후회는 이미 늦었다. 

극도로 스트레스를 받은 구녀가 언제라도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아직 구녀가 살아있는 이유는 죽고 싶지 않다는 간절한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강한 염원이 다시 한번 구녀의 본능을 깨웠다. 
위석은 구녀를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을 날려버리기 위해 다른 생각을 불어넣었다.

가슴을 부여잡은 채 몸을 구부려 엎드렸던 구녀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었다. 푸드가 귀하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들실장이나 해당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푸드를 마음껏 구할 수 있다는 공원의 보스 미도리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보존식을 몰래 먹었다고 쫓아낸 것은 어디까지나 핑계임이 분명했다.

자신은 ' 선택받은 자' 였다. 
같이 태어난 자매 중에서 홀로 선택받고,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먼저 태어난 자매 중 누구도 받지 못한 대우를 받은 태생부터 다른 존재였다. 선택받은 자는 이렇게 다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귀한 존재였다. 
아직 갓 태어났는데도 이렇게나 뛰어난 존재인데 성장해서 어른이 되면 어떻게 되겠는가? 필시 공원의 보스인 마마도 스스로 보스의 자리에서 물러나서 선택받은 자에게 보스의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제까지 그렇게나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마마가 자신을 되지도 않는 트집을 잡아서 솎아낸 이유일 것이다.
확실했다. 분충은 선택받은 자인 자신이 아닌 똥마마가 분명하다.

해야 할 일은 정해졌다. 응당히 물려줘야 할 보스의 자리를 자신의 욕심 때문에 수작질을 부린 분충을 처벌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아무리 고귀해도 자신은 아직은 어린아이에 불과하지만, 분충은 자를 여러 번 독립시킨 어엿한 성체실장. 더욱이 공원의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보스이다. 
이전의 보스와 부하들을 홀로 쓸어버렸으며, 말만 들어도 무서운 괴수인 고양이도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잡는다는 괴물이었다. 
자신의 고귀함에 탄복한 다른 어른들을 부하로 삼는다고 해도, 무능한 그들의 힘만으로는 자신도 함께 갈가리 찢길 게 뻔했다. 
같은 동족을 가볍게 능가하는 괴물. 그 괴물조차 가볍게 죽일 수 있는 괴물 중의 괴물이어야 자신의 복수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괴물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걷는 구녀의 두 눈엔 복수심이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소란이 일어난 지 하루가 지났다.
아침 시간이지만, 미도리의 집 안에서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고 조용히 푸드를 씹어먹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마음의 정리를 마친 미도리와는 달리, 아직 미도리의 자들은 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에 식탐을 고치느라 고생했고, 지금도 먹는 것을 좋아하는 오녀는 깨작거리며 푸드를 먹고 있었다. 
언제나 활기차고 가족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팔녀도 말이 없었다. 
팔녀는 푸드를 한입 먹고 오물거리다가 옆을 돌아보더니 고개를 숙여 팔로 눈물을 쓱 훔치는 일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금은 없는 구녀의 빈자리가 집안의 분위기를 무겁게 하고 있었다.

미도리도 푸드를 씹으며 동생을 잃은 자들의 침울한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자를 솎아낸 자신도 슬펐지만, 자들의 상심은 훨씬 큰 듯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생겼던 동생이었기 때문이었을까.
특히, 예상했던 것보다 크게 상심한 팔녀의 모습이 눈에 밟혔다.
직접 말은 하지 않았어도 동생을 잃은 상처가 남아있던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제처럼 발광할 정도일 줄은 미처 알지 못했다. 

팔녀는 착한 자였다. 어제 분충을 솎아내고 돌아온 자신을 아무 원망도 없이 퉁퉁 부은 눈으로 맞이할 정도로 마음씨가 고왔다.
차리라 자신을 원망이라도 했었다면 더 나았을 텐데, 이번에도 팔녀는 속으로 자신의 슬픔을 삭일 것이다. 
고의는 절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은 또다시 팔녀의 앞에서 동생을 솎아내야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상처 입은 팔녀를 달랠 수 있을까.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어 답답한 미도리의 입에서는 절로 한숨만 나왔다.

침울함에 빠진 가족들의 정신을 깨운 것은 밖에서 들린 고함이었다.


" 똥마마는 얼른 나와서 정의의 심판을 받는테칫! "

" ... 구녀쨩인테치? "

팔녀의 중얼거림에 모두 문을 바라보았다.
두 번 다시 볼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구녀의 귀환. 그러나 자들의 얼굴은 결코 밝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구녀는 분충이 되었기에 쫓겨난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밖에서 구녀가 한 말은 누가 들어도 분충이나 할 말이었다. 
분충을 도와줄 수는 없었다. 자매들은 어린 동생의 안전을 걱정하며 마마가 나서기 전에 얼른 도망가기를 바랬다.

