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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죽음, 41번 실장 - 죽음편 1~2 (완)



1.

치익-
반짝이는 캔 뚜껑을 누르면 캔에서 공기가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조금 더 힘을 주면
따악!
하고 캔이 시원스런 소리를 내며 열린다.
열린 캔 입구에 코를 대고 숨을 한 번 들이쉬면 머리가 맑아지는 카페인의 냄새가 아찔하다.
그렇게 한껏 냄새를 음미하고 열려진 캔 입구에 입을 대고 커피를 한껏 들이키면
“꿀꺽, 꿀꺽, 꿀꺽….캬아!”
입속에 달콤 쌉싸름한 맛이 가득 퍼진다.
설탕과 감미료가 잔뜩 들어간 싸구려틱한 맛이지만 그 저렴한 맛마저 사랑스럽다.
“휴우…….”
캔커피. 들이키면 한숨 소리마저 편안하다.
단촐한 사무용 책상과 의자 몇 개만 놓여진 이 곳은 나의 가게, 실장숍 ‘실장학교’다.
불과 몇 시간 전에 모든 ‘교육’을 마치고 40번 실장석을 출하한 순간은 나의 일년 사이클 중 몇 안 되는 휴식 시간이다.
41번의 예약은 일부러 꽤 늦게 잡아놨다. 덕분에 모처럼 긴 휴식시간이 생겼다.

이번에 입금받은 액수도 꽤 많고 간만에 시간도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 해외로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지겹게 다녀왔지만 최신 정보 수집을 위해서 일본의 로젠사라도 한 번 더 다녀올까.
그러고보니 월간 짓소 이번 호 잡지에 나온 로젠사의 최신 위석적출 시스템은 꽤 괜찮았던 것 같은데 이번에 한 번 다녀올….
똑똑.
이런, 가게문에 휴업 팻말 거는 걸 잊었다.
사육실장 행동교정을 위해 방문한 사람일까?
“택배입니다.”
다행히 손님은 아니었다. 하지만 택배로 받을 물건 같은 것은 없었을텐데?
무슨 택배가 온 건지 이해를 못 한 나의 앞에서 택배원이 상당히 묘한 표정을 지었다.
“무표정님⋯맞으시죠?”
“⋯네?”
대학 시절의 별명이 낯선 택배원의 입에서 나오자 나는 꽤 당혹스러웠다.
뭔가 대체?
“네. 제가 맞는 것 같습니다.”

“⋯네, 그러면 여기 서명 부탁드립니다.”
그러니 서명을 하는 나의 손끝이 약간 부들거려도 택배원이 이해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택배원을 보내고나서야 나는 당혹감을 떨쳐내고 택배상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손에 들린 것은 상당히 가벼운 무게의 우체국 택배 골판지 상자였다.
윗부분 우측하단에는 실장학교의 주소와 ‘무표정 군’라는 글자가 꽤나 반듯하고 예쁜 글씨체로 정성스레 써져있었다.
보낸 사람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지만 짐작가는 곳이 있었다.
이 글씨체로 이 별명을 써서 택배를 보낼 사람은 내가 알기로 딱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참 예쁘게 웃던 여자였는데 말이지.’
나는 가위를 가지러 가면서 계속 생각했다.
그 여자가 뿌리던 향수가 장미향이었나? 
시트러스 향이었던 것 같기도한데.
맡으면 기분이 살짝 아찔해지는 그 향은 무엇이었을까.
“그래. 레몬향이었지.”
“센세를 말씀하시는테치?”
“음?”
정신을 차리고 택배 상자를 보자 나의 직업이자, 판매상품이자, 밥벌이. 인생의 반절을 차지하고 있는 생명체가 누워있었다.
실장석이 택배상자에 누워있는 것은 물론이고 그 실장석의 말은 더더욱 어처구니 없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건가?
“닝겐상, 안녕하신테치?”
실장석을 앞에 두자 나는 습관적으로 얼굴을 굳혔다.
옷은 깨끗.
운치 지리지 않았음.
크기를 보니 나이는 한 살을 넘기지 않았음.
인간을 두려워하거나 깔보지 않는 것을 봐서는 인간의 손에 자란 것으로 추측.
사육실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어리고 들실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깨끗함.
사육실장이면 인간에게 누워서 인사하는 무례를 저지를리가 없음.
여러가지로 따져보았을 때 사육실장의 자, 혹은 훈련 중인 사육실장 후보일 가능성이 높음.
‘센세’ 라는것은 그 여자를 말하는 말하는 것일터.
“닝겐상, 혹시나해서 말씀드리지만 와타시는 탁아당한게 아닌테치.”
나의 표정이 '불쾌'라고 인식했는지 자실장은 묻지도 않는 변명을 하였다.
“너는 누구지?.”
“와타시는 보시는 바와 같이 자실장인테치. 태어난지는 두 달 정도인테치. 센세가 와타시를 이 상자에 넣으시고 닝겐상께 보내신테치. ”
예의없이 누워있는 자세와는 달리 자실장은 정중하게 자신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그 정중함에 나는 위화감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의 브리더 경력에서 태어난지 두 달만에 이렇게 조리있게 말할 수 있는 실장석은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센세가 상자가 열리면 이것을 보여드리라고 하셨던테치.”
자실장은 드러누운 채 등 뒤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자실장이 내민 종이는 산뜻한 글씨체로 씌여진 손편지였다.
편지에서 희미하게 레몬향이 풍겼다.
그 향기에 나는 그때가 약간 그리워지고 말았다.

안녕 무표정군, 잘 지내니?
다른 지역에 있어도 네 소식은 꾸준히 들려오는구나.
이번 세레브 실장 대회에서 우승한 실장석이 네가 가르친 애라면서? 정말 대단해!
우연히 그 아이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정말 실장석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였어!
몸짓은 기품있고 말투에는 품격이 넘치는게 감동적이더라구.
아마 그 아이를 가르치느라 캔커피 꽤나 마셨겠지?
그런데 난 그 아이를 보면서 어째선지 너무나도 슬펐어.
왜 그랬을까?
어쨌든 이 편지를 보낸 건 택배에 있던 그 아이를 맡기고 싶어서야.
그 아이는 좀 특별해서 친실장에게도 버림받아서 내가 키우게 되었는데, 내 실력으로는 이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부끄럽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걸 너는 이해할 수 있길 바라며  보내니 잘 부탁해.
그 아이를 키우는데 들어가는 비용은 내가 지불할게.
그럼 잘 지내고 꼭 그 아이가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줘.
그럼 이만!
추신 : 어떤 점이 특별한지는 그 아이에게 직접 들어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허…….”
실로 자기주장 강하고 제멋대로인 그녀다운 편지였다.
때문에 나는 보내는 이가 써있지 않았어도 쉽게 누가 썼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굳이 보내는 이를 쓰지 않은 것은 내가 짐작할 것을 그녀도 알고 있어서겠지.
나와 그녀는 A대학의 실장교육학과 동기였다.
그다지 사교적이지 못했던 나와 달리 그녀는 쾌활하고 활기찬 말씨, 생글생글한 웃음으로 누구나와 친하게 지냈다.
기본적으로 발랄하고 모든 것을 즐기는 활기찬 여자였지만 동시에 자신의 표정과 말씨, 몸짓등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알고 그것을 무서울정도로 잘 활용하는 여자였다.
게다가 과 수석을 입학부터 졸업까지 단 한번도 놓치지 않은 그야말로 우리 과의 스타였다.
졸업 직후에 로젠사에서 바로 연구직으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어째서인지 거절하고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브리더계에 입문해, 특유의 사교성과 뛰어난 능력으로 최근에 이름을 날리고 있다.
특히 나의 넘버링 실장석과는 달리, 분충이 아니면서도 감정이 풍부하고 애정을 갈구하는 실장석들을 키워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 그녀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나에게 실장석을 보냈다?
꽤 똑똑해 보이는 녀석이지만 고작해야 생후 두 달된 실장석이다.
돈이 된다면 키우고 안 된다면 처분하면 그만인 그런 존재이다.
그런데 다른 브리더에게 그 자실장을 보낸다?
그것도 편지까지 동봉해서?
대체 어떤 의도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지만, 그 의도가 무엇인지는 나중에 천천히 생각해보고 일단 이 실장석을 처리해야할 터이다.
하지만 그 전에
“어째서 누워있는거지?”
명색의 브리더로서 실장석이 누워서 인간을 올려다보는 꼴은 다소 보기 힘들다.
“닝겐사마. 와타시도 닝겐사마 앞에서 누워있는 것을 대단히 무례하다고 생각하는테치.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으니 부디 이해해주길 바랄뿐인테치.”

나는 순간 그녀가 말한 ‘특별한 점’의 편린(片鱗)을 느꼈다.
이상하다.
이것은 절대 생후 두 달 된 자실장의 말씨가 아니다.
이정도라면 내가 말투와 지능교육을 반년 정도 해야 나올 만한 어휘와 문장이다.
대체 어떻게?
“어떤 이유지?”
하지만 실장석에게는 감정을 보이지 않는 것은 나의 지론이며, 특기이다.
당황한 기색을 애써 감추고 한 나의 질문에도 여전히 자실장은 택배상자에 누워서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아무것도 못 먹은지 이틀이 넘어서 팔과 다리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서 일어나지를 못하겠는테치.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남는 음식물 쓰레기라도 주실 수 있는테치? 움직일 수 있을 정도라도 부탁드리는테치.”
자실장의 말을 들은 나는 내 판단을 수정했다.
이것은 이상한 정도가 아니다.
이 자실장은 똑똑하다거나 예의바르다, 라고 치부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다.
아무것도 못 먹은지 이틀이나 된 실장석이 이렇게 차분하고 정중히 음식을 요구할 수 있을리가 없다.
나는 이 자실장에게 ‘왜 이렇게 똑똑한가?’ 대신 다른 의문이 들었다.
이것, 생물이긴 한건가?
“잠시만 기다려라. 푸드를 가져다주지.”
굳이 가져다주지 않을 이유도 없고, 관찰을 위해서도 푸드를 가져다주는 편이 나을 것이다.
가면서 자실장을 힐끔 쳐다봤지만 자실장은 여전히 표정도 변하지 않은 채 드러누워있다.
나는 암실로 통하는 복도에 있는 서랍에서 푸드들을 들고 왔다.
“먹다남은 찌꺼기라도 좋은데 푸드를 주시다니, 정말 감사드리는테치, 닝겐상.”
경악스럽다.
‘공복으로 방치 후 식사 전 감사인사하기’는 나의 넘버링 실장들도 대여섯번 교육받은 후에야 겨우 해내는 것이다.
대체 그 여자는 나한테 뭘 보낸건가?
“감사히 먹겠는테치.”
나는 팔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자실장을 위해서, 푸드를 직접 입에 넣어주었다.
푸드를 입에 넣어주자 자실장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감사인사를 하고 푸드를 먹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아까보다는 좀 더 차분한 기분으로 자실장의 이상한 점을 관찰할 수 있었다.
먹는 속도가 평범하다.
자실장은 여전히 아무런 표정없이 여유롭게 푸드를 씹어삼켰다.
이번에 세레브 실장 대회에 우승한 29번 실장조차 공복에는 먹는 속도가 20프로정도 빨랐고, 그것은 내가 교육한 실장석들 중에서 가장 느린 속도였다.
“이제 그만 주셔도 되는테치.”
불과 5개정도를 입에 넣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만 주어도 된다고 하는 자실장에게 나는 오늘 몇 번째인지 모를 놀라움을 느꼈다.
보통 자실장들은 한 끼분은 푸드 10개이고, 공복시에는 15개정도 먹어야 만족한다.
스스로 소식하는 실장석이라니, 차라리 채식하는 사자가 더 그럴 듯 하다.
“푸드를 직접 먹여주기까지 하시니 어떻게 감사해야할지 모르겠는테치.”
푸드가 어느 정도 소화되었는지 자실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무릎을 꿆었다.
손의 위치와 허리를 핀 정도 모두 완벽한, 실로 깔끔한 자세였다.
“너에게 물어볼 것이 있다.”
나는 자실장에게 할 질문을 12가지정도 떠올렸다.
“죄송한테치, 닝겐상.”
뭐라고?

나는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다. 대답할 수 없다는 건가?”
“지금 굶은지 오래되서 머리가 흐리멍텅한테치. 지금 상태라면 닝겐상의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해낼 자신이 없는테치. 정말 죄송하지만 와타시에게 조금만 시간을 주신다면 어떤 질문을 하셔도 성실하게 대답하겠는테치.”
이런. 놀라움에 눈썹 끝이 살짝 올라가버렸다.
“알겠다. 30분 뒤에 다시 오도록 하겠다.”
슬슬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자신이 없어진 나는 한손에 편지를 들고 교육용 암실로 향했다.


2.

딸깍
전구를 켜자 얼마전 까지 40번 실장이 있던 낡은 유리수조가 보였다.
유리 수조 주변에는 녹색과 붉은색 얼룩들이 남아있었고, 피비린내가 희미하게 풍겼다.
나는 어둠에서 의자를 꺼내어 앉아 방금 본 그 자실장 같은 실장석을 만드는 것이 가능한지 생각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너무나도 명확하였다.
불가능하다.
과정섞인 비유도 감탄의 의미도 아니다.
나의 인간으로서, 브리더로서의 명예를 걸고 단언하건데 평범한 실장석을 저렇게 키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불가능이라도 단정지어도 그 자실장은 여전히 택배박스 안에 있었다.
선천적으로 그렇다?
저런 실장석이 선천적으로 태어난다면 나는 당장 실장숍 문을 닫고 공원으로 달려가 들실장들의 인간노예로 평생 살아가겠다.
편지는 ‘특별한 점이 있다. 무엇이 특별한 점인지는 그 아이에게 물어봐라.’ 라고 했다.
그래, 결국 직접 물어봐야 답이 나올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나의 브리더로서의 역량이 답지를 보기전에 문제를 풀 수 있을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편지에 있을지 모를 단서를 찾기 위해 또 다시 레몬향 섞인 편지지를 들었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걸 너는 이해할 수 있길 바라며 이렇게 보내니 잘 부탁해.’
처음에는 약간의 비꼼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정황과 저 자실장을 보건데 아마 진심일 것이다.
하지만 나와 방향은 다르지만 그녀 또안 어엿한 일류 브리더이다.
그런 그녀도 감당하지 못하는 실장석이 저 실장석이다.
그녀는 무엇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내가 무엇을 이해하길 바라는 것일까.
나는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러자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지만, 굉장히 이상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주길 바라.’
‘행복하게 해줘.’가 아니라 ‘행복을 느낄 수 있게 해달라.’ 라고?
학대당하던 실장석이기라도 한건가?
하지만 학대당했다고 행복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혹시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가 ‘특별한 점’인가?
하지만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라는 이유로 친실장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은 이상하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이상할정도의 자제력과 평온함.
나이에 비해 턱없이 정교한 말투.
허기를 채울 필요성을 못 느낌.
나는 대체 무엇이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지 생각하다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몇 가지 변수들이 걸리지만 이것 이외에는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없다.
나는 어둠 속에 있는 교육용 도구들을 뒤적거리렸다.
그리고 그 중에서 번뜩이는 메스를 찾아낸 뒤 암실을 나갔다.


3.

“닝겐사마, 오신테치?”
자실장은 여전히 택배상자 안에 바른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이상할 정도의 바른 자세에 나는 약간의 섬뜩함을 느꼈다.
“아까도 말했지만 너에게 물어볼 것들이 있다.”
“무엇이든지 물어보시는테치. 성실하게 대답하겠는테치.”
유리창으로부터 택배상자에 햇빛이 비추자, 택배상자 내부에는 그림자가 졌다.
자실장의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그 그림자 속에서 자실장의 눈동자가 희미하게 빛났다.
나는 그 눈동자를 잠시 쳐다보았다.
서컥
그리고 대뜸 암실에서 가져온 메스로 자실장의 오른팔을 잘라내었다.
그 순간 나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약간의 저항감이 의문스러웠다.
자실장의 팔을 수도없이 잘라봤기에 알 수 있다.
이 저항감은 보통 자실장의 흐물거리는 팔을  자를 때의 느낌이 아니라, 성체가 되어서 팔에 다소 근육이 붙은 상태의 팔을 잘라낼 때의 그 저항감이다.

약간의 당혹스러움을 마음에 품은 나와는 달리 자실장은 팔이 잘리기 전과 똑같은 무표정으로 
굴러가는 오른팔을 힐끗 쳐다보았다.
“질문은 언제 하시는테치?”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내 추측이 옳았음을 확신했다.
“너는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거냐?”
내 질문에 자실장은 잠시 고민하였다.
“와타시는 그 ‘고통’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테치.
하지만 센세는 와타시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고 했으니 아마 맞는 것 같은테치.”
역시 그랬다.
이틀 동안의 공복을 참고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실장석 따위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답은 분명하다.
이 녀석은 공복을, 즉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 통각은 커녕 촉감 자체가 없을 것이다.
“내가 너의 팔을 잘랐을 때 무엇을 느꼈지?”
자실장의 오른팔에서 피가 흘러내려 택배상자의 바닥을 적셨다.
“다음 식사 때는 푸드를 하나 더 먹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테치.”
자실장의 패기가 넘치는 대답에 나는 정신적으로 헛웃음을 내뱉었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들이 남아있다.
“너는 왜 식사를 하는 거지?”
그렇다. 공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식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태어났을 때는 마마, 오네챠들이 입에 뭔가를 넣고 삼키는 걸 보고 그냥 따라한테치.
처음에는 그냥 공놀이 같은 장난인줄 알았던테치.
그러다가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적이 있었는데 몸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던테치.
그 때 이후로 몸을 움직이기 위해 식사를 한테치.”