구녀의 목소리를 들은 미도리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쫓겨난 자가 자신의 힘으로 집에 돌아온 것은 제법 놀라운 일이지만 별것도 아니었다. 다시 쫓아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말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겨울이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었다. 
갓난아이가 밖에서 하루 지내고 멀쩡히 돌아다닐 만큼 따뜻한 날씨가 아니다.

더욱이 근래에 공원에 사는 들실장들은 겨울을 지내기 위한 보존식을 막바지까지 모으느라 필사적으로 돌아다니고 있다. 
그런데 너무나 잡기 쉽고 통통한 고기가 보호자도 없이 돌아다니는데도 가만히 놔뒀다고? 들실장이라면 절대 그럴 리 없다.
분명히 다른 조력자가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조력자는 절대 선의를 품고 찾아온 건 아닐 것이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미도리는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 준 붉은 마검을 쥔 손을 등 뒤로 숨기며 문을 열고 나갔다.
미도리의 자들은 서로를 마주보더니 조용히 미도리의 뒤를 따라 나갔다. 



미도리는 신중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방금 목소리가 들렸던 구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뒤따라 나온 미도리의 자들도  이곳저곳을 살피며 구녀의 모습을 찾았지만. 누구도 찾을 수 없었다. 

" 테프프. 바보인테치? 와타치는 여기인테치! "

들려오는 구녀의 목소리를 따라 미도리와 자들의 시선은 저절로 위를 향했다.
구녀는 까마득히 높은 곳에 앉아서 미도리와 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단순히 햇빛의 역광을 받는 것에 불과했지만, 자들의 눈에 비치는 구녀의 몸은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멍하니 구녀를 바라보던 자들은 공중에는 누구도 앉을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자연스럽게 구녀의 옆을 살피는 미도리의 자들은 그제야 구녀 옆에 커다란 얼굴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얼굴의 주인은 분명히 인간이었다! 

그 남자는 구녀가 소리 지르기 전부터 이미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단지 동생을 잃었다고 슬픔에 빠져서 주의력이 흩어진 자들이 뒤늦게야 알아챘을 뿐이었다.
어쩌면 남자의 옆에 있는 나무의 색과 비슷한 바지의 색깔이 자들이 남자를 발견하기 어렵게 했을지도 모른다.
경악한 표정을 짓는 자들과 달리 이미 알고 있던 미도리는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뒤로 숨긴 보검을 슬며시 집 안으로 던졌다.

" 여기인테치. 노예! 와타치를 땅에 내려놓는테치! "

작은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떠드는 구녀를 남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살짝 내려주었다.

" 테에? 쫒겨났던 막내쨩이 돌어온테치! "


평소에도 눈치가 없다고 핀잔을 듣던 칠녀는 곧바로 장녀와 차녀에게 입이 틀어막혔다.
다른 자매들은 구녀의 뒤에 가만히 서 있는 인간을 흘끔흘끔 보고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서 인간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자매들의 눈에 강한 호기심이 깃들었다.

마마는 늘 인간은 위험한 존재라고 했다. 힘센 마마도 고작 인간의 자한테 맥없이 쓰러질 정도로 강하다고 했다.
또한 인간은 위험하다고 했다. 가끔 멀리서 들리는 처참한 비명은 다 동족을 괴롭히는 학대파라는 인간들의 소행이라고 했다.
그래서 가끔 다 같이 나갈 때는 인간들을 피해서 빙빙 돌아갔기 때문에 하루를 전부 사용하곤 했었다.

하지만 눈앞의 인간은 별로 위험해 보이지 않는다. 자신들 앞에서 그저 조용히 서 있을 뿐이다. 
구녀는 인간에게 노예라고 함부로 말했지만,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저렇게나 크고 강한 인간이 구녀의 노예일 리가 없다. 
운치굴 안의 독라들을 보면 알듯이 어디까지나 노예는 자신보다 약한 존재이다. 

그렇다면, 분수대에 찾아온다는 애호파 인간일까? 실장석을 좋아한다는 애호파 인간이면 어린아이의 무례한 말도 용서할 것 같다. 
집에서 쫓겨나서 애호파 인간과 같이 돌아온 구녀. 구녀는 말로만 듣던 사육실장이 된 것일까? 자신도 사육실장이 될 수 있을까?
아직 교육받았던 지식을 완전히 새기지 못한 몇몇 어린 자들의 눈이 몽롱해졌다.

자매들의 선망 어린 눈빛을 받아 우쭐해진 구녀는 가슴을 앞으로 잔뜩 내밀며 거만한 걸음걸이로 인간의 주위를 빙빙 돌았다.
인간 노예를 가지고 있다는 우월감을 마음껏 뽐내던 구녀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미도리에게 말을 걸었다.

" 와타치가 분충이라고 쫒아낸테치? 기분이 어떤테치?