과연. 
그러니까 이 녀석에게 식사란 그냥 자동차에 기름을 넣는 것과 별 다를 바가 없다는 말이다.
먹으면 움직인다. 먹지 못하면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이 전부.
“너는 푸드를 먹을 때와 음식물쓰레기를 먹을 때와 차이를 느끼나?”
‘미각이 있는가.’를 묻고 싶었지만, 정말 미각이 없다면 미각이 있냐는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냄새가 다른테치. 하지만 그것 말고는 잘 모르겠는테치.”
맛은 모르지만 냄새는 맡을 수 있다, 이건가?
하지만 이 자실장은 아까 분명히 ‘음식물 쓰레기로도 좋은데 푸드를 주셔서 감사한테치.’라고 했었다.
“푸드가 음식물 쓰레기보다 더 좋은 음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군. 어떻게 안거지?”
자실장은 여전히 표정변화 없이 평온히 답하였다.
“오네챠와 이모우토챠들이 와타시는 쓰레기가 어울리는 분충이라고 했기 때문인테치. 그래서 항상 오네챠와 이모우토챠들은 푸드를 먹고 와타시는 부스러기를 먹은테치. 그래서 와타시는 푸드가 음식물 쓰레기보다 더 좋은 음식이라고 생각한테치.”
잠시 말을 끊고 자실장은 말했다.
“하지만 아직도 왜 푸드가 음식물 쓰레기보다 좋은 음식인지 이해를 못하겠는테치.”
그러고보니 최근 그녀는 일가 하나를 통째로 기르는 특이한 교육법을 발표하여 꽤나 주목받는 중이었다.
하지만 아직 기획단계에만 이르고 결과는 나오지 않은 상태였을 터다.
혹시 이 녀석이 그 첫실험의 결과인가?
이 자실장의 말에 따르면 이 자실장의 자매는 분충이다.
하지만 편지에 의하면 정작 친실장에게 버림받은 것은 자매가 아니라 이 녀석.
어떻게 된거지?
혹시⋯.
“너는 들실장이었나?”
“와타시는 들실장이 아니었던테치. 하지만 사육실장도 아닌테치. 사육실장이 되기 위해 센세에게 여러가지를 배우다가 이곳으로 보내진테치.”
그렇다면 더더욱 이상하다. 들실장이라면 모를까, 어째서 그녀의 펫숍에서 분충 대신 이 녀석이 버림받은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너는 친실장에게 버림받은 것이 맞나?”
자실장은 꽤 오래 생각하더니 대답하였다.
“마마는 와타시의 팔을 물어 뜯고 주먹으로 와타시를 때리면서 ‘내가 분충을 길렀던데스! 오마에 따위는 그냥 뒈져버리는데스!’라고 한테치.
와타시의 몸에서 흰막대기가 튀어나오고 빨간물이 나온테치.
그걸 본 센세는 와타시와 마마를 떼어놓고 와타시에게 이상한 액체를 부어준테치.
그리고 그 이후로는 마마를 본 적이 없는테치.
아마 와타시는 마마에게 버림받는 게 맞는 것 같은테치.”
즉 친실장에게 분충 취급을 받고 뼈가 튀어나올때까지 맞다가 그녀가 그 광경을 보고 둘을 떼어놓고 이 자실장에게 활성제를 부어주었다, 이 말이군.
여기까지 들어본 말로는 대체 이 일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이렇게 된 이상 별 수 없다.
“너와 너의 자매, 그리고 친실장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봐라.”
내 말을 들은 자실장은 고개를 숙였다.
그림자진 택배상자 안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약간 숙인 그 모습은 죄인을 생각나게 하였다.
자실장이 다시 고개를 들 때 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자실장은 입을 열었다.




5.

실장석과 브리더는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왜냐하면 끝없는 탐욕, 저열한 두뇌, 하늘 높은 줄 모르는 자존감을 가지고 태어나는 실장석이 애완동물로서 판매되기 위해서는 브리더라는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리더는 실장석을 교육시켜 판매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렇기에 실장석과 브리더는 서로에게 필요한, 기묘한 공생관계인 셈이다.
그렇다면 브리더가 실장석을 교육하는 것은 쉬울까?

실장석을 교육하는 것은 간단하다.
채찍과 당근. 잘못된 행동에는 벌을, 좋은 행동에는 상을 준다.
게다가 의사소통이 되기 때문에 개나 고양이에 비해 교육이 용이하다.

이렇게 교육해서 실장석은 나쁜 행동을 하지 않고 착한 행동만을 하게되고, 브리더는 실장석을 고객에게 팔아 돈을 번다⋯참으로 편한 이야기다.
하지만 길거리에 나가보면 의외로 실장숍 간판을 보기란 쉽지가 않다.
그 이유는 브리더는 고객의 집에 팔린 실장석까지 ‘교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실장숍에서야 얼마든지 채찍과 당근을 사용할 수 있지만 브리더로서는 고객의 집에 팔려간 실장석까지는 어쩔 수 없다.
이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매 달 추가 교육을 제공하는 브리더도 있지만, 이는 시간적·공간적으로 꽤 부담될 뿐 아니라, 사육주의 집에서 편안한 삶에 젖어든 실장석을 불과 몇 시간 내에 다시 교육시키기란 쉽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브리더는 실장석이 고객의 집에 넘어가서도 분충짓을 하지 말도록 교육해야하며, 이 때문에 브리더에게는 섬세한 기술과 통찰력, 그리고 엄청난 집념을 필요하다.
만일 실장석의 분충짓을 한 번이라도 넘어가는 순간 모든 교육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브리더의 눈을 속이는 분충을 판매한다면 브리더로서의 생명은 끝장이기 때문이다.

만에하나 일어날 수 있는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하여 브리더들은 훈육기술을 공유하고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이 공동연구는 점차  발전하여 브리더간의 협회가 되기까지 이르렀다.

이 브리더 협회에 모인 지식과 기술들은 어마어마하였고 그 모든 것들이 총동원되어 만들어진 것이 실장석이면서 실장석을 벗어난, 인형처럼 아름답고 귀족처럼 기품있는 실장석, 속칭 ‘세레브 실장’을 만들어내기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이것을 사회 고위층 인사들에게 선물하여 언론에 지속적으로 노출시켜 제 2의 실장석 열풍을 일으키는데 성공하였다
이 열풍 속에서 협회는 쌓여가는 노하우와 자금을 바탕으로 계속해서 성장하여, 결국 A대학에 ‘실장석교육학과’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협회의 자금력과 역대 브리더들이 쌓아올린 훈육 기술과 지식들이 결합하여 생긴 실장석교육학과는 우수한 브리더들을 수없이 배출하고, 배출된 브리더들은 선의의 경쟁을 계속하였다.
이에따라 사육실장 업계는 브리더 저마다의 개성에 따라 분화(分化)하였다.
실장석을 보다 아름답게 만들거나,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게 하거나, 보다 똑똑하게 만들게 하는 등의 다양한 발상과 시도가 있었고 그에 따라 발전을 거듭해나갔다.

그들 중 성공한 이의 지식은 후계로 이어지고 실패한 시도 역시 반면교사가 되어 브리더 업계는 날로 성장해나갔다.
그중에서도 여자가 실장석을 교육하는 방법은, 그 다양한 시도 중에서도 특기할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치못한 어떤 변수가 그 시도를 망쳐버릴 것이라고는 여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심지어 그것은 그 변수 스스로조차도 말이다.


6.

삼녀는 알 수 없었다.

“좋은 아침인테치, 주인사마!”

왜 우리는 인사를 연습하는 것일까.

“장녀챠. 목 각도가 약간 오른쪽으로 틀어진데스. 차녀챠. 웃는 눈이 지나치게 가느다란데스. 삼녀챠. 그대로만 하는데스. 아주 좋은데스. 자, 다시 해보는데스.”

왜 마마는 우리에게 인사를 연습시키는 것일까.

“좋은 아침인테치, 주인사마!”

왜 우리는 이 텅 빈 하얀 방에 있는 것일까.

“장녀챠! 이번엔 고개가 왼쪽으로 뒤틀린데스!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데스?
차녀챠! 그 분충 같은 웃음 좀 짓지 말라고 몇 번이나 말하는데스까!
둘 다 삼녀챠를 조금이라도 좀 배워보는데스!”

왜 장녀와 차녀는 나를 저런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일까.
나에게 주먹질을 하겠다는 의미일까.
아니면 좀 있다 푸드를 내놓으라는 것일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볼 때 아마도 전자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알겠는테치!”

하지만 왜 마마가 쳐다보자 아무것도 아니였다는 듯이 바로 시선을 돌리는 것일까.

삼녀는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이해할 필요도 없었기에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친실장이 훈련을 시키면 훈련에 따르고 장녀가 자신을 때리고 차녀가 부려먹어도 거기에 따를 뿐이었다.
이유도 의미도 모르겠지만 굳이 따르지 않을 이유도 없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그렇게 보낼 뿐이었다.

“좋은데스. 그럼 다시 한 번…….”

“안녕, 애들아~ 잘 하고 있니?”

갑자기 텅 빈 벽에서 사각형의 거대한 균열이 생기더니 그 사이로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치고는 장신인 키에,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핑크빛 드레스를 입고 시원시원한 얼굴로 장난기어린 미소를 띤 여자는 28세, 실장숍 ‘실장학교’의 주인이었다.
(남자의 실장숍과 이름이 같은 것은 순전히 우연이다.)
여자가 방에 들어오자 방에 레몬향이 풍겼다.

“센세, 어서오는테치! 너무너무 기다렸던테치! 안아주는 테츙~ ♡”

“센세~와타시 인사연습 열심히 한테츙~♡ 와타시 잘한테치?”

“어서오시는테치, 센세.”

브리더의 교육현장 같던 방은 갑자기 먹이를 가지고 돌아온 친실장을 환영하는 들실장들의 그것과 흡사해졌다. 
그리고 장녀와 차녀 역시 들어오는 여자에게서 보통 자실장들이 친실장에게 느끼는 감정을 느꼈다.

“응응, 장녀쨩!  오늘도 열심히 했어?”

장녀와 차녀의 어리광에 응답해주면서 여자는 활짝 웃었다.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순수하고 아름답게 지은 미소에 실장석들은 아찔하였다.

“와타시 오늘 인사 많이많이한테치! 안아주는테치!”

“응, 그래그래. 자! 귀여워 귀여워! 장녀쨩, 오늘도 귀여워!”

“장녀 오네챠만! 치사한테치! 와타시도 안아주는 테츙!”

“차녀쨩도 노력했구나. 자! 어이구어이구~”

여자가 장녀와 차녀를 한 팔에 하나씩 안자 자실장들은 여자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그 광경은 브리더와 사육실장 후보의 관계라기보다는 오히려 친실장과 자실장의 그 질척하고 끈적끈적한 관계를 연상하게 하였다.

“센세한테서는 새콤달콤한 냄새가 나서 너무 좋은 테츄!”

“헤에….기분 좋아지는테치….”

“으휴, 이 어리광쟁이들!  삼녀쨩도 오늘 열심히 했니?”

삼녀는 여자의 질문을 이해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열심히라는 것은 무엇인가? 하루에 3시간부터인가? 아니면 4시간부터인가? 아니면 하루 종일 해야하는 것인가?
결국 삼녀는 친실장에게 바톤을 넘겼다.

“와타시는 와타시가 열심히 했는지 잘 모르겠는테치. 마마에게 물어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 같은테치.”

“삼녀챠는 연습 시간은 물론, 쉬는 시간에도 계속 연습한데스. 셋 중에서 가장 열심히 한데스.”

“그래? 어휴, 삼녀쨩. 말하지 그랬어~ 예쁘다, 예쁘다~”

여자는 자신의 목덜미의 체온과 향기에 푹 빠져있는 장녀와 차녀를 바닥에 내려놓고 삼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삼녀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 처럼 여자의 손이 닿지 소리내어 웃었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장녀와 차녀가 저 여자의 손에 닿을 때마다 소리를 내어 웃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렇게 하는 것이 맞으리라.

“헤헤, 감사한테치, 센세.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는테치.”

여자의 애정과 온기가 삼녀로 옮겨가자 장녀와 차녀의 눈에는 불꽃이 튀었다.
조금 전에 삼녀를 바라보던 시선이 적의(敵意)였다면, 이번에는 분명한 살의(殺意)가 포함되어있었다.

제까짓게 무엇인가.
제까짓게 무엇인데 우리보다 선생님의 이쁨을 받는 것인가.
저것이 없었다면, 저것만 없다면.

친자매간에 적의와 살의, 분노와 질투 섞인 시선이 오가는 것을 그 옆에서 친실장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삼녀쨩뿐 아니라 다들 수고 많았어! 자, 오늘 점심식사야~”

여자는 주머니에서 실장푸드팩을 꺼내어 정확히 30개를 바닥에 놓았다.
그런데 푸드를 줄 것이라면 자실장 하나에게 10개씩 배분하면 될 것을, 굳이 30개를 바닥에 내려놓는 것은 퍽 이상한 일이었다.

“아, 그리고 로토쨩. 잠깐 나 좀 볼래? 여기 너희들 밥 두고갈테니까 사이좋게 나눠먹어야해~!”

여자가 로토라 불린 친실장을 데리고 함께 방에서 나갔다.

“오늘도 이 빌어먹을 년만 칭찬받은테치.”

“센세는 왜 이런 분충 따위를 칭찬하는테치?”

방 안의 분위기는 급변하였지만 좀 묘하게 돌아갔다.
애정을 빼앗긴 장녀와 차녀는 분노하며 삼녀를 노려보았지만, 삼녀는 그 모습을 어느새 표정을 지운채 바라볼 뿐이었다.
장녀와 차녀의 눈빛과 표정은 항상 보던 일상이다.
크게 놀라울 것도, 두려워할 것도 없었다.

“오마에같은 분충 따위는 이렇게 해버리는테치!”

“그게 당연한테치!”

콰드득!

장녀와 차녀가 질투와 분노로 삼녀의 팔을 한 쪽씩 물어뜯는 분충짓도, 그저 으레 있는 일 뿐이었다.

“데갸아아아악! 아픈테치!! 왜 와타시의 팔씨를 먹는테치!!”

그리고 여기서 이렇게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
15일 전 친실장이 게으름 부리는 장녀를 체벌하기 위해서 팔을 물어뜯었을 때도 장녀가 이렇게 했으니 아마도 이렇게 하는게 맞을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행동하면 장녀와 차녀가 모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을 보니 틀림 없다.
이와같은 삼녀의 괴리감있는 사고는 보통 실장석들의 행동과 약간 다른 점을 보였다.

첫째. 팔을 잡을 때 까지는 신경도 쓰지 않다가 장녀가 팔을 물어뜯고 나서야 반응하였다.
둘째. 비명은 높고 날카로웠지만 그 비명에는 팔이 없어진 것에 대한 당혹감과 고통에 대한 경악이 결여되어있었다.
마치 발연기를 하는 신인 배우처럼 그저 대본을 읽는 듯한 비명이었다.
셋째. 눈물을 흘릴 때의 얼굴 표정은 분명히 일그러저 있었지만, 그것은 고통의 표정이라기보다는 억지로 눈물샘을 비틀어 눈물을 흘리기 위한 일그러짐에 가까웠다.
하지만 모방과 거짓에 의한 위화감을 알아채기엔 장녀와 차녀는 너무나 어렸다.

“배가 고프니 먹는게 당연하지 않은테치?
멍청한 분충인 오마에는 그런것도 모르는테치? 데프프픗.”

“자비로운 장녀 오네쨩과 와타시가 특별히 자비를 배풀어 푸드 하나 정도는 줄테니 엎드려서 이거나 처먹는테치! 데프프프픗!”

승리감에 도취된 차녀는 입에서 우드득하는 살점과 뼈가 씹히는 섬뜩한 소리를 내며 푸드 하나를 저 멀리 던져버렸다.
그러자 삼녀는 눈물을 흘리며 푸드를 향해 걸어가, 주저없이 땅바닥에 배를 깔고 푸드를 씹기 시작하였다.

“장녀 오네쨩 저 천한 짓거리 좀 보는테치. 어떻게 식사를 엎드려서 할 수 있는테치?”

“멍청한 분충년이라 별 수 없는테치. 저런게 우리 자매라니 한심해서 봐줄 수 가 없는테치, 데프프픗.”

심플한 신데렐라적인 상황이었지만 삼녀의 괴리감있는 사고방식, 감각과 고통의 부재. 그리고 그로 인한 위화감은 장녀와 차녀, 그리고 삼녀 스스로를 포함하여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였다.

“역시 변한게 없네, 이 아이들은.”

그리고 그것은 지금 이 상황을 의자에 앉아서 CCTV로 지켜보고있는 여자와, 그 여자의 무릎에 앉아있는 친실장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스. 장녀와 차녀는 이제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분충인데스.”

여자와 친실장은 옆 방에서 CCTV를 통해 세자매들의 행동을 똑똑히 보고 있었다.
다만 원거리에서, 그것도 실장석들로부터 숨기기위해 만들어진 작은 카메라는 유감스럽게도 삼녀의 위화감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였다.

“역시 안 되겠어.”

여자는 무릎에 앉아있는 친실장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더 이상 장녀와 차녀를 키우는 건 시간낭비야. 저 둘을 가르치려고 하다가는 오히려 삼녀까지 망가지겠어.”

“와타시도 센세와 똑같이 생각하는데스.”

자신의 자실장 중 두 명을 폐기처분하겠다는 여자의 말을 듣고도 친실장은 분노는 커녕 적극적으로 동의하였다.
그것은 아마 애정의 차이일 것이다.

“그래, 그럼 장녀와 차녀는 여기까지. 내일 처분하는 걸로 하자. 자, 그럼 이제 애들한테 가봐 로토쨩.”

“⋯알겠는데스.”

로토라고 불린 친실장은 여자의 무릎에서 내려와 고개를 숙이고는 옆 방을 향하였다.
하지만 미묘하게 무언가를 기대하고 있는 듯이, 걸어가는 와중에 힐끔힐끔 여자를 바라보았다.

“참! 깜빡할뻔 했네! 어휴, 미안해, 로토쨩.”

여자는 나가려는 로토를 붙잡고는 찬장에서 콘페이토를 꺼내어 친실장에게 주었다.

“이거는 특별히 수고한다는 의미에서 주는 거야. 맛있게 먹어~”

“헤헤, 센세~ 늘 고마운데스웅~.”

친실장은 기분 좋게 여자를 향해 웃음을 지었고, 여자도 미소를 지어 화답하였다.

“그럼 센세, 와타시는 이만 가보겠는데스웅~”

“응, 로토쨩! 수고해~”

여자는 미소를 지으며 친실장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친실장이 나가고, 방문이 닫혔지만 여자의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여자는 누구를 향하는지, 왜 짓는지도 모를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핑크빛 노트북을 꺼내어 워드프로그램을 켜고 타자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와같이 통칭 ‘세공사’를 필두로하는 종래의 교육방법은 수많은 연구와 시도를 거듭한 끝에, 실장석은 하나의 예술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워졌다.

집요하고도 철저한 체벌을 주요 수단으로 삼는 이 고전적인 교육수단의 가장 큰 특징은 교육을 받는 실장석들의 감정을 철저하게 제거하는 것이다.
이 감정의 제거는 ‘변질’을 막고 주인의 말에 복종하게 하는 효과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육실장의 본질인 ‘반려동물로서의 기능’을 거의 하지 못하게 하는 부작용이 있다.

즉, 이 방법을 통해 만들어진 실장석들은 주인이 웃으라 하면 입꼬리와 눈꼬리를 올리고 울라 하면 기꺼이 눈물을 흘리겠지만, 개나 고양이와 같은 일반적인 반려동물과의 교류에서 느낄 수 있는 정서적인 만족감을 느끼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석처럼 섬세한 사육실장의 아름다움에 매료되는 사람들의 수요는 막대하여 대다수의 브리더들은 이 교육방법을 따르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이에 필자가 안타까움을 느끼는 부분은 실장석과의 교류에서 정서적인 만족감과 애착을 느끼고 싶어하는 사육주들의 요구가 시장에 전혀 반영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은 교육방법을 제안한다. 