" ... "

대답하지 않는 미도리의 모습에 마마가 자신이 끌고 온 인간 노예에게 겁먹었다고 멋대로 생각한 구녀는 더욱 기고만장해졌다.

"와타치는 닝겐을 메로메로해서 사육실장이 돼서 복수를 위해 찾아온테치. 마마는 인간 노예를 부려본 적이 있는테치? "

" 구녀챠가 사육실장이 되는테치? 와타치도 세레브해지고 싶은테치... 읍! "

다시 철없는 말을 꺼낸 칠녀는 풀려나기가 무섭게 곧바로 언니들에게 도로 입이 틀어막혔다.

" 테프프, 오네챠들도 와타치에게 무릎 꿇고 부탁한다면 안될 것도 없는테치! 하지만 마마는 안되는테치! 와타치를 쫓아낸 마마는 닝겐 노예를 시켜서 독라로 만들것인테치! "

' 멋대로 지껄이고 있는데스. '

가슴을 앞으로 쭉 내민 채 멋대로 지껄이는 구녀의 행태에 힘이 잔뜩 들어간 미도리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당장이라도 저 분충을 반으로 찢어버리고 싶지만, 인간이 있는 이상은 자신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 ... 와타시의 실수였던데스. 분충이 되었지만 갓 태어난 아이를 솎아내는 게 너무 가여워서 쫓아내기만 해서는 안 됐던데스. "

분한 듯이 조용히 중얼거리는 미도리. 그 말을 들은 구녀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길길이 날뛰며 발광하기 시작했다.

" 테챠아앗! 분충은 오마에인테치 똥마맛! 태어난 자를 다음날에 내쫓는 마마가 어디 있는테치! 오마에같은 분충은 더는 살 자격이 없는테챠앗! 닝겐! 얼른 저 분충을 박살 내는테치! "

구녀를 땅에 내려놓은 뒤 가만히 서 있던 남자는 한 발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치프픗 거리며 웃고 있는 구녀의 몸을 짓밟았다.

" 치벳! "

" 일단 이 분충은 좀 치워두고, "

남자는 마치 더러운 것을 밟았다는 듯이 근처의 풀에 들어 올린 발을 비볐다.

" 구... 구녀쨔앙! "


눈앞에서 목격한 구녀의 최후에 팔녀는 비명을 질렀다..
그 비명은 가족들에게 구녀가 비록 잘못해서 쫓겨나 가족에 큰 위기를 불러들인 분충이었지만, 한때는 자신들의 귀여운 막내였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 귀여운 막내를 너무나 간단히 짓밟아 죽인 인간을 본 미도리의 자들의 눈에는 엄청난 경계심이 서렸다.
골판지 앞의 실장석들이 모두 자신을 보는 것을 확인한 남자는 주머니를 뒤적여 링갈을 꺼내서 전원을 켰다.

" 반갑다. 나는 실장석 관련 논문을 쓰고 있는 히로아키라고 한다 ... "

' 어째서인테치? 와타치는 분명히 마마를 박살 내라고 했는데 왜 노예가 와타치를 배반한... '

이미 바닥에 눌어붙은 구녀의 의식은 암흑 속으로 잠겼다.



" 아 이런, 이번에도 꽝이군. "

공터를 빠져나와 수풀 속을 걷던 히로아키는 투덜거렸다. 
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자신을 극도로 경계하던 자실장들과 친실장의 시선을 뒤로하고는 빈손으로 떠나야만 했다. 
기대했던 만큼 그리 좋은 날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어제의 일이었다. 자신에게 다가와 시끄럽게 구는 분충일가를 짓밟아 구제한 히로아키 벤치에 털썩 앉았다.
요즘 찾는 게 죄다 멍청한 분충이라 우울한 히로아키의 입에서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분충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자를 희생시키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
다시 말하자면 관찰하는 재미가 없다. 분충 밑에서 자란 새끼 실장석이 사랑을 받으며 자랐을 가능성은 거의 없으니, 해부되는 자실장이 울부짖으며 마마를 찾을 때 정작 그 마마는 그 새끼는 잊고 보답으로 받은 콘페이토나 핥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는 곤란했다. 사랑하는 마마가 자신을 팔아넘겼다는 배신감과 절망감에 휩싸인 자실장이 죽음을 앞두고 하는 반응과 자를 팔아 치운 친실장의 반응을 관찰하는 게 같이 이뤄지지 않으면 그냥 분충에게 먹을 것을 준 일에 불과했다. 
자를 사랑으로 길렀으면서도 그런 어리석은 거래를 받아들이는 녀석이 필요했다. 
고민을 거듭하는 히로아키는 문득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상념에서 깼다.

소리는 히로아키의 발치에서 들리고 있었다. 웬 자실장이 겁도 없이 자신에게 다가와서 짖어대고 있었다.  
주변에 널린 동족의 시체를 보고도 인간에게 접근하다니 여지없이 분충이었다. 히로아키는 한 발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나 히로아키는 자실장을 밟지 않고 발을 도로 제자리로 돌렸다. 자실장의 목숨을 구한 것은 히로아키의 뛰어난 관찰력이었다.

이 자실장은 크기가 상당히 작고, 옷이 들실장답지 않게 대단히 온전하고 깨끗했다. 상태를 보아하니 태어나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갓 태어난 새끼가 멋대로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친실장에게 솎아내진 것이 분명했다,
갓 태어난 자실장을 분충이라고 솎아내는 친실장이라면 똑똑한 녀석이다. 그런 녀석은 접촉해볼 만한 가치가 충분했다.
생각을 정리한 히로아키의 앞에서 자신의 목숨이 찰나에 생과 사를 넘나드는지도 모르는 멍청한 분충은 계속 짖고 있었다. 
오랜만에 얻은 좋은 기회를 한순간의 화풀이로 날릴 수는 없었다. 히로아키는 주머니에 든 링갈에 손을 가져갔다.

진부하면서도 참신했다. 보존식을 멋대로 손댔다가 쫓겨났다는 어리석은 자실장은 자신은 마마의 질투에 의해 버려졌다고 주장했다.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을 자신에게 메로메로 됐다고 착각했는지 자실장은 히로아키를 노예라고 부르며 복수를 행할 것을 명했다.
지금까지의 경험에 의하면, 솎아낸 분충을 곧바로 데려온 인간을 경계하지 않는 녀석은 없었다. 바로 가면 역효과를 낼 뿐이었다.
자신의 기대를 배반하고 분충 짓을 한 새끼에 대한 분노를 조금이라도 삭일 최소한의 시간을 주어야 했다.
당장 친실장에게 가자는 자실장에게 복수를 위해서는 준비가 필요하다며 살살 달랜 히로아키는 자실장을 집어 집으로 데려갔다.



자실장이 따뜻한 물 속에서 거품을 가지고 장난을 치고 있을 무렵에 히로아키는 자실장에게 주기 위한 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참이나 냉동실을 뒤적거리던 히로아키는 구석에 박혀 있는 자실장용 스테이크를 꺼내 들었다. 
냉동실에 오래 넣어둔 음식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어차피 자신이 먹을 것은 아니었다.
전자레인지에 넣은 스테이크가 해동되기를 기다리는 히로아키는 자실장이 했던 말을 떠올려봤다.

자신을 진정한 보스라고 주장하는 이 멍청이가 자신의 관찰대상인 원사육실장의 자라고 했을 때는 히로아키는 쾌재를 불렀다.

몇 년 전 처음 본 원사육실장 미도리. 당시에는 자를 아끼긴 하지만 그냥 평범하게 멍청한 분충이던 녀석에게 별 기대는 없었다.
그저 사람들의 눈에도 잘 띄지 않는 곳에 집을 지은 것을 보아 조금 오래 살지 않을까 했던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 평가는 달라졌다. 점점 강해지고 똑똑해지던 녀석은 어느새 공원의 보스를 실각시키고 보스가 되었다.
일개 들실장인 주제에 놀라운 일을 해낸 미도리에게 히로아키의 관심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좀 더 일찍 관심을 가졌다면 공원의 보스가 바뀌는 그 현장을 목격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지 못했으니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 후론 녀석이 경계하지 않도록 일정 주기의 간격을 두고 접촉했다. 노력이 빛을 봤는지 녀석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자를 아끼는 미도리는 결코 자신의 자를 히로아키에게 넘겨주지 않았었다. 
매번 유혹해도 넘어가지 않던 그 미도리가 어느 날 자신의 손으로 자를 순순히 건낼 때는 얼마나 놀랐던지... 
그 희생양이 자신의 배를 겨눈 날카로운 메스를 보고 발광하며 말하는 내용을 듣고 자신의 손을 빌린 솎아내기임을 알았지만 기분이나쁘진 않았다. 버려지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 깨닫고 절규하는 자실장의 모습은 정말 볼만했으니까.

그 뒤로는 다시 자를 건네기를 거부하는 녀석이었지만 오늘 좋은 기회를 잡은 것 같다.
그걸 위해서는 이 정도 수고는 감소해 줄 수 있다. 히로아키의 눈에는 스테이크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는 자실장이 비쳤다.
싸구려 스테이크를 처먹고 튀어오른 배를 두드리며 보스의 자리에 오른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는 자실장과 오랜만에 좋은 표본이 생길것 같다고 좋아하는 히로아키. 서로 생각하는 것은 달랐으나 내일이 오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똑같았다.