린드 B 로젠 교수가 입증하고 다수의 브리더들이 경험하는바와 같이, 분충과 양충을 같이 양육하는 것은 분충에게는 전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오히려 양충의 분충화가 가속된다.
하지만 필자는 해당 연구가 분충과 양충을 한 마리씩 양육한 결과임에 주목하여 분충과 양충의 사육비율을 조정해본 결과, 흥미로운 결과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소수 분충과 다수 양충, 동일한 분충과 동일한 양충을 교육하는 경우 모두 양충이 분충화되는 결과를 가져왔지만 특이하게도 교육환경에서 ‘소수의 양충이 다수의 분충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경우’는 소수 양충들에게 분충 행동에대한 경멸과 혐오를 심어주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종래의 교육방법은 교육대상에게 분충짓에대해 극단적인 공포를 심어주는 것으로 ‘변질’을 막는다.
이에 반해, 해당 교육환경에서 ‘소수의 양충’은 브리더가 특별히 분충짓에 대한 언급이나 처벌을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심으로 분충짓에 대하여 경멸과 혐오를 가지고 해당 행동을 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실험결과, 해당 교육환경에서 교육대상이 진심으로 가지게 되는 분충짓에 대한 경멸과 혐오는 기존의 교육방법보다 ‘변질’ 가능성을 약 20% 가량 낮출 수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 방법의 장점은 이뿐만이 아니라, 다수 분충에 의한 괴롭힘은 양충들의 자존감을 상당수준 낮추기 때문에,  토시야키 교수가 정의한 분충화의 3대 주요 요소 중 하나인 ‘지나치게 높은 자존감’을 억압하여 분충이 될 가능성을 30퍼센트 가량 낮출 수 있었다.

이와 같은 결과에서 착안한 필자의 교육방법은 소수의 양충이 다수의 분충에 의하여 괴롭힘을 받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해당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논문이라고 하기엔 투박하고 자기기록이라고 하기엔 딱딱한 글을 타이핑하던 여자는 한숨을 쉬더니 노트북을 덮고 기지개를 쭈욱하고 폈다.

“야아- 장녀쨩과 차녀쨩도 이걸로 마지막이구나~
좀 아쉽지만⋯그래도 할 수 없는 걸.어리광부릴 떄 정말 귀여웠는데…”

내일 장녀와 차녀를 차분할 생각을 하자 여자는 진심으로 안타까움을 느꼈다.
장녀와 차녀는 분충이지만, 여자는 자신들보다 우월한 삼녀에게 가지는 질투와, 자신에게 부리는 어리광과 그 분충성들을 포함하여 진심으로 그 둘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좋아하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자신의 일은 브리더.
시덥지않은 정에 휘말려서 일을 망치는 것은 브리더 실격이다.

“이미 각오했으니까.”

무엇보다 이런 일이 일어날 건 이미 각오하였다.
그것을 위해서 나이에 맞지도 않는 이런 핑크빛 드레스를 입고 실장석들을 대하는 것이나 분충들을 처분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자는 실장석을 사랑하였다.
분충도, 양충도, 프니프니만 찾는 구더기의 저능함도, 테찌테찌거리는 자실장들의 혀짧은 소리도, 끝없는 탐욕도 역겨운 아첨소리도, 고통에 테챠아아 하고 지르는 소리도, 죽을 때 한순간 내는 지벳 소리도 포함해서 실장석의 모든 것을 사랑하였다.

어떤 이는 애호파라 하고 어떤 이는 학대파라 하겠지만, 여자는 실장석이라는 생물의 모든 것. 그 가증스러움과 사랑스러움, 역겨운 면 모두를 사랑하였다.
그렇기에 여자는 브리더 업계에 슬픔을 느꼈다.

아무도 실장석을 실장석으로 보고 있지 않다.
분충성을 모두 제거한다고?
그 분충성과 그 이면에 있는 사랑스러움이 모두 공존하는 것이 실장석 아닌가?

여자는 자신의 영혼을 매료시킨 이 생물을, 브리더 업계와 소비자들이 살아움직이는 인형, 값비싼 악세사리 취급하는 것에 슬픔과 염증을 느꼈다.

애호든 학대든 중요하지 않다. 
여자는 인간이라면 실장석의 희로애락, 고상함과 역겨움, 그 모든 것을 제대로 직시해야한다고 생각하였다.
실장석을 생물로 보지않고 단순히 비싼 무기물로 취급하는 것은 학대나 학살 이전의, 실장석의 존재와 생물로서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을 넘어, 아예 없는 것 취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즉, 실장석이 값비싼 무언가로 취급받지 않고 ‘생물’로서, ‘실장석’으로서 취급받게 하는 것이 여자의 목표였다.

이를 위하여 기존 브리더업계의 주류인 ‘세공사’의 교육방법 대신, 자신이 연구한 새로운 교육방법으로 실장석과 인간이 서로 올바른 반려동물로서의 관계를 형성하게 하는 것이 제 1보였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장석을 위한 그 시도는, 바로 그 실장석에 의하여 늦춰지게 되었다.



7.

부스럭 부스럭

삼녀는 잠을 쉽게 잘 수 없었다.
피로를 느끼지 못하는 탓에 도무지 잠을 자기 힘든 삼녀는 자세를 바꾸려 몸에 신호를 보내다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테치? 왜 이러는테치?’

삼녀의 육체가 한계에 달해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식사량의 부족, 장녀와 차녀의 동족식에 의한 신체재생에따른 육체적 부담이 쌓이고 쌓여 움직일 수 없게 된 탓이다.

‘이럴 때 지난 번에 어떻게 했던테치?’

삼녀는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경험이 처음이 아니었다.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던 시절 식사라는 행동의 의미를 모르던 삼녀는 극단적인 소식을 하다가 영양실조로 실신하였다.
그때는 낮이었고, 여자와 친실장이 같이 있었기 때문에 여자는 곧 바로 삼녀에게 고열량의 콘페이토를 주었고, 콘페이토를 먹은 삼녀는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그 때의 경험으로 식사의 의미를 깨달은 삼녀가 생각한 원인해결 방법은 간단하였다.

‘무언가를 먹어야하는테치.’

하지만 지금은 밤 중 인데다가, 손가락 하나 움직일 힘조차 없다.
보통 실장석, 인간이라도 패닉에 빠질만한 상황이겠지만, 특이한 신체를 가진 삼녀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까드득

섬뜩한 소리를 내며 삼녀는 움직이지 않는 턱을 간신히 움직여 자신의 혀를 잘라내어 씹었다.

질겅질겅

몇 안 되는 살점이지만, 일단 삼녀는 간신히 움직일만한 열량을 섭취하였다.
입과 코에 피비린내가 확하고 풍겼지만, 삼녀는 개의치않았다.
일단 몸을 움직일 수 있지만, 빨리 먹을 것을 구하지 않으면 오히려 혀를 재생하는데 영양분을 더 빼앗겨 버릴 것이다.

“테츄⋯테츄…와타시 너무나도 세레브한 테츄….센세랑 평생 행복하게 사는 테츄⋯테츄⋯.”

“테츄⋯스테이크와 콘페이토의 산인테츄⋯전부 다 와타시의 것인 테츄⋯아무에게도 못 주는 테츄⋯.”

간신히 일어난 삼녀는 고뇌에 빠졌다.

‘빨리 무언가를 먹어야하는테치. 이러다가는 내일 아침 연습을 할 수 없는테치.’

또 다시 실신해버리면 내일 아침연습에 참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마마는 장녀와 차녀에게 아침연습을 빼먹으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따라서 무언가를 먹어야한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고, 주위에 식사거리라고 할 만한 것은 전혀 없다.
자매들을 깨워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18일 전 이 시간에 잠을 깨웠을 때 분명 다시는 깨우지 말라고 했었다.

어떻게하면 좋은가?

자매들을 깨우는 것은 안 된다.
내일 아침 연습을 안 할 수는 없다.
주위에 먹을 것은 없다.
꽉 막힌 상황 속에서 한참을 고민하던 삼녀는 문득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데갸아아아악! 아픈테치!! 왜 와타시의 팔씨를 먹는테치!!’

‘배가 고프니 먹는게 당연하지 않은테치?
멍청한 분충인 오마에는 그런것도 모르는테치? 데프프픗.’

‘배가 고프면 팔을 먹으면되는테치?’

그것이 삼녀가 내린 결론이었다.
생각해보면 장녀와 차녀가 팔을 뜯어먹었지만, 결국 다시 자랐고 그다지 해가 될 건 없었다.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다.

‘오네챠들을 깨우면 안 되는테치. 와타시가 장녀챠의 팔을 먹으면 장녀챠는 ‘데갸아아아악! 아픈테치!! 왜 와타시의 팔씨를 먹는테치!!’ 하면서 일어나야하는테치. 그러면 차녀챠가 시끄러워서 일어나버리는테치⋯⋯. 어떻게하는 테치?”

실로 어려운 문제이다.
내일 아침에 연습을 하려면 “먹어야한다.”
밤에는 자매들을 “깨워서는 안 된다.”

이 모순에서 한참 동안 고뇌하던 삼녀는 순간, 떠올렸다.

그래, “깨우지 않고”, “먹으면” 된다.

간단한 방법을 떠올린 삼녀는 지체없이 방법을 실행하였다.

옆을 힐끗 쳐다보자 장녀가 여전히 잠꼬대를 하며 자고 있었다.

“아⋯센세⋯거기는⋯테교보오오옥?”

삼녀는 지체없이 장녀의 입과 코를 손으로 틀어막았다.

아그작.

그리고 목, 정확히 말하자면 성대가 있는 부분을 씹었다.
이빨이 들어가는 순간 겉에 낀 부드러운 지방이 맞이하고 그 다음에는 말랑한 뼈가, 그리고 단단한 목뼈가 느껴지지만은 이가 으스러져라 깨문다.

소리를 지르려면 목이 있어야한다.
그렇다면 목부터 씹어삼킨다면  자매들을 깨우지않고 아무 문제없이 식사를 할 수있다.

“데⋯!!!⋯⋯⋯⋯!⋯⋯!!⋯!⋯!! !!!!!!!”

장녀는 목덜미가 깨물려 소리조차 지르지 못한 목부터 시작해서 가슴, 분대, 창자까지 산채로 파먹혔다.
그리고 자신을 잡아먹고 있는 것이 누군지도 깨닫지 못한 채, 죽는 순간까지 삼녀의  옷자락만 바라보며 날뛰다가 소리도없이 절명하였다.

‘얼마나 먹어야하는 지를 몰라서 너무 많이 먹어버린테치.’

목부터 시작해서 장녀의 신체의 왼쪽 절반을 먹어치운 삼녀는 너무 많이 먹지는 않았나 걱정하였다.
다행히도 장녀는 말을 할 수 없는 것을 깨닫고 다시 잠 든 모양이고, 이제 몸이 제대로 움직인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한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장녀와 차녀는 하루에 푸드를 10개는 넘게 먹었고, 자신은 굶은지 꽤 오래 되었다.
이걸로는 부족한 것 같지만 장녀를 더 먹어도 될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면 별 수 없다.

차녀도 먹는다.

삼녀는 자신이 먹은 장녀가 깨어날까 염려되었기에, 장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차녀를 먹기 시작하였다.

아랫부분을 먹으면 너무 많이 먹으니 이번에는 윗부분을 먹어볼까?

삼녀는 차녀의 목덜미를 씹었다.
그러자 차녀의 눈이 번쩍 뜨이면서 그 순간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이게뭐인테치뭐인테치왜목이목소리가안나오는삼녀오마에왜거기에살려줘살려줘살려주는테치!’

차녀는 극도의 공포로 삼녀를 쳐다보았지만 낮 시간과 마찬가지로 삼녀는 대체 왜 차녀가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지 알 수 없었다.

곰곰히 생각하던 삼녀는 차녀가 예전에 자신을 때리다가 친실장에게 혼났을 때 저런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제발 웃어주라고 한 기억을 떠올렸다.

“이렇게 웃으면 되는테치?”

삼녀는 장녀를 깨울까봐 그렇게 속삭이며 차녀의 눈을 마주보고 활짝 웃어주었다.

경멸도 분노도 승리감도 없는, 하지만 진심도 없이 눈꼬리와 입꼬리를 당길 뿐인 그 미소는 가면을 생각나게 했다.

그러자 차녀는 만족한듯이 눈을 까 뒤집고는 다시 잠이 들었다.
이걸로 된거구나, 하고 안심한 삼녀는 계속해서 차녀의 몸을 천천히 갉아먹었다.
그렇게 충분히 자매를 먹어치운  삼녀는 제자리 뛰기와 스트레칭을 몇 번 하였다.

‘이제야 평소대로 움직이는테치.’

자신의 예상대로라면, 이 컨디션은 대략 일주일 정도 유지되리라.
아마 당분간은 장녀와 차녀가 자신의 몫의 푸드를 먹어치워도 연습에는 별 지장 없겠지.
더 이상 움직였다가는 장녀와 차녀를 깨울지도 모른다.
배도 채웠으니 이만 자도록 하자.

시체는 어느 새 식었고 흰색 방에는 광기 아닌 광기, 역겨운 피비린내와 썩은 냄새가 가득 채웠다.
그 모습을 방 구석에 놓인 cctv는 그저 똑똑히 지켜만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이 광경을 발견한 친실장은 그대로 졸도했다.



8.

가게의 유리창에는 어느덧 붉고 길다란 그림자들이 드리누었다.
문을 열면 꽤나 멋진 노을이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실장의 길고 긴 고해성사를 들은 나는 왼손 엄지와 검지로 내 얼굴을 잡고 손바닥으로 입을 가렸다.

과연. 그렇게 된건가.

월간 짓소의 칼럼니스트였던 그녀가 지난 호에서 놀랄만한 교육방식을 공개한다고 장담한 것과 이번 호에서 그녀 이름을 볼 수 없었던 것을 기억한 나는 아귀가 얼추 맞아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입을 가리고 계속해서 생각하던 나는 문득 자실장의 상태를 떠올렸다.

“너, 다리 괜찮은거냐?”

“음, 와타시의 짧은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을 듯 한데스.”

몇 시간이고 무릎을 꿇고 있던 자실장의 다리는 피가 흐르지 못해 보랏빛을 띄고 있었다.
그럼에도 눈 하나 까딱 하지 않는 걸 보고 나는 자실장을 들어 올려 편히 눕혔다.

“늦었으니 이만 쉬어라. 피곤할테니 오늘은 편히 잘 수 있게 해주마.”

나는 통로의 서랍으로 가 활성제 뚜껑을 열어 컵에 약간 따른 뒤 네무리를 섞어 자실장의 입에 흘려넣었다.

“감사한테치. 그럼 안녕히 주무시고 내일⋯zzz⋯”

자실장 녀석은 말을 하다 말고 눈을 감고 자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코츄코츄 소리를 내며 잠든 자실장을 보면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간만에 휴가인데 어쩌다 이런 녀석을 맡게된걸까?

느닷없이,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떠맡기고 휘둘리지만 그게 싫지만은 않은 느낌.
그러니까 이 느낌은…….

“대학생 때 많이 느꼈지, 그래.”

나는 이 상황에서 동아리 방이나 강의실에서 혼자 있던 나를 끌고 나가 멋대로 휘두르고 사라지고는 했던 그녀와의 추억을 연상했다.

아무래도 이번 휴가도 그 때 처럼 낯선 어느메를 향할 것 같다는 예감에 휩싸이며 나는 그녀에게 답장을 해야할지, 해야한다면 뭐라고 쓸지 고민하며 가게문을 닫고 집으로 향했다.



9.

그 후로는 별다른 일이 없었다.
‘행복을 느끼게 해달라’라는 말에 대하여 곰곰히 생각해보았지만 애초에 맛있는 음식도, 따뜻한 집도, 아름다운 옷도 소용없는 녀석이다.
감각이 없으니 3대욕구가 전부 의미가 없고, 나는 그 밖에 이 쓸데없이 똑똑하고 성가신 자실장을 행복해줄 방법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한강 둔치에 가서 같이 흘러가는 강과 사람들을 보기도 하고 불꽃놀이를 하거나 속초로 겨울 바다를 보러가기도 했고, 심지어 짓소랜드에 가기도 했다.
그때마다 자실장 녀석에게 감상을 물었지만

“와! 정말 아름다운테치! 이런 것을 와타시에게 보여줘서 정말 감사한테치!”

“교육받은대로 말하지 말고, 너의 생각을 말해봐라.”

“어떻게 말해야 올바른 것인테치?”

“너의 감상을 말하는 것에 올바른 것 따위는 없다. 그냥 너의 생각을 이야기해봐.”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테치. 어떤 생각을 해야하는테치?”

“그러니까⋯아니다. 관두도록 하자.”

하지만 이런 식으로 얻는 것 없이 힘만 빠지는 일이라 곧 그만두게 되었다.
소득이 아주 없었던 일은 아닌 것이, 자실장은 가끔씩 나에게

“센세, 하늘에 저 불꽃을 쏘아올리는 건 무슨 의미가 있는테치?”

“센세, 어째서 저 실장석들은 주인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테치?”

같은 퍽 시니컬한 말을 하기도 했다.
그밖에는

“센세, 왜 햇님은 없어질 때만 되면 빨개지는테치?”

“센세, 왜 여기 바다라는 곳은 항상 움직이고 있는테치?”

같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을 보자면 다른 것은 몰라도 지식욕이 꽤 있는 녀석이다.
몸에 감각이 없어서 정신적인 쾌락을 찾는걸까?
어쨌든 별 소득없는 행복찾기 여행을 마치고 결국 실장학교로 돌아와서 소소한 일상을 보내었다.

자실장은 꽤 부지런한 녀석이라서 본인이 자청해서 잡일을 하였다.
나로서는 굳이 녀석을 놀릴 이유가 없으니 이러저러한 일들을 맡겼다.
주로 필기구나 잡다한 사물을 갔다주거나, 마실 것을 가져오게 하는 등의 소소한 일이었다.
실장학교 내부 구조에 익숙해지니 심지어 찬장에서 아이스티를 꺼내서 타오는 일 까지도 가능해졌다.
사육실장을 파는 것을 업으로 하지만 어째서 이런 것을 돈주고 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생각하던 나지만, 이런 녀석이라면 꽤 기를만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잡일이라는 것이 24시간 늘상 있는 일은 아니다보니 하루중 대부분을 할일없이 멍하게 지내는 것이 녀석의 일상이었다.
그것을 보다못한 나는 녀석에게 tv와 리모컨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본인이 이걸 ‘명령’이라고 생각하는건지, 아니면 즐거운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자실장은 여가시간에는 보통 tv를 보면서 지냈다.

자실장의 취향을 좀 알아보려고 했지만, 애니메이션, 드라마, 뉴스, 예능 등 가리지않고 일관성없게 보고있는지라 좀처럼 취향을 파악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나는 자실장의 행동들을 관찰하면서 틈틈히 녀석에 대해 기록했다.

이름:미정
나이:약 4개월, 자실장
특징
- 몸에 감각이 없고 그 영향으로 감정이 극히 희박한 것으로 추정됨.
- 생존욕구, 3대욕구를 비롯한 욕구가 거의 없음.
- 스스로의 의지가 거의 없음. 행동원리는 보통 ‘명령 받았으니까’ ‘남들도 이렇게 하니까’ 
- 단 지식에 대한 욕구는 비교적 크다.
- 선천적으로, 혹은 감각, 감정이 없는 탓인지 두뇌가 상대적으로 비상. 어느 쪽인지는 불명.
- 통각이 없기 때문에 신체를 한계이상으로 사용할 수 있어 근력이 발달. 맨손으로 성체실장 뼈를 꺾을 수 있을정도.
- 움직일 때마다 근섬유가 끊어지고, 재생력으로 치유되는 것을 반복하기 때문에 같은 나이의 자실장들에 비해 근육량이 높음.

적어놓고 나니 머리 좋고, 힘 쎄고, 금욕적인 그야말로 완전체같은 놈이었다.
로젠사에 의뢰해 위석조작, 태교 등으로 이런 실장석을 양성하면 떼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잠시 나마 생각했지만

“위험. 기각.”

이 녀석이 어째서 나에게 왔는지 생각났다. 
한밤중에 자다가 자매를 뜯어먹어서였다.
이 녀석은 통각과 생존욕이 없고 그렇기에 타인의 고통과 죽음에도 무감각하다.
생명을 빼앗거나 헤치는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할 수 있지만 절대 왜 그래야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다.

훈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교육’도 불가능할테고.
심지어 다른 실장석에 비해 명석하고 힘도 쎄다.
실장석이 지성이 있음에도 애완동물로써 길러지는 것은 그 지성이 한없이 탐욕적이고 육체는 약해빠져 인간에게 해를 거의 끼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녀석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일반 실장석보다 힘이 쎄고 머리가 좋다는 이야기는 그 만큼 해를 끼칠 가능성도 증가한다는 뜻이다.
만약 이 녀석이 잠자는 주인의 목에 못을 찌르면 어떤 소리가 날지 궁금해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어쩌면 자매에게 그랬던 것 처럼 인간의 아이에게 손을 댄다면⋯⋯.

“팔아치운 놈이 경찰서나 안 가면 다행이겠군.”

결국 이 자실장은 현재로서는 돈도 안 되고 키우기도 뭣한 기껏해야 잡일이나 잘 하는 애물단지다.

“뭔가 말씀하신테치?”

“아무것도.”

무릎을 꿇고 허리를 쭉편 사육실장의 이상적인 자세로 TV를 시청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저걸 팔 수 없다는 사실이 퍽 안타깝게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나는 자실장을 주목시키기위해 일부러 말을 끊었다.
자실장이 이쪽을 쳐다보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너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 없는데 말이다.”

자실장은 한차례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말했다.

“와타시가 필요없어지셔서 버리시겠다는 말씀이신테치?”

“⋯아니 그게 아니고.”

평소와는 좀 다른 의미로 무표정이 깨질뻔한 것을 참고 나는 말했다.

“너를 보낸 사람이 말하기를 너를 행복을 느끼게 해달라고 했다.”

“와타시, 불행하지 않은테치.”

그건 내가 보기에도 그렇지만 그걸로 끝난다면 그녀가 나에게 이 녀석을 보냈을 이유가 없다.

“불행하지 않은 상태가 행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말을 들은 자실장은 나를 빤히 쳐다봤다.
장님에게 색을 말한 격인가. 할 말이 없을 만도 하지.
어쨌든 이 상황을 좀 전환하고자 나는 꽤 강한 승부수를 던졌다.

“뭐든 좋으니까 원하는 것을 말해봐라. 내 능력이 되는 한에서는 들어주마.”

“⋯뭐든 말인테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내심 초조해졌다.
만약 이 녀석이 말도 안되는 소원을 요구하거나 어쩌면 그녀에게 다시 되돌아가고 싶다면 어쩔지 걱정되었다.
나는 이 녀석을 들고 그녀의 실장숍 앞에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있을 내 모습을 상상했다.
그녀는 틀림없이 폭소를 터뜨리겠지.

“와타시는⋯.”

자실장은 약간 망설였다. 
자신이 이런 것을 바래도 되는지 스스로 의심하는 것 처럼.

“와타시는 글을 배우고싶은테치.”


실장석들에게 글을 가르쳐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스스로 글을 배우고 싶다는 녀석은 처음이었다.
나는 저 소원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브리더이다. 
실장석을 찢고 비틀고 고문하고 정신까지 모조리 박살내서 파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그런 내가 생각하는 실장석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지독한 짓은
실장석이 어떤 생물인지 알게하는 것이다.

이 녀석들은 다른 동물에 비하면 높은 지성을 가졌고 인간과 교류할 수 있으며 본능적으로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을 갈망한다.
하지만 처참할 정도로 빈약한 신체와 도덕성은 거기에 따라가지 못한다.
실장석의 대부분은 골판지 상자에서 인간이 남긴 찌꺼기들을 먹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나머지는 나같은 브리더들의 손에서 교육받아 사육주에게 팔려 죽지도 살지도 못하다 평생 두려움 속에서 산다.
아주 가끔씩 들실장이 사육실장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좋게 끝난 경우를 들어본 적이 없다.

이들은 갈망하지만 얻을 수 없고, 지성은 있지만 그래서 더욱 비참할 뿐이다.
평생 구정물을 마시며 썩은 고기를 씹고 있지도 않은 별을 쫓다가 추락하여 부스러진다, 이것이 실장석이라는 종의 본질이다.
만일 이 녀석이 글을 배운다면⋯높은 확률로 자신이, 실장석이 어떤 생물인지 알게되겠지.

나는 자실장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 녀석의 눈동자는 적록색이다.
그리고 이 녀석의 눈동자는 절대 검은색이 될 수 없다.
그런데도 괜찮은 것일까.

“⋯⋯.”

하지만 내 역할은 이 녀석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스스로를 직시하지 못하는 생물이, 스스로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리가 없다.
만약 스스로를 직시하여 절망하는 것으로 끝난다면⋯⋯그건 그 녀석이 거기까지인 거겠지.


“좋다. 알겠다.”

나는 책장으로 가 실장석용 글씨 교재를 꺼냈다.



11.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나는 일을 하였고, 여전히 저 녀석은 잡일을 하며 남은 시간은 TV를 보았다.
하지만 귀로 들었을 때보다 더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 중에서는 실장석에대한 정보도 있었을테고.
TV를 보는 녀석을 힐끗 쳐다보았지만 역시 겉보기로는 심경의 변화를 알 수없다.

“⋯다음 소식입니다. 지난 4월, X시에서 벌어진 끔찍한 인육살인사건으로 온 국민의 분노를 샀던 용의자가 경찰의 수사 끝에 2달만에 Y시에서 잡혔습니다. 이 용의자는 범행을 인정하면서도 전혀 반성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더더욱 분노를…⋯.”

얼마전에 떠들썩한 살인 사건의 용의자가 잡혔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왜 이 실장석은 이런 것이나 보고 있을까, 라고 생각하면서 시선을 돌려 다시 자실장을 보았다.
하지만 자실장은 TV가 아니라 내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건가.

“센세, 굉장히 실례이고 분충같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질문 몇 가지 되겠는테치?”

“해봐라.”

두 달간 이 녀석과 생활해본 결과 저 말은 
‘지금부터 너를 좀 귀찮게 할 질문을 할건데 괜찮냐?’
라는 의미이다.

“와타시는 지금까지 나쁜 행동을 하면 벌을 받아야한다고 배웠던테치.”

나는 자실장의 눈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닝겐을 죽이고 먹는 것은 나쁘기 때문에 저 닝겐은 벌을 받는테치. 맞는테치?”

“⋯그렇다.”

표현이 상당히 러프하지만, 이것도 맞는 말이다.

“그럼 오네챠들을 죽이고 먹은 와타시도 나쁜 것이 맞는테치?”

브리더의 어려움은 이런 곳에 있다.
실장석의 질문에 고민하는 모습을 보이는 순간, 권위가 깨지고 얕보일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빠르게 머리를 굴려 답변을 해야한다.

“그렇다. 자매를 죽이고 먹은 것은 분명히 나쁜 행동이다.”

선천적인 장애로 고통과 죽음에 대하여 알지 못했던 이 실장석의 행동이 단순히 이 녀석이 나쁘다, 라고 치부할 수 있는 단순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나 개인으로서의 견해이지 브리더로서 할 말은 절대 아니다.

“죄송한테치. 몇 가지 더 여쭤보겠는테치. 대체 죽음이 뭐인테치? 그리고 다른 것을 죽이는 건 왜 나쁜테치?”

예상은 했지만 역시 난감하다.
우리가 살인, 살생을 금기시하는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가장 간단하고 근본적인 이유는 그것이다.

‘내가 죽고싶지 않으니까.’

‘죽는 것은 아프니까. 아픈 것은 무섭고 싫으니까.’

생명체라면 기본적으로 고통을 피하려고 하고 죽음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것을 타인에게 하지 않는다는 간단한 역지사지를 이 녀석에게는 설명할 수 없다.

“일단 네가 죽음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을 말해보겠나?”

“움직이지도, 말하지도 못하게 되는 것인테치. 많이 맞아도, 숨을 못쉬어도, 밥을 못먹어도, 병에 걸려도, 크게 베여도 그렇게 되는테치.”

꽤 사실에 근접해서 알고있는 것이 의외였지만 나는 이 녀석이 보는 TV프로그램을 떠올렸다.
좀처럼 프로그램 선정에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 녀석, 죽음에 대하여 언급하거나 나오는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었던 것인가.

“네가 보고 알고 있는 것 처럼 몸에 일정 이상의 타격을 받게되면 움직일 수 없게되고 더 나아가 생각도 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이 죽음이다.”

“그게 다인테치?”

“뭘 묻고 싶은거지?”

“죽고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는테치?”

순간 내 머릿 속에는 환생, 천국, 지옥, 콘페이토의 낙원 등 온갖 사후세계가 떠올랐다.
하지만 나 조차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칠 수는 없다.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테치?”

“그냥 이 세상에서, 너라는 존재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죄송한테치. 잘 모르겠는테치. 죽은 닝겐도 실장석도 움직이지만 못하지 분명히 남아있는데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안되는테치.”

그것은 영혼이 떠난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시체다⋯라고 설명하는 것 보다는

“네가 자는 동안에도 세상은 여전히 흘러가지?”

“그런테치.”

“그렇다면 죽음은 영원히 자게 된다, 라고 생각해라.”

이렇게 설명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
죽음의 다른 말은 영면.
영원히 잠듦으로 아무것도 아니게 되는 것.
이 정도면 꽤 그럴듯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한다.

“이해한테치⋯그럼 고통이란 것은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 있는테치?”

“그렇지.”

역시 이해력이 꽤 좋은 녀석이다.

“그렇다면 다른 실장석을 죽이는 것은 어째서 나쁜테치?”

“그것은 설명하기 꽤 어려운 일이다.”

나는 말을 끌면서 최대한 그럴듯한 이유를 찾기위해 머리를 굴렸다.

“굳이 설명하자면, 대부분의 생명체는 죽음과 고통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기 때문이지.”

너를 제외하고 말이지, 라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어째서 죽는 것이 무서운테치?”

“흠…….”

그 밑도 끝도모를 질문에 남자는 또 다시 고민하였다.
대체 고통도 공포도 느끼지 못하는 이 실장석에게 ‘죽음을 무서워하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해야한단 말인가?

“살아있는 것들은 행복을 추구하거나 아니면 행복을 누리며 살아간다.”

나는 최대한 정론에 가까운 말을 했다.

“만약 죽게되면 더 이상 행복을 누릴 수 없고, 행복을 위해 노력해왔던게 전부 다 없어지기 때문에 죽는 것은 두렵다.”

자실장이 이해할 수 있을까 불안해진 나는 쉽게 좀 더 풀어서 이야기하였다.

“나는 가진 것이 많다. 먹을 것도 많고, 입을 것도 많고, 그 밖에 즐길 수 있는 것들도 많다. 죽으면 이 모든 것을 잃게 되겠지. 이런 이유로 죽는 것이 무섭다.”

막연한 공포를 제외한다면 아마 이것이 가장 합리적인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자실장의 말은 나의 예상을 넘은 것이었다.

“그럼 와타시에게 벌을 내려주시는테치.”

벌이라고?

“네가 자매를 잡아먹은 것에 대한 벌을 내려달란 뜻인가?”

“와타시와는 다르게 장녀챠와  차녀챠는 행복할 수 있었던테치. 그런데도 와타시는 장녀챠와 차녀챠를 먹어버린테치. 이것은 나쁜 행동인테치. 그러니 와타시에게 벌을 내려주는테치.”

꽤 정론이다. 그런데⋯⋯

“너와는 다르게?”

“센세가 말씀하신대로라면 와타시는 가진 것이 없고, 먹어도 맛을 모르고, 입어도 감촉을 모르고, 즐길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는테치. 행복을 느낄 수 없는테치. 이런 와타시하고 장녀챠, 차녀챠를 어떻게 비교하겠는테치?”

나는 이 녀석에게 글을 가르쳐주면서 스스로에 대해 알 수 있기를 바랐다.
그 결과 이 녀석은 스스로에 대해 내린 답은 자신은 죄인이라는 것이다.

나는 자실장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자실장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한참을 대치하던 우리 둘의 귀에는 뉴스가 흘러나왔다.

“⋯다음 소식입니다. 최근 성범자들의 형량이 너무 적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성범죄자들의 형량을 늘려달라는 청원이 올라오고 서명자 수가 무려 10만명이 넘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12.

부와와아왕

남자의 자동차는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이윽고 곧 점이 되어 보이지 않게 될 때 까지, 41번 실장석은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그렇게 멍하니 있던 41번은 천천히 몸을 돌려 공원 입구를 바라보았다.
공원 입구의 표지판에는 ‘닝겐상 사랑하는데스!’라고 말하는 실장석을 끌어안고 방긋방긋 웃는 인간과 함께 ‘실장석 생태 공원, 두루마리 공원에 어서오세요!’라는 문구가 박혀있었다.


“⋯⋯.”

초현실적을 넘어 전위적이기까지한 표지판을 응시하던 41번 실장석은 공원으로, 자신이 앞으로 2년간 살게 될 장소로 걸어갔다.

“너의 벌은 공원으로의 추방이다.”

남자는 자실장에게 그렇게 선고했다.
자실장은 스스로 피고이자 죄인을 자처하였고, 남자는 검사이자 재판장이자 배심원이었다.

“너는 고통도 느낄 수 없고 죽음에 대한 공포도 없다. 따라서 내가 너에게 내리는 벌은 ‘생존’이다.”

자실장은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적절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공원으로 걸어가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들로 버려진 전사육실장들이 말하기를 들생활은 ‘죽는 것만도 못하다’라고 하더군.네가 죽인 자매는 두 명이다. 그러니 너에게 2년간 공원에서 살아는 남는 것을 선고한다.”
자실장은 자신의 가슴팍을 더듬었다. 
하지만 태어났을 때 부터 그랬듯이 손 끝에서는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자신에게는 의미가 없지만, TV속에서 봤던 인간들은 이렇게 잃어버린 것을 더듬고는 했던 것 같다.
감각이 없는 나의 손 끝과 감각이 있음에도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그들의 손 끝은 뭐가 다른 것일까?

“하지만 네가 2년을 채우기 전에 죽는다면 죗값을 치르지 못하게 되겠지. 따라서 너의 위석은 내가 맡아두겠다.”

위석을 빼는 동안 남자는 41번 실장석의 눈을 가렸기 때문에 41번은 자신의 위석을 보지 못하였다.
41번 실장석은 자매들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너 같은 년도 위석이 녹색인테치?’ 아마도 그런 말이었던 것 같다.
41번 실장석은 궁금해졌다.
나의 위석은 녹색이었을까?
“그리고 너에게 이름을 주도록 하겠다.”

언젠가 마마에게 물어본적이 있다.

“앞으로 누군가가 이름을 물어보면 무조건 답하도록. 이것또한 들실장들이 너를 미워하게 하기위한 벌이다.”

마마는 ‘로토’라고 불리는데 나는 어째서 이름이 없냐고.

“그리고…….”

그러자 마마는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스스로 죄를 짊어지는 너에게 내가 차리는 최소한의 예의다.”

‘그것은 언젠가 삼녀가 이름을 가질 자격이 생길 때 가지게 될 것인데스.’

“너의 이름은……”

‘이름을 가지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닌데스. 그만큼의 책임도 따르는데스. 명심하는데스.’

“41번이다. 기억하도록.”

마마 와타시는 자격이 생긴테치?
세상에 모든 사육실장들은 자매의 목을 물어뜯어 먹어서 이름을 얻게되는테치?
41번은 끝모를 의문을 품으며 공원으로, 자신의 죄를 향해 걸어갔다.






1.

 

J시의 두루마리 공원은 나름 명물이라고 할 만한 공원이었다.

공식적으로는 ‘실장석과 시민이 어우러져 양자의 친목과 평화를 도모하는 생태공원’이었지만, 실상은 시 곳곳에서 벌어지는 애호파와 학대파의 대립과 연이은 사건에 학을 뗀 J시에서 아예 실장석들을 한 곳에 몰아넣고 애호든 학대든 마음대로 하라고 만들어놓은 곳이었다.

 

그런 의도로 건설된 두루마리 공원은 초기에 사방팔방에 참피새끼들이 데스데스 거리고 빠루와 애오파들의 고함소리가 왕래하는 지옥도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애호파와 학대파는 합의를 통해 어느 정도 암묵적인 규칙들을 정하게 되었고, 실장석들도 어느 순간 등장한 보스의 지휘 아래 안정을 찾았다.

그래서 지금은 애호파들은 적당히 푸드를 뿌리고 학대파들은 적당히 빠루를 휘두르고 실장석들은 적당히 새끼를 까는 그럭저럭 평화로운 공원이 되었다.



애호파와 학대파는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충족감을 얻고, 실장석들은 인간에게 의지하거나 혹은 자신들만의 방법으로 생존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과 실장석이 공존하는 진정한 생태공원이었다.

 

41번이 공원으로 향하자 마침 입구 쪽에서는 어떤 남자가 공원벤치에 앉아서 한 줄로 선 실장석들에게 푸드를 나눠주고 있었다.

퍽 흔한 풍경이었지만, 특이한 점이 딱 한 가지 있었다.