그 기대감을 품고 날이 밝기 무섭게 자는 자실장을 깨워 서둘러 미도리의 집에 찾아온 것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번에 솎아낼 자는 그 분충이 전부인 듯 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밟아버린 분충의 시체에 울면서 달려가다가 미도리에게 붙들린 작은 자실장이 문제였던 거 같다.
색눈물을 줄줄 흘리며 바동거리는 자실장을 품에 꼭 안으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미도리의 모습에 실패를 직감한 히로아키는 안타깝게도 예상 그대로 분충을 돌본 보람도 없이 빈손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솎아내진 분충에 저렇게나 집착하는 자실장이라니, 저런 멍청이어여도 분충은 아니어서 솎아내지 않고 기르는 건가? 
어찌되었건 녀석은 공원의 보스이니 멍청한 자 하나 있다고 일가실각의 위기를 겪지는 않을 것이다.

" 뭐, 다음 기회도 있으니까 "

미련을 떨치며 걸음을 옮기는 히로아키의 머릿속에는 아까 밟아버린 분충 자실장 따위는 있지 않았다.

.
.
.
.

" 그럼 다녀오는데스 "

아침에 있었던 달갑지 않은 깜짝 이벤트에 놀란 자들을 달래는데 애먹던 미도리는 늦게나마 집을 나섰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너무나 큰 실수였다. 분충에게 베풀었던 최소한의 자비가 그렇게 큰 위험이 되어서 돌아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만약 관찰파라는 특이한 인간이 아니라 단순한 학대파나 학살파가 찾아왔다면 자들은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도 위험했을지 모른다. 
자들을 엄하게 가르치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은 엄하지 못했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 이 없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으리라 속으로 다짐하던 미도리의 눈에 아까 땅의 얼룩이 된 구녀의 잔해가 보였다.

" ... "

한참 동안 뚫어지게 쳐다보던 미도리는 구녀의 잔해에 다가갔다.

' 테....어디인테치. 아무것도 안 보이는테치 '

히로아키나 가족들의 생각과는 달리 구녀는 살아있었다. 
비록 뚫어지게 살펴야 자실장의 시체라고 겨우 인식할 만큼 산산조각나 있었지만, 구녀는 엄연히 살아있었다. 
그러나 구녀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니었다. 시각 정보를 볼 눈도, 소리를 듣는 귀도 이미 고깃덩어리가 된 다른 신체 부위와 함께 땅에 붙어있었다. 
숨을 쉬게 할 폐도 납작해졌지만, 죽고 싶지 않은 구녀의 마음에 반응한 위석이 목숨을 끈질기게 붙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할 듯이 보였다. 온몸이 산산이 부서져 즉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와 어둠 속에 홀로 남겨진 듯한 스트레스는 구녀의 목숨을 이승에 붙들고 있는 위석의 빛을 점차 희미하게 만들고 있었다.  

' 아픈테치. 추운테치.... '

태실장 시절의 미도리의 어두운 체내도, 처음 발을 디딘 집 안의 풍경도 이 정도로 어둡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오로지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은(이미 부서졌지만) 아픔만이 가득했다.
어둠 속에서 점차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드는 구녀였지만, 저항의 의미도 없이 의식은 점점 더 몽롱해질 뿐이었다. 
오히려 포기한다면 고통에서 벗어나 편안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저항할 수 없는 죽음의 손길이 구녀에게 점차 다가오고 있었다.

공포에 떨던 구녀의 몸이 위로 들어 올려졌다. 
눈으로 볼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없었지만, 자신의 몸을 안아 드는 투박하고 거친 손은 너무나도 친숙하고 따뜻했다. 
아직 눈이 남아 있었다면 구녀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을 것이다. 구녀는 자신을 들어 올린 게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 마마인테츄? '

미도리의 품에 안긴 구녀는 자신이 한 일을 되짚어봤다. 
자신은 식욕에 져서 귀중한 푸드를 몰래 먹었으며, 실장석따위는 순식간에 죽여버릴 수 있는 위험한 인간에게 가족들을 노출했다. 
심지어 자신은 마마에게 폭언을 뱉고 인간에게 명령해 죽여버리려고 했었다. 
원망과 욕심이 사라지고 뒤돌아본 자신의 행동은 스스로 생각해도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마는 다친 자신을 살피고 있다. 마마가 자신을 용서했다. 

' 와타치가 잘못한테치. 와타치 이제 착한 아이가 되는테치... 마마 미안한테츄. '


이제 다시 가족들과 살 수 있다. 안도감을 느낀 구녀는 천천히 잠에 빠졌다.



미도리가 걸을 때마다 느껴지는 흔들림에 적응하여 잠들었던 구녀의 의식이 깨어났다.
어느새 미도리는 더는 걷지 않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 마마 뭐하는테치 ? '

구녀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은 미도리는 제자리에 한참이나 가만히 서 있었다. 
상황을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구녀가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구녀는 자신의 몸이 공중에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낯설지 않은 느낌을 받았다. 아까 자신을 밟아버린 위험한 인간이 자신을 땅바닥으로 내려줄 때 느꼈던 그 느낌.
생각을 마치기도 전에 구녀의 몸은 바닥에 세차게 충돌했다.