 

“자~ 와서 푸드나 처먹어라 참피새끼들아.”

 

“저 미친 망치닝겐이 또 온 데스.”

 

“오늘은 잡을 분충 없는데스?”

 

벤치 한 쪽에 망치와 큰 자루를 올려놓았다는 점이다.

41번 실장은 자연스레 저걸 어디에 쓰는지 궁금해졌다.

 

“어이! 똥닝겐!! 이런 똥쓰레기 따위로 고귀한 와타시의 혀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스까! 당장 와타시에게 어울리는 극상의 프렌치 코스를 내놓지 못하겠는뎃샤!!”

 

“옳지 옳지, 지옥 갈 대기자 줄에나 들어가시게나.”

 

“무슨 개소리를 짖는데교복!”

 

데엥!

 

흔히 보이는 분충을 남자는 자연스럽게 망치를 잡아 실장석의 머리를 후려쳤다.

41번은 남자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남자가 애호파가 아니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데에…데에….”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실장석은 눈깔을 까뒤집고 혀를 쭉 내민 채 뭍에 건져 올린 생선처럼 파들거렸다.

그러자 남자는 숙련된 어부처럼 피와 침을 질질 흘리는 실장석을 집어 들어 꿈틀거리는 커다란 검은 봉투에 던져 넣고는, 다시 포대자루에서 푸드를 꺼내 나눠주기 시작했다.

흡사 밑밥을 뿌리고 그물을 던져 낚시를 하는듯한 풍경이었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실장석들은 남자의 손에서 피가 뚝뚝 흘러내려 푸드를 적셔도 넙죽넙죽 받아먹을 뿐이었다.

 

“저 년은 얼마 전에 새치기하다가 걸린 년 아닌데스? 어디 사는 년인데스?”

 

“얼마 전에 화장실 근처에 버려진 전사육실장 같았던데스. 맨날 밥은 안 구하고 이상한 지랄만 하고 사는가 싶더만 결국 이렇게 가고 마는데스.”

 

“장녀쨩, 오마에는 저렇게 되지 마는데스. 안 그러면 저 망치닝겐이 잡아가는데스. 알겠는데스?”

 

“하이테치!”

 

줄을 서면 푸드를 주고 다른 걸 요구하거나 새치기를 하면 안 된다. 어길시 벌을 준다.

그렇게 파악한 41번 실장은 줄의 맨 뒤로 가서 줄을 섰다.

앞에 있던 성체실장석이 41번을 힐끗 보고 살짝 인상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이내 별 말없이 시선을 돌렸다.

 

“닝겐상. 조금만 더 주면 안 되는데스웅? 대신 카와이한 무스메쨩의 춤을 보여드리겠는 데스웅~”

 

“짓소-짓소니~♡ 메로메로 되라테츙~♡ 닝겐노 하토에 짓소짓소……데교복!”

 

“삼녀어어어어어!!! 똥닝게에엔!! 오마에 같은 음식물쓰레기는 천년을 살아도 구경도 못할 귀하디귀한 걸 보여줬더니 뭐하는 짓거리인뎃샤!! 당장 도게쟈하고 와타시를 사육실장으로 삼아라…데교복!”

 

“니코쨩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분충은 용서치 않아요!”

 

박살나는 소리는 두 번 나자 남자의 봉투는 수확물을 두 마리를 삼키고 조금 불어났다.

더 달라고 해도 안 된다, 라고 41번은 배웠다.

 

“감사한데스. 미친 망치닝겐상.”

 

“감사한데스. 생색 오지게 내는 닝겐상.”

 

“그래그래. 잘 먹고 잘 살아서 너 닮은 새끼나 열심히 까라구. 응? 자실장 아니야? 혼자 왔냐?”

 

“그러한테치.”

 

남자는 자실장을 한참동안 바라보더니 씨익하고 웃으며 말했다.

 

“너, 버려진 사육실장이지? 고아 자실장이 그렇게 깨끗한 옷을 입고 있을 리가 없지.”

 

남자는 내심 자실장이 이성을 잃고 울부짖거나 달려들기를 기대하며 말했다.

 

“와타시는 죄를 지어 벌을 받은테치. 그래서 공원에 온 테치, 닝겐사마.”

 

기대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았지만 남자의 얼굴에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었다.

그리고 여전히 미소를 띠며 자실장을 이리저리 관찰했다.

 

“너 굉장히 작구나. 아직 1살도 안 되겠어. 그럼 사육실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린데…아하! 너, 사육실장 교육받다가 버려진거네. 맞니?”

 

‘버려졌다’라는 표현이 좀 애매하긴 하지만 어쨌든 남자의 말에 틀린 점이 없었기 때문에 41번은 긍정을 표했다.

 

“그 말씀이 맞는테치.”

 

“흠, 그래? 잘 됐네~ 나는 실장석을 굉장히 좋아하는 사람인데, 너 혹시 우리 집에 오지 않을래?”

 

두루마리공원에서 애호파와 학대파 사이의 암묵의 규칙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몇 가지는 ‘학대는 분충만.’ ‘실장석을 동의 없이 납치하지 말 것’이다.

그래서 학대파들은 들실장들을 온갖 좋은 말로 구슬려서 들실장들의 동의를 받아 데려갔고, 공원에 남은 실장석들은 그러한 감언이설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었다.

 

하지만 방금 버려진 이 자실장이라면 당연히 OK하지 않겠는가?

 

라고 남자와 근처에서 푸드를 갉아먹으며 둘을 지켜보던 들실장들은 생각했다.

 

“정말 죄송한테치, 닝겐사마. 하지만 와타시는 공원에 있어야하는테치.”

 

아쉽게도 남자의 계산은 틀렸고 검은 봉투는 수확물을 얻지 못했다.

남자는 처음으로 미소를 거두고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냐, 하는 수 없군……자, 이거나 받아가라.”

 

 

남자는 포대자루에서 푸드를 두어개 꺼내 41번에게 주었다.

 

“감사한테치, 닝겐사마. 감사히 먹겠는테치. 언젠가 기회가 닿으면 이 은혜를 반드시 갚겠는테치.”

 

들에서는 볼 수 없는 정중하고 세련된 인사를 본 남자는 혀를 살짝 차며 아쉬워했다.

 

“꽤나 교육을 잘 받은 것 같은데 어째서 버려진 건지 모르겠네. 너, 이름이 뭐냐?”

 

‘까짓 규칙은 무시하고 그냥 데려갈까? 어차피 버려진 자실장이라서 들실장놈들이 애호파들한테 가서 꼰지를 것 같지도 않은데.’

 

“와타시의 이름은…….”

 

그렇게 남자가 규칙을 어기고 41번을 데려갈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장녀챠!! 여기서 뭐하고 있었던 데스웅? 데에? 마마를 대신해서 닝겐상에게 푸드를 받은데스웅? 혼또니 기특한 무스메인데스웅! 닝겐상 아리가또데스웅~ 그럼 어서 집으로 돌아가는데스!”

 

풀숲에서 갑자기 알 수 없는 성체실장이 튀어나왔다.

 

“오바상은 누구인테…”

 

“집으로! 돌아가는! 데스!!”

 

의문의 성체실장은 41번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고는 막무가내로 끌고 가려 했다.

 

“그러니까 오바상은 누구인테…….”

 

“마마보고 오바상이라고 하다니, 장녀쨩 더위라도 먹은데스? 가만히 좀 있는 뎃샤! 무슨 어린년이 이렇게 힘이 ㅆ…빨리 집에 돌아가는 데스웅~”

 

전형적인 납치 혹은 유괴의 현장이었다.

하지만 남자가 의외로 별 말없이 쳐다보자, 성체실장은 빠르게 41번을 데리고 풀숲으로 뛰어갔다.

 

옆에서 다른 들실장들은

‘저 분충년 안 잡아가고 뭐하는데스?’라는 눈빛으로 쳐다보았지만 남자는 저 성체실장이 어떤 녀석인지 알고 있었고, 위험을 무릅쓰고 저 자실장을 데려간 이유도 대충 짐작이 갔다.

스탠다드한 학대도 좋지만, 실장석들 간의 저열한 군상극도 남자의 취향이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기대하며 남자는 히죽 웃고 망치를 들며 말했다.

 

“잔치는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라 똥덩어리들아.”

 

 

2.

 

“헤엑…여기라면 안심인데스.”

 

“그러니까 오바상은 누구인…….”

 

“그만 좀 닥치는뎃샤! 몇 번을 물어보는뎃샤!”

 

“그러니까 오바상은 누구인테치?”

 

41번은 당연히 이 정체불명의 성체실장석이 누구인가 신경이 쓰였다.

가만히 보니 제일 먼저 눈에 띄인 것은 어깨에 두른 사육실장용 빨간 크로스백이었다.

좀 더 자세히 보니 가방 한 쪽 구석에 희미하게 ‘칸쵸’라고 써져있다.

어디서 구한 것일까?

 

“오마에같이 쬐끄만 꼬맹이를 잡아먹으려고 데려온 건 아니니 걱정마는데스”

 

“그럼 왜인테치?”

 

“오마에, 전 사육실장이 맞는데스?”

 

41번은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전 사육실장이 아니었다.

 

“사육실장도 아니고, 사육실장이었던 적도 없는 테치.”

 

“데뎃?”

 

성체실장이 굳이 그 무서운 망치닝겐으로부터 이 자실장을 데리고 온 것은 분명히 전 사육실장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걸까?

성체실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오마에, 닝겐한테서 이름을 받은데스?”

 

“받은테치. 와타시는 41번이라고 하는테치.”

 

“이름이 있잖는데스! 그러면 사육실장이 아니고 뭐인데스!”

 

“그러니까 와타시는 사육실장도 아니고, 전 사육실장도 아니고 사육실장 후보생이었던 테치. 이름을 받은건 와타시에게 주어진 벌이고, 벌을 받게된건 와타시의 자매가 잠자고 있을 때 아무것도 모르고 목을…테벳!”

 

갑자기 머리에 내리쳐진 충격에 41번은 혀를 씹었다.

영문을 모르는 말만 끝도 모르고 내뱉는 41번에게 지친 성체실장은 41번의 머리를 세게 내려친 것이었다.

 

 

“쬐끄만 놈이 무슨 이상한 말이나 하고 있는데스!

 

“아픈테치?”

 

“또 이상한 말이나 하면 와타시의 주먹맛을 보여주는데스. 지금부터 와타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젓는 걸로만 대답하는데스. 알겠는데스?”

 

끄덕끄덕

 

“전 사육실장이라 말귀를 빨리 알아먹어서 좋은데스. 오마에, 닝겐들이 말하는 실장숍인가 뭔가에서 자란게 맞는데스?”

 

 

끄덕끄덕

 

“닝겐에게 길러진게 맞는데스?”

 

갸웃? 끄덕끄덕

 

“이름을 받은데스?”

 

끄덕끄덕

 

“중요한 질문이니 잘 생각하고 대답하는데스. 오마에, 혹시 글을 쓸 줄 아는데스?”

 

…끄덕끄덕

 

“좋은데스, 좋은데스! 꼬맹이, 운 좋은 줄 아는데스. 아까 그 닝겐은 공원의 분충들을 잡아가는 학대파였던데스!”

 

그리고선 성체실장은 ‘어떠냐 놀랬지?’란 표정으로 41번을 쳐다보았지만 41번은 그저 멀뚱멀뚱 바라볼 뿐이었다.

 

“자비로운 와타시가! 오마에를! 학대파의 위험을 무릅쓰고! 구해낸데스! 뭔가 고마운 마음이 들지 않는데스?”

 

……끄덕끄덕

 

“그런데 어째서 가만히 있는데스? 빨리 입을 열어 고귀한 와타시를 찬미하지 않고 뭐하는 뎃샤!”

 

41번은 잠시 성체실장을 쳐다보다 팔을 들어 성체실장을 가리키고, 자신의 입을 가르켰다.

 

“뭐인데스? 뎃, 입 열어도 좋은데스.”

 

“고귀하고 세레브한 들실장사마. 미천한 와타시를 저 잔인하고 무서운 학대파의 손아귀에서 구출해주셔서 정말로 감사한……” “에이씨, 관두는데스 하여간 전사육실장놈들은 오마에처럼 재수없기 짝이없는데스

 

41번의 짜증나는 말씨에서 오래 전에 가졌던 증오를 떠올렸지만, 자신은 저 자실장이 필요하였다.

그걸 위해서라면 저 거슬리는 태도 정도는 상관없다.

 

“은혜라니 말 잘 나온데스. 꼬맹이, 와타시가 오마에의 생명을 구해줬으니 오마에도 와타시를 위해 해줘야할 게 있는데스. 만약 잘만 해준다면….”

 

성체실장은 말을 끌면서 41번의 얼굴을 힐끔 보았다.

 

“와타시의 자로 삼아줄 수도 있는데스.”

 

회심의 미끼였다.

고아자실장을 자로 삼아준다는 조건. 통하지 않을 리가 없다.

 

“말씀하시는테치.”

 

표정으로 자실장의 생각을 읽어내려던 성체실장은 혀를 한 번 차고 보기했다.

일단 데려와서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위험으로부터 구해줬는지 알려줘서 감사의 마음을 갖게 한 다음에 자로 삼아준다는 미끼로 자신의 말을 듣게 하려는 계획이었는데 어째 이 쬐끄만 녀석의 태도는 영 신통찮다.

 

“그건…와타시에게…글을 알려주는 것인데스.”

 

남자가 여기에 있었다면 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실장석을 두 명이나 봤다면서 놀라워할 것이다.

 

“오마에 전에 부탁한 화장실 앞에 사는 년은 글을 잘 안다고 큰소리 뻥뻥치더니 식량만 받아쳐먹은 빌어먹을 년이었던데스. 오마에는 아니길 바라는데스.”

 

성체실장에 으름장에 아랑곳하지 않고 41번은 성체실장에게 물었다.

 

“오바상. 혹시 읽고 싶거나 쓰고 싶은 것이 있다면 오바상이 글을 배우는 것보다 와타시에게 읽고 쓰게 하는 것이 더 빠르지 않겠는테치?”

 

그 말을 들은 성체실장은 이미 여러 번 생각해본 문제를 지적받은 사람처럼 약간 짜증난다는 표정을 지었다.

 

“와타시는 그렇게 멍청하지는 않은데스. 애초에 그럴 생각이라면 그냥 공원에 오는 애호파에게 부탁하는게 빠른데스.”

 

“그럼 대체 왜 와타시를 자로 삼으려면서까지 글을 배우려고 하는테치?”

 

“하…일단 좀 걸으면서 말하는데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스.”

 

성체실장은 그 말을 끝으로 풀숲 안쪽을 향해 천천히 걷기 시작했고, 41번 역시 뒤를 바짝 붙어 따라갔다.

기쁜 다는 듯이, 그립다는 듯이 말을 꺼내는 성체실장의 손은 어깨에 멘 빨간 가방을 꽉 붙잡고 있었다.

 

3.

칸쵸는 운이 좋았다.

차녀로 태어나 저실장이 되지 않았고, 봄에 태어나 들실장치고 덜 굶고 자랐기 때문에 덩치도 괜찮았다.

 

자실장 시절 분충인 어미 밑에서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지만 옆집의 친절한 일가와 교류하며 옳은 것과 옳지 않은 것, 인간의 두려움을 배웠다.

하지만 고아 자실장 무리들이 그 일가에게 월동식량을 요구하다 끝내 목숨까지 빼앗아 버린 것을 보고 들생활에서 착하게 사는 것은 결국 파멸의 길이라는 것을 배웠다.

 

어미는 겨울을 대비하지 않고 빈둥거리다 첫눈이 오기 시작하니 탁아를 시도하였다.

그 결과 장녀는 실패, 차녀인 자신은 성공했다.

차녀는 봉투 안에 든 것들을 먹어치우거나 운치를 지릴만큼 멍청하지도 않았고, 봉투의 주인은도 굳이 멀쩡한 실장석을 괴롭히는 학대파가 아니었다.

 

봉투 주인의 집에는 마침 최근에 죽은 이구아나가 쓰던 수조가 있었다.

차녀는 인간과 원활한 대화를 통해 수조 안에서 자신의 존재, 수조, 먹다 남은 잔반, 그리고 봉투에 들어있던 과자 이름에서 따온 ‘칸쵸’라는 이름을 허락받았다.

 

탁아 성공에 들떠 사육주의 대문을 두들기며 모든 것을 망쳐놓을지도 모를 어미는 칸쵸를 쫓아오다가 차에 치어 아무도 모르게 도로변에서 죽었다.

 

그 날 이후 칸쵸와 사육주는 서로의 존재에 점점 익숙해졌고, 마침내 칸쵸는 수조의 바깥에서도 자신의 존재를 허락받았다.

그 날 칸쵸는 생전 처음으로 실장숍에 가서 사육실장용 빨간 크로스백을 선물받았고, 사육주에게 부탁해 가방에 자신의 이름을 써넣었다.

주인에게 받은 첫 선물에 주인에게 받은 이름이 써져있는 것을 끌어안으며 칸쵸는 이것을 자신의 생애 최고의 보물로 여기기로 결심했다.

 

사육주의 훈육은 엄했지만 쌍방에게 이해할만한 것이었다.

보통은 잔반을 먹었지만 이따금씩 고기 비계 조각, 유통기한 지난 초콜릿 같은 특식이 나오기도 했고, 가끔 사육주의 집에 친구들이 놀러와 술판을 벌일 때는 그들에게 재롱을 떨고 진수성찬을 얻어먹기도 했다.

 

남자가 푸념을 하면 들어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웃어주고, 이따금씩 가볍게 다투기도 했지만 결국엔 다시 화해했다.

주말에는 같이 여행을 가기도하고, 맛있는 식당에 가서 음식을 나눠먹기도 하는 안온한 일상이며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소중한 나날들이었다.

그렇게 그 둘은 서로에게 만족감과 정서적인 안정을, 추억이라 할 만한 것들을 안겨주었다.

 

죽이지 않으면 죽일 수밖에 없고 뺏지 않으면 뺏길 수밖에 없는 들생활을 하던 칸쵸는 이 일상의 소중함에, 새로운 세계를 보여준 주인에게, 주인을 만나게 된 자신의 행운에 감사하고 소망했다.

이 나날들이, 행복이, 행운이 언제까지고 쭉 이어지면 좋겠다고.

 

 

4.

 

성체실장이 된 칸쵸는 운이 좋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얼굴과 배에 살이 늘어지고 귀염성은 없어졌다.

사육주의 직급이 올라가면서 회사일은 늘어나고, 집에 있는 시간은 줄어들었다.

둘이 같이 있는 시간은 줄어들면서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정도도 줄어들었다.

칸쵸는 자실장 시절에 비해 외모가 엉망이 되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사육주가 집에 오면 애정을 확인받고 싶어 했지만 사육주는 그럴 여력이 없었고, 초조해진 칸쵸의 말과 행동은 나날이 거칠어졌다.