' 테챠아아앗! '

히로아키에게 짓밟힌 구녀의 모습이 자실장의 시체라고 간신히 알아볼 정도였다면, 지금 구녀의 몸은 그냥 고깃덩이였다.
그 충격에도 용케 버틴 위석의 색은 상당히 바래고 실금이 가 있었다.

' 마마 어디인테치.. 아픈테치... 얼른 와타치를 다시 들어올려주는테치. '

고통에 신음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구녀는 미도리를 찾았지만 어떤 반응도 없었다. 
온몸이 너무나 아팠다. 그리고 몸에 들러붙은 끈적끈적한 물체는 너무나 기분이 나빠서 당장이라도 몸에서 떼어내고 싶었다.. 
어느새 구녀의 몸이 다시 공중으로 들어 올려지고 있었다.

' 누..누구인테치? '

마마보다 부드럽고 작은 손, 그러나 왠지 차갑기만 한 손.
구녀의 의문에 대한 대답은 고통이었다. 그 차가운 손이 자신의 일부분을 덥석 쥐더니 거칠게 잡아 뜯어버렸다.

' ~~~~~~~~ '

신체가 찢겨나간 부위에서 느껴지는 너무나 뜨거운 느낌에 구녀는 아무도 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질렀다.
고통에 정신을 붙잡지 못하던 구녀는 또 다른 손이 자신의 몸에 닿는 것을 느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 그. 그만두는테치! 와타치는 보스의 자인....테챠아아앗! '

아무리 그만두라고 소리 질러도 말을 듣지 않았다. 손이 뻗어올 때마다 구녀의 몸은 찢기고 있었다.

몇 번이고 찢기던 구녀는 손과는 다른 느낌의 무엇인가가 자신의 몸에 박히자 그제야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자신은 먹히고 있었다.

' 마...마... 도와주... '

누구도 들을 수 없는 구녀의 애원은 미도리에게 닿지 않았다. 도움을 간절히 바라는 구녀의 몸에 차가운 손이 수없이 뻗어왔다.



매일 운치를 밥으로 먹어야 했던 운치노예들에게 우연히 떨어진 고깃덩어리.
우연히 고기 근처에 있던 엄지실장이나 자실장들이 고기를 조금 먹는 행운은 금세 사라졌다.
운치와 비교하면 천상의 맛인 고기에 눈이 돌아간 독라들은 구녀의 살점을 손에 넣기 위해 다른 독라들과 난투극을 벌였다. 
고기를 차지하려고 달려온 다른 자실장들은 고기를 먹고 있던 자실장들을 쫒아내기 위한 주먹을 날렸다.
벌벌 떨며 도망간 엄지들을 무시하고 먼저 있던 자실장들을 두들겨 패 울게 만든 자실장들이 고기를 차지했다는 기쁨도 잠시, 그들은 소란에 이끌려 온 다른 성체 독라들의 손에 먼저 쫓겨났던 자실장들보다 더 심하게 두들겨 맞아야 했다. 

" 테챠아악! "

한 독라 자실장이 비명을 지르며 튕겨 나왔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엎어진 자실장은 기절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손에 고기 조각을 쥔 한 성체 독라실장이 자실장을 노려보며 성큼성큼 걸어 다가갔다.
아니, 가려고 했었다. 씩씩거리며 자실장을 쫒아가려던 독라는 자신의 고기 조각에 손을 몰래 뻗는 다른 자실장을 손으로 후려쳤다. 

" 테벳! "

감히 자신의 몫을 노린 또 다른 독라 자실장을 용서할 수 없었던 성체 독라는 그 자실장을 아주 곤죽이 될 정도로 밟아댔다.
그러나 맞던 자실장의 큰 비명은 불행하게도 다른 성체들의 주의를 끌어버렸다. 고기조각을 보고 충혈된 눈으로 다가오는 다른 성체들을 본 성체 독라는 엎어져 있는 자실장의 응징을 포기하고 다른 실장석과 난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폭력과 고함, 그리고 비명.
절망과 무기력에 빠진 독라들의 거주처 공용 운치굴에 끔찍한 살육의 장이 열렸다.
고기가 너무 적다는 것을 깨달은 비교적 똑똑한 실장석들은 다른 이들 몰래 다친 자실장이나 엄지 실장을 갈가리 찢어서 몰래 먹었다.
좀 더 막 나가는 독라들은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는 성체 독라를 발견하면 자판기로 만들어서 싱싱한 저실장을 낳게 해서 먹었다. 
갑자기 일어난 혈풍에 기겁한 굴 위의 깡패실장들은 하나둘씩 운치굴 위로 모여 또 다른 혈풍을 예고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독라 자실장 엎어져서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
그러나 죽은 것은 아니었다. 쫑긋거리는 귀가 아직 자실장이 살아있음을 알려줬다.
귀를 기울이며 동향을 살피던 자실장은 성체끼리 싸우는 소리가 자신에게서 멀어진 것을 감지하자 엎어진 그 상태로 조금씩 뒤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누구에게도 들키기 않게 조심히 기어가던 자실장은 높게 쌓인 운치 더미 뒤로 이동해 자신의 몸을 감춘 뒤에 슬그머니 일어났다.