 

감정을 소모하는데 지친 사육주는 돈과 물건으로 칸쵸의 문제를 해결하려했고, 칸쵸의 요구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하지만 주인을 닦달해서 얻어낸 고급 드레스와 장난감도, 맛있는 푸드도 칸쵸의 황폐한 마음을 달래주지는 못했다.

사육주와 같이 있는 몇 안 되는 시간동안 칸쵸는 사육주에게 더 비싼 것, 더 세레브한 것을 요구했지만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칸쵸는 말하고 싶었다.

 

미안하다고.

주인님이 힘든 걸 알면서도 험한 말을 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잔반을 먹어도 좋고 예전 생활로 돌아가도 좋으니까, 같이 있고 싶다고.

이딴 드레스나 장난감 따위 다 가져가도 좋으니까 예전처럼 같이 웃으면서 울면서 행복하게 지내고 싶다고.

정말 고맙고, 미안하고, 같이 있고 싶다고.

그것뿐이라고.

 

만에 하나, 아니 어쩌면 꽤 높은 확률로 칸쵸는 이런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약간의 용기와 운만 따라줬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성체실장이 된 칸쵸는 운이 좋지 않았다.

 

만약 사육주의 동창 중에 부자친구가 있지 않았다면.

그 부자친구가 여흥으로 세레브 실장석을 구입하지 않았다면.

그 세레브 실장석에게 질리지 않았다면.

사육주가 무심코 사육실장 때문에 곤란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사육주에게 세레브 사육실장을 넘기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리지 않았다면

 

…그리고 혹시나

 

사육주가 실장석의 생태에 대해 조금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면.

세레브 실장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오늘에야말로 제대로 말하자라고 생각하며 칸쵸가 사육주를 맞이할 때 눈에 보인 것은 사육실장의 고급케이지. 그리고 그 안에 정갈히 무릎을 꿇고 있는 실장석이었다.

사육주는 칸쵸에게

‘앞으로 너와 지내게 될 친구이다.’ ‘좋은 아이니 친하게 지내면 좋겠다.’ 등의 말을 했지만

칸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밖에 없었다.

 

버려진다.

 

버려진다

버려진다

버려진다!

 

…칸쵸는 그 순간을 아직도 희미하게 기억한다.

자신은 괴성을 지르며 그 세레브 실장석에게 달려들었고, 세레브 실장석은 너무나도 손쉽게 칸쵸를 제압했다.

사육주는 세레브 사육실장 발밑에서 울부짖는 칸쵸에게 ‘결국 이렇게까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등의 말을 하면서 오랜만에 실장채를 들었고, 칸쵸는 얻어맞으며 지쳐 쓰러질 때까지 괴성을 질러댔다.

 

5.

 

칸쵸가 눈을 뜬 곳은 낯설고도 익숙한 공간이었다.

자실장 시절에는 크게만 느껴지던 수조의 벽을 보면서 칸쵸는 얻어맞은 상처가 쓰라렸다.

욱신거리는 상처와 함께 칸쵸는 사육주와 자신 사이의 무언가가 부숴졌다는걸 깨달으며 수조에 있었던 오래된 행복을 떠올렸다.

주인이 바라만 보아도, 웃어주기만해도, 서로 그곳에만 있어도 행복했던 그 시절을.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데스

 

그렇게 중얼거리며 수조 안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자 걸레를 들고 방안을 청소하던 세레브 실장석이 다가와 담담히 말했다.

 

“주인님이 말씀하시기를 아나따가 진정될 때 까지 거기에 두시겠다고 하셨던데스. 그리고……”

 

세레브 실장석은 잠시 머뭇거렸다.

 

“아나따와 친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하신데스. 와타시는 토파즈라고 하는데스. 친구상의 이름은 무엇인데스?”

 

칸쵸는 어제 자신이 이 실장석을, 그리고 이 실장석이 자신을 어떻게 했는지 떠올리며 피식거렸다.

 

친구?

 

차라리 나나 저년 둘 중 하나가 상대의 노예가 되는게 더 말이되겠지.

 

“그렇다면 친구상, 부탁이 있는데 혹시 와타시에게 뭘 좀 가져다 줄 수 있는데스?”

 

“말하는데스.”

 

“신발장 안에 빨간색 가방이 있는데스. 그걸 가져다 주는데스.”

 

토파즈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신발장을 향했다.

칸쵸는 멍하니 그 모습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팔을 움직여야 너무 방정맞거나 게을러 보이지 않는지, 어떤 타이밍에 발을 내딛어야 더 아름다워 보이는지 철저히 계산된 일련의 움직임을 보면서 칸쵸는 잠시 넋을 놓았다.

그건 토파즈가 가방을 칸쵸의 수조 앞에 가져다 줄 때까지 계속 되었다.

 

“미안하지만 이 가방은 수조에 있는 구멍에 들어가기에는 너무 작은데스. 이 앞에 놔둬도 괜찮겠는데스?”

 

“괜찮은데스.”

 

“더 부탁할 건 없는데스?”

 

“그런데스.”

 

토파즈는 잠시 칸쵸를 빤히 쳐다보고는 방 한 구석에 놔둔 걸레를 들고 청소를 재개했다.

 

칸쵸는 그 모습을 보고 언젠가의 추억을 떠올렸다.

자실장 시절 자신도 TV에 나오는 사육실장들처럼 주인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고 자신만만하게 집안을 청소하려고 했지만, 온 집안을 물바다로 만들어놓고 한가운데서 훌쩍거리는 자신을 주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안아줬던 추억이 있었다.

 

그 때의 자신은 주인에게 보탬이 되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그럴만한 능력이 부족했고, 지금의 자신은 그 둘 모두 없다.

그리고 저 실장석은 둘 모두 가지고 있다.

 

자신과는 다르게 저 실장석은 주인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 한 언제까지고 서로에게 좋은 관계가 될 것이다.

어제 한 순간 ‘저 년이 없었다면’이라고 생각했지만, 저 실장석이 없어진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나는 내 자리를 잃었고, 잃을 것이다.

열등감은 자신을 좀먹어 언젠가 자신을 평소에 경멸하던 분충들처럼 만들 것이다.

 

“토파즈상, 잠깐 괜찮은데스?”

 

그것만은 참을 수 없다.

 

“무슨 일인데스?”

 

지금도 분충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는 상태지만, 이 밑으로 더 굴러 떨어질 수 없다.

 

“안방 벽장에 와타시의 분홍색에 반짝반짝 가루가 뿌려진 실장드레스가 있는데 그것 좀 가져다 줄 수 있는데스?”

 

최소한 주인의 기억 속 추억만큼은 더럽히고 싶지 않다.

가끔 떠올릴만한 그런 존재 정도로는 남고 싶다.

 

“알겠는데스.”

 

토파즈가 안방으로 들어가자 칸쵸는 가만히 수조의 벽을 쳐다보았다.

수조 벽에 말라붙은 익숙한 얼룩들이 칸쵸를 약간은 망설이게 하였다.

하지만 이게 최선이다.

이걸로 된 거다.

칸쵸는 수조 벽을 향해 몸을 던졌다.

 

 

6.

 

“친구상. 벽장에 그런 드레스는 안 보이는데 혹시 다른 것 아닌데…..”

 

와장창!

 

토파즈는 거실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놀라는 대신 재빠르게 거실로 나가려했지만 방문을 무언가가 가로막고 있었다.

문고리는 매끄럽게 돌아가지만 문틈 사이로 어떤 막대기가 문을 막은 것이 보였다

 

“친구상! 당장 문을 여는데스!”

 

토파즈는 문을 쾅쾅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친구상! 당장 이걸 치우는데스! 주인님에게 혼날지도 모르는데스!”

 

‘혼난다’니 얼마나 무시무시한 말인가.

토파즈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위협이 통하지 않자 혀를 한 번 차고 온몸으로 문을 들이 받았다.

 

쿵! 쿵! 쿵! 쿵! 쿵!

 

토파즈의 몸이 문에 다섯 번 던져진 뒤에야 문이 열렸다.

열린 문으로 빠르게 달려 나갔지만 거실엔 깨진 수조조각만 보였고, 칸쵸와 빨간 가방은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현관문 우유투입구 사이로 녹색 옷자락이 살짝 보였다.

 

“거기 서는데스 친구상! 가출은 안 되는데스!”

 

토파즈는 현관문으로 달려가 칸쵸의 옷자락을 잡아채려 했지만 토파즈가 다다른 순간엔 이미 우유투입구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친구상! 대체 왜 이러는데스! 돌아오는데스!”

 

애꿎은 문만 쾅쾅 두드리면서 토파즈는 칸쵸가 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감히 주인의 집을 탈출할 생각을 하는지, 벌이 두렵지는 않은지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쫓아가야하는가?

 

자신이 주인에게 받은 명령은 ‘청소를 해두고 집을 지켜라. 수조 안의 저 녀석과는 싸우지 말라.’라는 명령이었다.

지금 우유투입구로 나가봤자 잡을 수 있다는 보장도 없고 다른 명령을 전부 지킬 수 없게 된다.

 

토파즈는 별 수 없이 이번엔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다시 거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주인이 오기 전까지 빨리 처리하자.

쓰레받기에 담긴 유리조각은 자신이 곧 버려진다는 것을 안다는 듯이 햇빛을 받아 마지막으로 반짝였다.

 

칸쵸는 계단을 뛰어 내려가며 자신이 마지막으로 본 집 풍경을 떠올렸다.

한 때 자신의 공간이었던 그 곳.

수조는 깨졌고 이 집에 허락된 칸쵸의 공간도 조각났다.

그나마 허락된 것은 어깨에 둘러멘 빨간 추억뿐이다.

칸쵸는 과거의 행복이었던 것을 끌어안으며 중얼거렸다.

 

이걸로 된데스.

 

칸쵸는 눈물을 훔쳐내고 앞으로 나아갔다.

 

행복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을 잊기 위해.

 

 

 

 

7.

 

성체실장, 아니 칸쵸와 41번이 다다른 곳은 하얀 꽃이 무성한 찔레나무 무더기 앞이었다.

줄기에 장미와 같은 가시들이 듬성듬성 박혀있고 높이는 실장석의 너다섯배는 되었다.

실장석들이 보기에 닿지도 않는 꼭대기에만 꽃이 피어있는 쓸모없는 거대한 가시기둥의 숲이었다.

 

“여기가 와타시의 집인데스.”

 

41번은 대꾸하지 않고 칸쵸를 쳐다보았다.

눈빛에 ‘장난치지 말고 제대로 말해라’라는 메시지를 담아서.

 

“참 놀리는 맛도 없는 녀석인데스.”

 

칸쵸는 짧게 혀를 한 번 차고 찔레나무 앞에서 유난히 잔디가 덜 자란 땅으로 갔다.

거기서 칸쵸는 찔레나무숲에 조심스럽게 손을 넣어 사이를 벌리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이쪽에는 가시가 없는데스. 조심히 따라오는데스.”

 

41번역시 칸쵸를 따라 가시가 난 곳을 피해서 조심스럽게 찔레나무 숲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예상대로 꽤 튼튼해보이는 골판지 상자가 입을 벌리고 있었다.

주변에 찔레나무가 둘러싸 숨기고 있는 이 골판지 상자는 인간으로부터는 몰라도 들짐승과 들실장들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적당한 곳에 앉는데스.”

 

칸쵸는 그렇게 말하고 골판지 한구석으로 가서 짐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41번은 칸쵸가 말한 대로 골판지 한 쪽에 적당히 꿇어앉아 내부를 둘러보았다.

 

골판지 안은 다른 들실장들의 골판지가 그렇듯이 어디에 쓰이는지 모를 플라스틱 상자, 보존식들, 담요 겸 이불인 것으로 보이는 인간의 티셔츠 등등 잡동사니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바닥에 뚫린 곳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운치굴은 밖에 있는 모양인데 무언가가 41번을 신경쓰이게 하였다.

 

‘핏자국이 왜 이렇게 많은테치?’

 

말라붙은지 꽤 오래 되었지만 일상생활에서 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핏자국이 너무 많은 것을 보고 41번은 지금까지 칸쵸가 무엇을 했는지 생각했다.

 

전 사육실장을 찾았다. 자신의 골판지로 데려왔다. 고아로 보이는 자신에게 자로 삼아줄 수도 있다고 했다. 골판지에 핏자국이 많다.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한 41번은 몸을 긴장시키고 자연스럽게 물었다.

 

“오바상, 이 얼룩 좀 닦아야하지 않겠는테치?”

 

“아, 그거 말인데스?”

 

짐들을 뒤적거리던 칸쵸는 끝이 검은색으로 번뜩이는 길고, 실장석을 충분히 꿰뚫을정도로 뾰족한 것을 꺼내들고 41번을 향해 다가갔다.

 

 

 

 

 

 

 

 

“그거 전에 살던 놈 핏자국인데스. 어차피 닦아도 안 지워지니 내버려두는데스야.”

 

41번은 긴장을 풀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자신에게 해코지를 했으면 이미 그 외진 풀숲에서 했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전에 살던 놈이라면 오바상이 이 골판지를 얻은 것과 관계있는 이야기인데스?”

 

칸쵸는 41번의 맞은 편에 연필을 놓고 그 앞에 앉으며 인상을 썼다.

 

“별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야기 아닌데스. 간단히 말해 전에 살던 놈이 자는 틈을 타서 유리조각으로 숨통을 끊은데스.”

 

“그런테치?”

 

굳이 싫다는 이야기를 억지로 들을 만큼 궁금한 것도 아니었기에 41번은 빠르게 화제를 돌렸다.

 

“오바상. 그런데 이것은 무엇인테치?”

 

41번의 질문을 들은 칸쵸는 눈에 약간 의심기를 띄우며 툴툴거렸다.

 

“글 쓸 줄 안다는 놈이 그것도 모르는데스? 연필상 아닌데스. 글 쓰려면 필요하지않은데스까.”

 

“와타시의 이야기는 종이도 없으면서 이것만 가지고 어디에 쓸 것이냐는 말인테치.”

 

“뎃? 글은 연필상으로 쓰는게 아닌데스? 또 뭐가 필요한데스?”

 

“그거야 당연히 종이든 뭐든 쓸 것이 필요한테치…아니, 그보다 몇 가지 좀 물어봐도 되겠는테치?”

 

아까부터 뭔가 여러모로 뒤죽박죽이라는 것을 느낀 41번은 일단 상황을 좀 정리하기로 했다.

 

“오바상 이야기는 들었지만 아직도 왜 글을 배우고 싶다는 것인지 모르겠는테치. 그것부터 말씀을 해주시겠테치?



“와타시는 마지막까지 주인님에게 말하지 못한데스.”

 

말하기 힘든 듯이 칸쵸는 이를 꽉 깨물며 말을 이어나갔다.

 

“주인님이 와타시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줬는지, 와타시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하게 느꼈는지, 마지막까지…와타시가…얼마나 분충같았는지…….”

 

41번은 칸쵸의 눈가가 글썽거리는 것을 보면서 실장석이 스스로 자신이 분충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은 어떤 마음일까 상상해보았다.

 

“다시 키워달라던가 그런 건 꿈도 꾸지 않는데스. 그냥…말하고 싶은데스. 그것 뿐인데스.”

 

“어쨌든 오바상이 하고 싶은 말씀이 있고, 그걸 편지로 전하고 싶으신 것이 맞는테치?”

 

칸쵸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바상의 주인사마라는 분이 어디사시는지 모르는테치? 어째서 직접 말하지않은시는테치?”

 

“와타시의 주인사마는 정말 좋은 분이셨는데스.”

 

칸쵸는 자신의 마지막을 생각했다.

되도 않는 요구들을 하다가 질투에 눈이 멀었고 마지막까지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어놓고 도망쳤다.

 

“와타시를 다시 보게 되면 마음이 좋지 않으실게 분명한데스. 그건 싫은데스.”

 

“그럼 오바상이 하고 싶은 말을 와타시가 글로 쓰는 것은 어떤테치?”

 

“그것도 싫은데스. 와타시의 편지는 와타시가 쓰고 와타시가 준비해서 와타시가 전해드리고 싶은데스. 다른 도움을 받아서는 의미가 없는데스.”

 

41번에게 칸쵸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얼굴도 마주치지 않고 일방적으로 전하는 말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하고 싶다면 왜 좀 더 빠르고 좋은 방법을 쓰지 않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알겠는테치.”

 

하지만 41번은 자매들과 생활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대해서 ‘그냥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져있었다.

 

“그래도 이 연필로는 안되는테치. 이것은 마지막에 쓰는테치. 일단은 적당한 나뭇가지를 구해다주는테치.”

 

“데뎃? 나뭇가지는 어디에 쓰려는데스”

 

“글이라는건 한두시간 배운다고 쓸 수 있는게 아닌테치. 부드러운 땅에 나뭇가지로 써가면서 글을 배우면 언젠가는 쓸 수 있을 것인테치.”

 

“정말인데스?! 정말인 데스까?!”

 

칸쵸는 뛸 듯이 기뻐하며 41번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어댔다.

“지금까지 전 사육실장 몇 놈들을 찾았는데 전부 구라만 치는 분충년들이었던데스! 그런데 이번엔 좀 다른 것 같은데스! 와타시는 빨리 나뭇가지를 구해오겠는데스!”

 

칸쵸는 빠르게 골판지를 뛰쳐나갔다.

41번은 보존식을 비롯해 들실장들에게는 탐나는 물건들이 가득한 골판지에 주인없이 혼자 앉아서 생각했다.

 

지금까지 잘 안 된 것은 혹시 이런 상황을 만들어서가 아닌가? 하고.

 

 

 

8.

 

실장석이 글을 배우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렵다.

그나마 자실장 시절에 학대에 가깝게 머리에 때려박는 식이라면 모를까 다 큰 성체실장이 글을 배우는 것은 이름 있는 브리더들에게나 가능한 기술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글을 읽게 하는 정도라면 어느 정도는 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실장석들은 말을 할 수 있고, 발음과 글자들을 매칭시켜주기만 하면 읽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면

 

“대체 왜 ‘좋아하는’라는 말은 ‘조아하는’가 아니라 ‘좋아하는’라고 쓰는데스?!

대체 왜 ‘미안한데스’라는 말은 ‘미아난데스’가 아니라 ‘미안한데스’라고 쓰는데스?!

글이라는건 대체 왜 이 따위로 생겨먹은 뎃샤!”

 

“오바상. ‘미안한데스’가 아니라 닝겐사마한테 말할 때는 ‘죄송한데스’라고 말하는 거라고 말했던테치. 그리고 그것은 와타시도 모르는테치. 그냥 무조건 외우기를 바라는테치.”