" 테히... 아픈테치... "

땅을 기어 다닌 자실장의 무릎은 까져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으로 무릎을 만진 자실장은 따끔한 통증에 울상을 지었다.
다친 다리에 입김을 호호 불어서 통증을 줄이려던 자실장은 문득 예전의 일이 생각났다.
그때에는 넘어져서 우는 자신을 마마가 일으켜 세워서 품에 안아서 이동했었다.
마마의 따뜻한 품과 자신을 달래던 고운 노래를 생각하니 눈물이 핑 돌았다.

다정하고 상냥했던 마마.
너무나 사랑했던 자신의 마마.
이제는 다시 볼 수 없는 마마.

' 장녀! 도망가는데스! 반드시 살아남는데스! 반드시 살아서 주인님을... 데갸악! '

' 마마! '

' 데프픗, 버려진 사육실장이 주인님을 찾는다니 웃긴데스. 골판지째로 버림받은 주제에  자기가 버려진 줄도 모르다니 바보아닌데스? 오마에타치같이 공원의 질을 흐리는 분충들은 얌전히 노예가 되는 게 좋은데스! '

' 어이 오마에! 얼른 옷을 벗고 리본을 내놓는데스! 오마에 같은 노예는 그런 세레브한 옷을 가질 자격이 없으니 와타시의 자에게 선물로 주는데스! '

' 싫은테치! 주인님이 선물해주신 소중한 옷인테치! 아.. 안 되는테치! 뺏어가지 마는테치!  마마! 마마! 도와주는테치! 마맛! '

' 데에에... 데? '

' ...마마? '

' 데프픗. 그거 한 대 맞았다고 바보가 된데스? 역시 사육분충의 운명은 노예임이 분명한데스. 오마에도 얌전히 노예가 되는데스! '

' 노예는 싫은테치! 와타치는 노예가 아닌테치! 테갸악! '

' 자꾸 시끄럽게 굴면 노예로 만들지 않고 그냥 먹어버리는데스. 닥치는데스! '

' 테끄윽.... 테끄윽... '

' 뎃데로게~ 뎃데로게~ 사육분충을 잡은데스~ 보스한테 보상 받는데스~ 뎃데로게~ 뎃데로게~ '

' 테.. 테에엥! 테에엥! 테갸악! '

' 닥치는데스! '

과거의 일을 떠올려 안색이 어두워진 자실장은 운치 더미에서 목을 빼꼼 내밀며 주위를 살폈다.
이미 성체들끼리의 다툼이 된 운치굴의 쟁투에 다시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크게 다치지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었다.
한 성체 독라가 차지한 고기조각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부럽게 보던 독라 자실장은 자신의 손을 내려보았다.
다른 동족들이 고기에 정신이 팔려있을 때 혼자서 몰래 챙겨서 품에 안았던 것. 그것은 고깃덩어리와 같이 있던 소중한 돌이었다.

예전에 들은 바 있었다. 동족의 소중한 돌을 먹으면 강해질 수 있다고. 정작 그 말을 햇던 독라 오바상들은 동족식을 하려고 했다는 명목으로 자판기가 되어버렸지만, 강해질 수 있다면 위험은 감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말로 먹을 수 있을까? 매일 운치만 먹었던 자실장의 눈에 소중한 돌은 너무 단단해서 예전에 사육실장일 때 보았던 사탕이라는 것과 비슷해 보였다. 

그래도 먹어야 했다. 자신을 위해서, 마마를 위해서. 
자신을 독라로 만든 깡패실장은 마마와 자신이 버려졌다고 했지만 믿지 않는다. 
주인님은 착하게 기다리고 있으면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고 하셨다. 
반드시 이곳에서 살아나가서 주인님에게 고하리라. 주인님이 마마의 복수를 해주실 것이다.

그러나, 만약 효과가 없다면? 소중한 돌을 먹었는데도 자신이 전혀 강해지지 않는다면?
아니면 강해졌는데도 운치굴을 빠져나갈 수 없다면? 정말로 강해지면 운치굴을 혼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동족에게 상처받고 노예 생활로 의심이 증폭된 자실장은 손안의 소중한 돌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 와타치는 반드시 살아남는테치! "

간신히 마음을 다잡은 자실장은 고개를 도리도리 젓고 입을 크게 벌리고 소중한 돌을 입에 밀어 넣었다.
독라 자실장이 먹는 소중한 돌. 구녀의 소중한 돌은 이미 새까맣게 변해 주인의 의식을 놓아 보낸 지 오래였다.
눈물을 흘리며 그 까만 위석을 오독오독 씹어 먹는 자실장은 뒤에 나뭇가지를 든 깡패실장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 수 없었다.



운치굴의 소란에 잠시 눈길을 주던 미도리는 곧 관심을 끄고 비서실장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비서실장에게 지시를 내리는 미도리의 뒷모습을 운치굴 위에 서 있는 한 성체실장이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을 뗄 생각을 안 하는 성체실장의 목에 누군가 팔을 둘러왔다.

" 오마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데스? 보스를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보다니, 반역이라도 꿈꾸는데스? 물론 그럴 가능성이 한톨 만큼도 없는 건 아는데스. 오마에는 야심이 없는데스.  "

"그렇다면 혹시 연모인데스? 만약 오마에게 마라실장이었으면 주변의 깡패실장들이 오마에를 흠씬 두들겨 팼을지도 모를 만큼 뜨거운 눈빛이었던데스. "

" 그럴리 없는 건 오마에도 잘 알면서 왜 묻는데스? "

자신의 목에 둘린 팔을 툭 밀어낸 성체실장은 망설이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지 못해 작게 대답했다.

" ... 와타시는 단지 오늘 보스가 쓸쓸해 보인다고 생각했던데스. "

목에 팔을 둘렀던 성체실장은 눈을 깜빡거리더니 배를 부여잡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 데퍄퍄퍄퍗! 오마에, 매일 운치굴앞에만 있다가 보니 머리가 이상해진데스? 보스는 세레브한 집에서 자도 잔뜩 기르고 원한다면 콘페이토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는 그런 분인데스. 그런 분이 쓸쓸해보인다니 말이 되는데스? "

" 되지도 않는 이상한 상상은 그만하고 오마에의 일에나 집중하는데스. 빈둥거리다가 들키면 오마에의 마마처럼 ' 결전에 임하는 와타시의 마음에 찬물을 끼얹다니 용서 못하는데스. '라면서 운치굴 아래로 던져져서 노예들의 자판기가 되서 파킨해버리는데스? "

" 뎃! 무례한 농담인데스! 오마에야말로 와타시의 부하라는걸 잊은데스? 아무리 관대한 와타시라도 봐주는건 한계가 있는데스! "

" 데프픗, 친구끼리 그런 농담을 할 수도 있지 않는데스? 그것보다 오마에나 걱정하는데스. 저기 보스의 오른팔인 비서실장이 노려보는거 안보이는데스? 운치굴 담당인 오마에가 일을 안해서 노려보고 있다는데 푸드를 하나 거는데스. "

" 이미 다른 깡패실장들이 일하고 있는데스. 어차피 와타시나 오마에나 깡패실장보다 약해서 별 도움도 안되는데스. 정리가 끝나면 지시를 내려서 뒷정리를 하는게 와타시의 역할, 그리고 와타시를 돕는게 오마에의 역할인데스. "

" 그건 그런데스. 그럼 그때까지 수다나 떠는데스. 확실히 권력이 좋지 않은데스? 직접 나서지 않아도 부하들이 다 하는데스. "

" 데갸아아악! "

" 테갸아아악! "

" 레에에에엥! "

두런두런 잡담을 나누는 두 성체실장의 밑의 운치굴에서는 비명이 가득 울려 퍼지고 있었다. 
뜻밖의 학살극은 진압을 위해 내려온 깡패실장들의 무자비한 폭력에 금방 진압당했다. 
그 난리 통에 미도리가 던진 고깃덩어리는 혼란 속에 이리 치이고 짓밟혀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운치굴 담당실장은 비명이 잦아들자 정리하기 위해 옆에 있던 친구와 함께 운치굴로 내려갔다. 
운치굴로 들어가기 전, 운치굴 담당실장은 돌연 고개를 돌려 미도리를 보았다. 
이미 미도리는 길을 안내하는 부하의 안내를 받아 수풀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운치굴 담당실장은 자신이 보았던 보스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운치굴 위에서 한참을 가만히 서 있던 보스.
평소의 자신감에 가득 찬 모습이 아니라 어깨가 축 처지고 피로해 보이던 그 얼굴.
제자리에 서서 몇 번이고 팔을 올렸다 내리며 고기 조각을 던지기를 망설이던 그 모습.
이곳을 떠날 때 보였던 왠지 굽어보이는 등.

' 오늘의 보스는 왠지 쓸쓸해보였던데스. '

한 어린 자실장이 짧은 생을 마친 날.
아무것도 모르는 부하들에게는 고기를 적선한 보스의 은혜를 서로를 학살하는 난동으로 갚은 건방진 분충들을 때려죽인 날.
그날은 오랜만에 해가 화창한 초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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