 

“존댓말인가 존대말인가 이 따위 것은 왜 있는뎃샤! 말이 통하면 아무래도 좋지 않는 데쓰!! 왜 같은 글자가 위치마다 발음이 다른 뎃샤아아아!! 닝겐들은 왜 글을 이따위로 만든데쓰!! 다 죽었으면 좋겠는뎃쑤우우우!!!!!”

 

“오바상.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오바상의 주인님을 생각하는테치. 정말 좋은 분이시지 않은테치? 그런 분께는 최대한 정성을 담아서 써야하지 않겠는테치?”

 

“후욱…후욱….아…알겠는데스. 다시 한 번 설명해주는데스.”

 

“그러니까 이것은…….”

 

이런 것이다.

머리가 굳은 성체실장은 글을 자연스레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크다.

하지만 다행히 글이라는 하나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쓰고 싶은 단어와 문장만을 외운다면 대충 흉내는 낼 수 있다.

41번은 누군가를 가르쳐본 적은 없지만 두 명의 이름난 브리더들에게 다양한 것을 배웠고, 그 가르치는 방식을 흉내내기만 하면 되었다.

 

“…모르겠는데스. 다시 설명해주겠는데스?”

 

“그러니까 ‘대스’가 아니라 ‘데스’이고, ‘미안한’이 아니라 ‘죄송한’인테치. 다시 한 번 써보는테치.”

그리고 41번은 인내심이라면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았다.

10개를 가르치면 9개를 까먹고 1개는 복습하지 않으면 잊어버렸지만 쉬지않고 쓰고, 배우고, 외운 끝에 다행히 날이 갈수록 나아졌다.

 

순조롭게 글을 배워나가면서 칸쵸는 약속했던대로 41번을 자로 삼아주겠다고 했지만, 41번은 간단히 거절했다.

 

“오바상이 살아있을 때라면 문제없겠지만 오바상이 죽고나면 와타시는 어떻게 사는테치?”

 

41번은 대신 들에서 밥을 구하는 법, 살아남는 법, 집을 구하는 법 등을 알려줄 것을 요구했다.

 

칸쵸는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다소 상했지만 41번이 얼마나 자신을 참아주는지, 얼마나 열심히 가르쳐주는지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투덜대면서도 밥을 구할 때마다 41번을 데리고 나와서 들생활에 필요한 지식들을 열심히 설명해줬다.

 

“여기 길을 잘 외워두는데스. 저곳은 밥을 구하는 곳이고 여기서는 가끔 쓸만한 것들을 얻을 수 있는데스. 밥을 구할 때는 맛있는 것만 골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잘 상하지 않는 것이랑 한 번 먹으면 오래 움직일 수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 중요한데스.”

 

“알겠는테치. 여기에 있는 이 콘페이토 같은 것 말인테치?”

 

“그런데스. 그 콘페이토 같은게 아주 좋지만 들에 있는 콘페이토 중에서 멀쩡한 건 별로 없는데스.”

 

“그럼 그냥 버리는테치?”

 

“콘페이토랑 아닌 걸 구분하려면 끝부분을 아주아주 조금 떼서 먹어보는데스. 이렇게 먹어봐서 반응이 오는 걸로 구분할 수 있는 데….궤에에에에에엑!!!”

 

“그거 아마 게로리인 모양인테치. 좋은 것을 배운테치.”

 

 

 

“꼬맹이, 그건 꼬맹이같은 자실장이 들기엔 너무 무거운데스. 이리 줘보는…데뎃?”

 

“빨리 가기나 하는테치. 이러다가 해 저물겠는테치.”

 

“오마에는 뭘 처먹었길레 이렇게 힘이 좋은데스? 하긴 토파즈인가 뭔가 하는 년도 지랄맞게 힘이 좋았던데스.”

 

다만 그것은 보답의 의미도 있지만 41번이 꽤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어이, 꼬맹이. 그건 안 열리는 상자인데 그런걸 어디에 쓰는데스?”

 

“아아…이건 구급상자라고 하는 것인테치. 여기있는 쇠고리를 올리면 자, 이렇게 쉽게 열리는테치.”

 

“오오! 대단한데스, 꼬맹이! 이제 보존식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데스!”

 

자실장치고는 힘도 좋고 인간들의 물건에 익숙한 41번의 지식으로 칸쵸의 골판지는 날로 윤택해졌다.

정서적 안정감과 만족을 주고받을 정도로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지만, 최소한 서로 등을 맡기고 잠들 수 있을 관계였다.



“꼬맹이, 혹시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데스?”



“아무거나 먹어도 상관없으니 대충 주시는테치.”



“그럼 안 되는데스. 오늘 오마에 덕분에 쓸만한 보물창고를 두 개나 구하고 보검도 발견한데스. 오늘은 특별히 와타시의 꽁꽁 숨겨놓은 특별식을 먹는 날이니 꼬맹이도 하나 골라보는데스.”



칸쵸는 그렇게 말하고는 보존식상자 깊숙한 곳에서 몇 가지를 꺼냈다.

포장지를 안 뜯은 사탕, 온전한 페레로로쉐, 반절 남은 판초콜렛, 살점이 거의 다 붙어있는 치킨조각 등 들실장들에게는 생일날에나 한 번 먹을까말까하는 특식이었다.



“자자, 맛있는걸로다가 하나 고르는데스!”



칸쵸는 그렇게 재촉했지만 41번은 영 난감하였다.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없는 자신이 이런 것들을 먹어봤자 낭비밖에 안 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굳이 주겠다는 것을 거절하는 것도 영 번거롭고 기분나쁠 일이니 마지못해 고민하던 41번은 하나를 골랐다.



“이걸로 하겠는테치.”



화려(?)한 음식 라인업들 사이에서 41번이 고른 것은 녹색 청포도 사탕이었다.

단순히 크기가 가장 작아서 선택한 것이지만 골라놓고도 41번은 약간 의아했다.



‘이것, 왜 여기에 있는 테치?’ 



사탕은 잘 썩지 않아 특식이나 일반식보다는 보존식 창고에 들어가는 것이 들실장들의 상식이고 그건 이미 칸쵸가 41번에게 몇 번이고 설명해준 사실이다.

약간 의아한 기색으로 칸쵸를 쳐다보려던 41번은 오랜만에 깜짝 놀랐다.



“그…그걸 고른데스?”



칸쵸는 41번이 난생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가랑 입가는 제멋대로 위로 올라가지만 미간은 필사적으로 그걸 억누르고있는, 비유하자면 포커에서 높은 패를 받은 초보자처럼 필사적으로 웃음을 억누르는 그런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 억누르는 웃음이 비웃음은 또 아닌지라 당혹스럽다.



“어…다른 것을 고르는게 낫는테치?”



“아닌데스, 아닌데스.”



고개를 저으면서 칸쵸는 그 괴상한 표정을 정리하고 조금 정상적인 표정이 되어있었다.



“와타시도…그걸 제일 좋아하는데스…….”



약간 나직하게 말하는 칸쵸의 표정은 가끔씩 짓고는 하던 어쩐지 좀 아득한 표정이었다.

조금 놀라기는 했지만 아까와 지금의 칸쵸의 표정은



‘따뜻한 표정인테치.’



굉장히 기뻐보였다.

자신은 모르는 어떤 추억이라도 떠올리는 것일까.



그리고 41번은 식사 내내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지켜보는 통에 사탕을 녹여먹으면서도 목에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이후로 칸쵸가 41번을 대하는 태도는 묘하게 친절해졌다.




그렇게 친모와 자도 아니지만 같은 골판지에서 한솥밥을 먹는 친실장과 자실장의 기묘한 동거는 20일정도 계속되었다.

 

 

9.

 

41번은 종이를 뚫어져라 읽고 있었고 옆에서 칸쵸는 그 광경을 긴장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좋은테치. 틀린 곳은 없는테치. 축하하는테치.”

 

칸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41번은 뭉툭한 손으로 짧게 박수를 쳤다.

골판지 한쪽에는 ‘이번에는 자신있는데스!’라고 주장하면서 종이에 글을 썼다 틀려서 버려진 종이들이 쌓여있었다.

그리고 저 무수한 실패 끝에 마침내 칸쵸는 마지막 종이에 틀린 것 없이 훌륭히 편지를 완성하였다.

 

“그동안 수고 많았던테치, 오바상.”

 

“데퍄퍄퍄! 와타시에게는 별 거 아니었던데스! 그래도……”

 

칸쵸는 웃다말고 갑자기 머뭇머뭇거리며 몸을 배배 꼬았다.

 

“고마웠던데스!! 그 동안 수고했던데스!! 진짜 진짜 고마운데스!!”

 

저 아줌마는 갑자기 왜 저러나, 생각하던 41번은 갑자기 내질러진 고함에 귀가 잠시 멍멍해졌다.

41번은 윙윙거리는 귀를 후비적거리며 말했다.

 

“고맙다고 말하기 힘들면 안 해도 신경쓰지 않는테치. 그렇게 소리를 지를 것 까지는 없잖는테치?”

 

“와타시의 실생에서 가장 후회하는게 있다면 그건 그때 하고 싶은 말을 못한것인데스.”

 

칸쵸는 작게 쓴웃음을 지었다.

 

“뭐든지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확실하게 말하는게 좋은데스. 오마에도 기억하길 바라는데스.”

 

“잘 배운테치. 기억하겠는테치.”

 

고개를 끄덕이는 41번을 보고 칸쵸는 작게 웃으면서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고는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아껴놓은 튼튼한 비닐봉투에 보존식과 물을 좀 챙기고, 호신용 보검도 챙긴다.

그리고 비닐봉투는 손잡이부분을 요령 좋게 짧게 묶어서 목에 걸면 훌륭한 여행배낭이 완성된다.

중요한 편지봉투는 두 번 접어 평소에 가지고 다니는 빨간 가방에 넣…으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이 다시 편지지를 빼내고 보물창고에서 뭔가를 꺼내서 편지봉투에 넣었다 .



“오바상, 편지 안에 뭘 넣는테치?”

 

“꼬맹이는 몰라도 되는데스.”

 

칸쵸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편지봉투를 두 번 접어 빨간 가방에 확실히 넣었다.

 

모든 준비는 마쳤다. 이제 남은 것은 출발하는 것뿐이다.

 

“이제 가시는테치?”

 

“편지도 다 쓰고 준비도 다 된데스. 더 이상 뭐가 필요한데스?”

 

“그런데 다시 물어보지만 그냥 애호파 닝겐사마께 부탁드려서 보내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는테치?”

 

“아닌데스. 무조건 와타시가 해야하는데스. 그래야 의미가 있는데스.”



41번은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그냥 원래부터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넘겼다.

하지만 이것만은 그냥 넘길 수 없다.

 

“오바상이 분명 여기서 거기까지 가는 길은 꼬박 하루를 걸어야한다고 했던테치. 가는 길에 분충 무리를 만나도 죽고, 학대파 닝겐사마를 만나도 죽고, 닝겐사마들이 실수로 발로 차고가도 죽고, 고양이를 만나도 죽고, 차에 치여도 죽고, 비가와도 얼어죽는테치. 운 좋게 주인사마 집에 도착했다 치더라도 관리인상을 만나면 어떻게 하는테치? 실수로 편지를 잃어버리면 또 어떻게 하는테치? 어찌어찌 편지를 전했다치더라도 오는 길은 또 어떻게 하는테치? 그런데도 굳이 직접 가야하겠는테치?”

 

칸쵸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느리지만 단단하게.

 

“…모르겠는테치. 와타시가 보기에는 오바상은 죽으러 가는 것인테치. 와타시도, 오바상도 살아있는테치. 살아있는 건 살아가려고 해야지 죽으려고 하면 안되는테치. 그런데 오바상은 대체 왜 그러는테치?”

 

41번이 남자로부터 배운 것은 모든 생명은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강력한 인간마저도.

그렇기에 장녀와 차녀를 죽이고 먹은 자신은 죄인이다.

그것이 41번이 짧은 생애동안 알게 된 유일한 진리였다.

 

“와타시라고 죽는게 무섭지 않은게 아닌데스.”

 

지금까지 41번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셀 수 없이 겪었다.

생전 본 적도 없는 물건들을 갈망하고, 될 리가 없는 도박에 자신만은 될 거라며 달려드는 분충들을 봐왔고 아주 가끔 아무런 이익이 없는 것이 분명함에도 자신이 먹을 것을 나눠주는 동족도 봤다.

41번은 이러한 것들을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 여기고 이해하기를 포기해왔다.

 

“그래도 이걸 직접 전하지 않고 사는게 더 무서운데스. 오마에가 말한 것 처럼 실장석은 참 죽기 쉬운데스. 내일일 수도 있고 모래일 수도 있는데스. 그런데 혹시 만약에 와타시가 죽을 때…….”

 

칸쵸는 늘 가지고 다니는 빨간가방을 쓰다듬었다.

41번은 칸쵸와 같이 생활하면서 그 장면을 여러 번 봐왔지만 이번에는 그 손이 약간 부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이걸 직접 전해주지 못하고 죽는다면 그게 정말 무서울 것 같은데스. 그건 고양이와 학대파 닝겐보다 더 무서울 것 같은데스. 그것 뿐인데스.”



하지만 지금, 자신과 같이 지낸 이 실장석이 거의 죽으러 가는 길에 말하는 것을, 아주 약간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살아가는 것보다 중요하고 죽는 것 보다 무서운 것도 있다는 것을.

 

“와타시가 따라가지 않아도 되겠는테치?”

 

“꼬맹이가 무슨 도움이 되겠는데스. 와타시가 올 때 까지 집청소나 하는데스.”

 

41번은 이미 대답은 알고있었다. 

그래도 대답을 바꿔줬으면 하고 약간은 바랐다.

 

“아, 그리고 꼬맹이.”

 

“말씀하시는테치.”

 

칸쵸는 문가에 앉아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출구를 향해 뒤돌아선 칸쵸의 표정은 41번에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떤 얼굴인지 알 것도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해가 두 번 뜰 때까지 와타시가 안 오면 이 골판지, 가지는데스.”

 

“두 번째 보존식 상자 낙엽사이에 숨겨둔 콘페이토도 말인테치?”

 

“…눈치 한 번 드럽게 빠른 년인데스. 그건 또 언제 봐둔데스?”

 

41번은 피식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이제 와타시 가는데스. 분충년들한테 골판지 안 털리게 조심하는데스.”

 

짐을 다 정리한 칸쵸는 옷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아마 이게 마지막이 될 수 있다는 것 정도는 둘 모두 알고 있었다.

41번은 칸쵸가 방금 전 말한 것을 기억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바로바로 해라. 그렇지 않으면 후회한다.’라고.

 

“오바상.”

 

“뭐인데스, 꼬맹이.”

 

“이 골판지, 혼자 쓰기에는 너무 넓은테치. 보존식도 혼자 먹기에는 너무 많은테치.”

 

“…그런데스까?”

 

“오바상, 꼭 돌아오면 좋겠는테치.”

 

그 말을 듣자 빗장을 열고 나가려던 칸쵸의 손이 멈칫했다.

그리고 무언가가 터져나오는 것이 참기 힘들다는 듯이 말하기 시작했다.

 

“와타시, 들실장으로 그래도 꽤나 살아온데스.”

 

“매일매일 쉬지 않고 사는 거랑 먹는 거만 생각해야만하고 해가 지고 골판지에 혼자 있으면 오늘 하루도 겨우 넘기는구나, 하고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났던데스.”

 

“우리들은 뺏을 수 있으면 뺏어야 하고, 죽여야한다면 죽여야하는데스. 와타시도 와타시의 마마도 와타시의 마마의 마마 때부터 그렇게 살아남은데스.”

 

“그랬던 와타시의 삶에서 다른 세계를 보여준 주인님은 그야말로 와타시의 신님이었던데스.”

 

“그런데 와타시라고 그게 좋은 줄 아는데스? 울면서 비는 년들의 머리통을 박살내야하고 자실장이든 저실장이든 먹을 수 있으면 목을 졸라 죽이고 잡아먹으면서 살아가는게 좋은 줄 아는데스?”

 

“이 골판지를 뺏을 때 전에 살던 놈의 목을 따고 있었을 때 이야기인데스. 유리조각으로 숨통을 끊고 있는데 그 년의 아이가 잠결에 와타시를 보고 마마라고 부른데스. 하지만 그 일가를 살려놓을 수는 없었는데스.”

 

“후회는 안 하는데스. 하지만 그렇게 하고나니 와타시는 살고싶은건지 죽고싶은건지 조차 알 수 없게되버린데스.”

 

“왜 와타시가 자가 없는지 아는데스? 와타시의 자에게 이런 삶을 살게 해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인데스. 빼앗기던 빼앗던 결국 남는 건 지긋지긋한 생활인데스.”

 

“돌아온 들생활은 옛날과 똑같았던데스. 이따위 들생,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상관없다고 생각했던데스. 주인님께 할 말이 없었다면 옛날에 죽었을 것인데스.”

 

“진짜 아무 것도 없고 지옥같다고, 이렇게 살고싶지 않다고만 생각했던 들생활이었지만…….”

 

칸쵸는 꽤 오래 아무 말이 없었다.

이따금씩 훌쩍이는 소리가 들리고는 했다.

 

“와타시, 오마에를 알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데스.”

 

그렇게 말하고는 칸쵸는 부자연스럽게 크게 기지개를 켰다

 

“꼬맹이! 콘페이토 멋대로 먹지 말고 남겨두는데스!


 


저 실장석은 허세를 부리거나 거짓말을 할 때 기지개를 펴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41번은 알고있었다.

하지만 41번이 느끼기에는 허세나 거짓말이라기보다는, 꼭 무언가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갔다오겠는데스! 집 잘보고 있는데스!”

 

칸쵸는 그렇게 말하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빗장을 열고 문을 나섰고, 이윽고 찔레나무 울타리 너머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고 41번은 중얼거렸다.

 

“다녀오시는테치.”

 

41번은 그렇게 작게 읊조리거리고는 저 얼룩, 지워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한 번 지워볼까 생각하면서 골판지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10.

 

인간의 길은 실장석에게는 영 맞지 않다.

41번이 말한 것 처럼 실장석에게 길이란 사방이 죽을 수 있는 요소 투성이다.

하지만 칸쵸 역시 들생활을 헛한것은 아니었다.

 

햇빛에 노출되지 않게 그늘로 이동하면 물과 체력을 아낄 수 있다.

배수로로 이동하면 인간에게 밟히지 않고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다. 단, 가끔씩 머리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불씨들을 조심한다.

밤에 이동하는게 안전하다고 착각할 수 있지만 밤의 도시는 고양이들이 돌아다닌다.

도로를 건너는 일은 피해야하지만 어쩔 수 없이 건너야할 때는 다른 인간들이 건널 때를 따라 최대한 빠르게 건넌다.

칸쵸는 그렇게 들실장의 노하우를 최대한 살려 주인의 집으로 향했고,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지만 일단은 사지 온전히 전 주인의 오피스텔 앞에 도달했다.

 

“드디어 온데스……”

 

어느새 밤이 되어 어둑어둑해졌지만 오피스텔 앞은 변한 것이 없었다.

예전에 주인과 갔던 분식집, 옷가게, 세탁소, 오락실……. 무엇하나 변한 것이 없었다.

칸쵸는 쇼윈도의 비친 것을 보았다.

머리에는 기름기와 벼룩이 가득하고, 옷은 곳곳에 구멍이 나있고 살이 접히는 곳은 노랗게 변색되어있는 들실장이 보였다.

하지만 변한 것이 몸 뿐이라면 다행이다. 

자신이 골판지를 어떻게 얻었는지 떠올린 칸쵸는 공포를 느꼈다.

 

혹시 자신은 편지를 전할 자격조차 없는 것이 아닌가?

 

옛날과 몸도 정신도 너무 달라졌다.

자신은 살아남기 위해 주저없이 동족의 뒤를 찌르고 무엇이든 먹어치웠다.

이런 자신이 주인에게 제 멋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칸쵸는 쇼윈도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런 후회는 이미 늦었다.

자신은 깨끗하게 죽기보다는 구차하게 살아남는 쪽을 선택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걸 신경 쓰는 것 보다는 어떻게 하면 주인의 집 앞까지 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

칸쵸는 오피스텔을 올려다보고 한숨을 쉬었다.

 

여기 오피스텔의 관리인은 나이를 꽤 많이 먹었다.

밤이 되면 일을 설렁설렁하는 경향이 있어서, 보통 관리실에 앉아서 CCTV를 옆에 두고 스마트폰으로 연속극을 보는 것이 일상이다.

주인의 집 위치는 계단을 10번 올라가서 복도 맨끝에 있는 집,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저 유리문을 어떻게 하는데스?’

 

건물 입구에 있는 도어락이다.

저것만은 실장석이 어떻게 할 수 없다.

결국 누군가가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따라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방법은 너무 위험하다.

뒤따라가는 자신이 발견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하기에는 너무 변수가 많다.

우연찮게 자신의 기척을 느껴도 위험하고, 자신의 냄새를 맡아도 위험하고, 실수로 소리를 내도 위험하다.

칸쵸는 보험을 하나 들기로 했다.

 

자실장 시절 스스로를 ‘신출귀몰 괴도☆그린그린’ 라고 자칭하던 동네의 이상한 성체실장이 알려준 방법이었는데, 말하기를 자신은 이 방법을 이용해서 부자닝겐들의 집을 수십채를 털어서 세레브한 삶을 누렸다고한다.

 

…솔직히 믿는 것은 아니지만 안 하는 것 보다야 낫겠지.

칸쵸는 비닐봉투에서 보검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호흡을 한 번 가다듬고는 자신의 목부분에 찔러넣었다.

 

 

11.

 

독신자들이 사는 오피스텔에는 의외로 사람들이 꽤 많이 드나든다.

입주민들이야 말할 것도 없지만은, 치킨과 족발을 비롯한 입주민들의 외로운 밤을 달래주는 요식업계 종사자들도 빼놓을 수 없다.

 

오피스텔에서 걸어서 5분거리에 있는 K치킨 사장인 김씨는 오늘도 706호에 혼자 사는 총각을 위해서 크림어니언 치킨과 생맥주 1000cc 두 병을 들고가는 길이다.

굳이 번거롭게 인터폰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여기 비밀번호가 *버튼 누르고 7890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엘리베이터에 타서 706호에 간 뒤, 이 치킨을 종이 두어장과 바꾸기만 하면 된다.

 

‘출입문이 열렸습니다’ 라는 기계음을 흘려들으며 발걸음을 옮기자 로비 자동등에 불이 들어왔다.

지어진지 좀 오래 된 이 오피스텔은 8층밖에 안 되는 작은 곳이고 1층에는 사람이 살지 않아서 1층 로비에는 계단과 엘리베이터, 우편함을 빼면 아무것도 없다.

 

오른쪽에 지하주차장과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고 여기를 지나치면 바로 엘리베이터이다.

그런데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던 김씨의 코에는 지겨운 치킨냄새에 섞여 약간의 구린내가 흘러들어왔다.

음식물 쓰레기국물과 비오는 날의 운동화 구린내가 뒤섞인 것 같은 이 썩은 냄새는 두말할 것 없이 들실장이다.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꾀죄죄한 차림으로 목에 비닐봉투를 둘러멘 전형적인 들실장이 눈에 들어왔다.

굳이 특이한 점이라고 한다면 대못을 입에 물고 있다는 건데…들실장의 민첩성으로는 찌르기도 전에 대가리가 박살날테니 큰 의미는 없다.

 

들실장은 자신과 눈을 마주치니 흠칫하더니 뒤로..가 아니라 앞으로 돌진했다.

자신을 추월할 생각인지 뭔지는 몰라도 이쪽으로 와주면 오히려 잡기 쉬워진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 건물에 들실장이 몇 마리가 들어서건 김씨와 상관없는 일이지만 이 건물에는 자신의 단골들도 많이 살고 있다. 까짓 거 어려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

두 손은 치킨과 맥주가 자리 잡고 있으니 손을 쓸 수는 없지만, 들실장 정도야 누구나 발만 가지고도 두어마리는 제압하고도 남는다.

 

그래도 역시 죽이는 것은 좀 꺼림직하니 일단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짐을 내려놓고 건물 바깥에 적당히 던져버리자, 라고 김씨는 생각했다.

 

보통 들실장을 못 움직이게 제압할 때 가장 깨끗하고 간단한 방법은 그 쓸데없이 치렁치렁한 머리카락을 밟아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백이면 백 그 자리에서 버둥버둥대면서 움직이지 못하거나, 아니면 제풀에 머리카락을 끊어먹고 그 자리에서 정신이 붕괴하게된다.

 

하지만 뭐 이 경우에는

 

“거기 너. 좀 멈춰봐라.”

 

밟기 좋은 실장석용 목걸이 겸 여행가방이 있다.

보통 ‘비닐봉투’ 라고 하지만은.

 

이럴 경우 들실장은 봉투손잡이를 찢거나 풀려고 애쓰지만, 사람의 힘으로도 찢기 힘든 비닐봉투를 실장석의 힘으로 끊을 수 있을 리가 없고, 발에 조금만 힘을 주면 위로해서 벗겨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이 들실장처럼 목에 걸린 봉투손잡이를 들고 아등바등대는 것은 의미가 없다.

최소한 김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응?”



하지만 의외. 놀랍게도 들실장은 손쉽게 비닐봉투에서 벗어났다.

발에는 확실히 힘을 줬으니 오히려 질식해서 죽진 않을까 걱정했는데 들실장은 확실하게 비닐봉투에서 벗어났다.

 

손을 써야하나? 귀찮은데 그냥 냅둘까? 하고 김씨가 고민하던 찰나 비닐봉투로부터 벗어난 들실장은 자신의 행운을 예상한 것처럼 빠르게 지하주차장을 향하는 계단을 향해 내려가…기보다는 굴러떨어졌다.

 

“덱! 데덱!! 데교봇!!! 덱!!”

 

들실장은 비명만을 남기고 지하계단의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김씨는 그 광경을 잡동사니가 담겨진 비닐봉투를 밟은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허, 참 별일도 있구만.”

 

들실장에게 한 방 먹은 것 같아서 기분이 썩 좋은 건 아니었지만, 굳이 바빠 죽겠는데 계단을 내려가서 잡을 정도는 아니었다.

 

저 들실장은 어떻게 탈출한건가, 생각하던 김씨는 곧 월말이라는 것을 떠올리고는 방금 있었던 일 같은 것은 싹 잊어버리고 이런 저런 계산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2.

 

“이…이따이한데수우…”

 

계단에서 화려하게 굴러떨어진 칸쵸는 안도보다는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이를 악물었다.

인간에게 걸리기는 했지만 ‘인법☆허물벗기의 술’, 그러니까 ‘못으로 봉투 손잡이 미리 찢어놓기’는 다행히 통하였다.

칸쵸는 동네에 미친년으로 소문난 그 오바상이 의외로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에 놀라웠다.

 

‘그 오바상, 아마 꼬마닝겐들 과자 훔쳐먹다가 어른닝겐한테 뒤졌지데스?’

 

뭐, 그래봐야 볼 일은 없을 테지만 말이다.

 

칸쵸는 붉은 가방에서 푸드 몇 개를 꺼내서 씹었다.



5층에 도달하기 위해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다른 하나는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 따위 가능할리가 없다.

버튼을 누를 수도 없고, 애초에 어떤 버튼을 눌러야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인간이 탈 때 같이 타는 것은 행복회로를 풀가동해서 생각해봐도 전혀 모르는 층에서 내려서 우왕좌왕하는데 그친다.

 

결국 유일한 방법, 계단을 오르려면 일단은 빨리 부러진 뼈와 살점들을 재생시켜야한다.

칸쵸는 한숨을 내쉬면서 아까 전 급하게 가방에 쑤셔놓은 푸드를 목구멍으로 넘기려다 움찔했다.

이제 보니 이빨도 몇 개 부러진 것 같다.

 

하지만 이 정도는 별거 아니다.

여기까지 오려고 한 것들을 생각해보면 남은 것은 계단을 오르는 간단한 일만이 남았다.

간단한 일이다, 간단한 일.

 

“간단하지 않은데쑤우우우우우!!!!”

 

칸쵸는 계단의 단을 하나하나 오를 때 마다 그렇게 소리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5층 계단을 오르는 것은 건강한 인간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다.

보통 들실장의 키는 20~30cm이고 자실장 시절 사육실장으로 자라 발육이 좋은 칸쵸는 30cm. 대충 인간의 ⅙ 크기이다.

그리고 이 오피스텔의 계단 한 칸의 높이는 ‘단높이 180이하, 단너비 260이상’ 이라는 건축법을 충실히 따른 18cm이다.

30cm인 칸쵸에게 18cm의 계단은 180cm의 인간으로 치자면 약 110cm높이와도 같다.

즉, 인간으로 치자면 한 칸이 배꼽까지 오는 계단들을 빌딩 30층 높이까지 오르는 것이다.

게다가 팔다리가 짜리몽땅한 실장석에게는 그 부담이 몇 배로 더 커진다.

 

“우구구구…..”

 

한 칸.

 

“으그그그그…”

 

한 칸.

 

“으갸갸갸갸걋!!!”

 

한 칸.

 

온 몸에 긴장을 놓을 수 없다.

난간을 붙잡는 손에 힘이 풀려도 떨어지고, 무게중심이 실수로 뒤쪽으로 쏠려도 떨어지고, 다리에 힘이 빠져도 떨어진다.

떨어지기만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기절이라도 해버린다면 그대로 끝이다.

 

중요한 것은 아까 가방에 쑤셔 박았지만 문제는 못이다.

봉투는 아까 써버렸고 손은 계단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칸쵸는 별 수 없이 입으로 못을 물고 올라갔다.

못을 앙다문 입에 이빨은 이미 거의 다 박살났고, 파고드는 잇몸에서는 피가 흘러내린다.

사력을 다해서 반층을 오르고 쉬면서 끊어진 근육과 손실된 혈액을 재생할 때 까지 기다리고 다시 오르기를 반복.

 

못을 버릴까, 가방 안의 보존식을 버릴까 오르면서 수백 번도 생각했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

편지를 전하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었던 어제까지의 칸쵸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칸쵸는, 돌아가려 하고 있다.

주인의 집에 이 편지를 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와타시는……돌아가야하는데스!’

 

살아서 그 골판지로, 그 꼬맹이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 쓸데없이 말 많고 속을 알 수 없고 힘만 쎈 그 건방진 꼬맹이를 보고 싶다.

그 꼬맹이의 부모도 뭣도 아니지만, 그 녀석이 성체가 되어서 자를 낳는 것을 볼 수 있다면 어느 날 죽어도 무섭지 않을 것 같다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지금은 움직이는데스!’

 

지금은 3층. 앞으로 2개의 층만 더 오르면 된다.

하지만 한 칸 한 칸을 오를 때 마다 위석을 쥐어짜는 듯한 고통이 밀려온다.

잇몸을 파고드는 대못의 고통조차 잊혀진지 오래고, 달빛도 드문 계단에는 자신의 숨소리만 너무나 선명하다.

힘이 빠지는 팔과 다리에 제발 힘을 내달라고 엎드려 빌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그 꼬맹이, 와타시에게 왜 죽으러가냐고 했던데스.’

 

그 때는 미처 말하지 못했지만, 지금이라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다.

 

‘와타시는, 살기 위해 가는 것인데스!’

 

죽을 정도로 힘든 계단에서 이미 칸쵸는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겼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칸쵸는 이 계단을 한 칸 오를 때마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살아있는데스…….”

 

3층 .

 

“와타시는 살아있는데스…….”

 

4층.

 

“와타시는…살아가는데스!”



4층 반.

 

“와타시는 앞으로 살아갈 것인데스으으으으!!!”

 

…5층.

 

약 네 시간의 악전고투 끝에 칸쵸는 실장석들에게는 위업이라고 할 만한 일을 해냈다.

 

“푸후후훕..푸후..푸후후후후훕…푸하하하!!!”

 

5층에 도달한 칸쵸는 계단통로에서 누워서 모든 것을 잊고 폭소를 터뜨렸다.

어쩌면 이 소리를 누군가가 들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그 순간, 그 곳에서 그녀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미친듯이 웃었다.

 

“해낸데스! 푸캬캬캬캬!! 해낸데스! 와타시가 해낸데스! 데퍄퍄퍄퍄퍄!!!”

 

칸쵸는 내가 해낸 것을 보라고, 내가 지금 얼마나 기쁜 줄 아느냐고, 난 지금 여기서 이렇게 살아있다고 세상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푸캬캬캬캬캬!! 데퍄퍄퍄퍄퍄!!! 데퍄퍄….데갸악!! 아픈데스!”

 

한참을 웃던 칸쵸는 갑자기 몰려오는 통증에 몸을 뒤틀렸다.

긴장이 풀리고 나니 지금까지의 피로와 통증이 한번에 밀려오면서 온몸이 미친 듯이 아리고 쑤셔왔다.

하지만 그 고통 속에서 칸쵸는 살아있다는 환희를 느꼈다.

조금만 쉬면 몸이 재생될 테고 남은 것은 주인의 집 문 틈에 편지를 꽂아두고 다시 골판지로 돌아가면 될 뿐이다.

어쩌면 돌아가는 길이 험난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자신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어느 건물이든 그렇지만 건물에는 계단이 있고, 계단이 있는 통로에는 각 층으로 이어지는 문이 있으며 백이 백 그 앞에는 흡연자들이 애용하는 창문과 꽁초가 수북한 종이컵이 있다.

칸쵸는 누워서 통로 윗쪽에 뚫린 그 창문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어느덧 새벽 네시에 가까워졌고, 칸쵸가 바라보는 하늘 동쪽에는 그믐달이 걸려있었다.

예전에 주인과 달구경을 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칸쵸는 감사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지금 숨을 쉬고 있다는 일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자신이 지금 고개를 들어 저 달을 바라볼 수 있다는 일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저 가느다랗고 아름다운 하나의 달과, 노란 바깥과 검은 심을 가진 동그란 두 개의 달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야옹.”

 

안 된다.

 

“야옹.”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저 소리는 들려서는 안 되는 소리이다.

어제였어도 괜찮다. 내일이어도 괜찮다. 아니 하다못해 여기가 아닌 다른 곳이어도 괜찮다.

하지만 지금, 오늘, 이 시간에, 여기서, 내 귀에 들려도 될 소리는 절대 아니다.

 

칸쵸는 이를 딱딱 부딪치며 천천히 일어나 창문을 바라보았다.

 

“야옹.”

 

하지만 아무리 보아도 저 검은 털과 노란 눈의 죽음은 창문에 앉아있다.

 

“야옹.”

 

칸쵸는 운이 좋았다.

오는 길에 사고를 당하지도 않았고, 관리인이 순찰을 돌지도 않았으며, 도어락을 열 때 따라서 들어온 사람은 두 손이 꽉 찬 상태였다.

만일 이 행운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칸쵸는 지금쯤 길바닥에 이름 모를 얼룩이 되어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거듭된 그 행운은 지금 여기서

최악의 형태로 결과를 맺으려고 하고 있었다.

칸쵸는 재빨리 양손에 대못을 고쳐 잡고 고양이를 바라보았다.

 

‘제발그냥가는데스제발그냥가는데스사라져주시는데스무엇이든할테니제발그냥가주는데스’

 

고양이는 낮에 이 건물에 다른 사람을 따라 들어온 들고양이로 오피스텔을 나가려 하루 종일 건물을 헤맸지만 출구를 찾지 못하였다.

매우, 배고픈 상태이다.

간절히 기도하는 칸쵸 앞에 고양이는 소리도 없이 창가에서 바닥으로 내려와 칸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칸쵸는 그 눈빛에 온몸이 덜덜덜 떨려왔다.

 

‘도망치는데스?’

 

칸쵸는 들실장으로 살면서 고양이에게서 도망치려다 죽는 실장석들을 지긋지긋하게 봐왔다.

지그재그로 뛰던 똑바로 뛰던 자를 미끼로 도망치던 저 민첩하고 영악한 포식자는 언제나 소리 없이 다가와 뒷목을 물어뜯는다.

 

‘싸워야…하는데스…?’

 

싸우려고 하는 녀석들도 봐왔다.

대못이나 플라스틱 막대, 아주 가끔씩은 식칼 같은 것으로 고양이를 물리치려는 들실장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극도의 긴장으로 행복회로를 가동하다가 죽거나, 작은 생채기만 내고 죽거나, 너무 무거운 무기를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하고 죽었다.

 

고양이는 상체를 낮추고 앞발은 앞으로, 하체는 높이 들어올리고 꼬리를 길게 뻗었다.

명확한 공격자세이다.

 

‘포기하는…데스…?’

 

…운이 좋다면 저 고양이는 목을 한 번에 물어 숨통을 끊어줄 것이다.

아니면 직접 이 대못으로 위석을 찌르는 방법도 있다.

다만 그렇게 하면

 

“…웃기지마는데스.”

 

확실하게 죽게 된다. 그럴 수는 없다. 절대 그럴 수는 없다.

 

대못을 고쳐들고 고양이를 바라본다.

고양이는 여전히 칸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이 빈틈을 보이는 순간, 목을 노리고 달려들 것이다.

 

“웃기지마는데스!!”

 

입으로는 허세를 부리고 있지만 아직도 공포로 위석이 떨리고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칸쵸는 살아있으니까.



“와타시는 살아있는데스…!”

 

살아가기로 했으니까.

 

“그리고…살아돌아갈 것인 뎃샤아아아아아아!!!!”



 칸쵸의 고함을 시작으로 고양이와 칸쵸는 서로에게, 서로의 생명을 향해 달려들었다.

 

 

 

 

 

 

Epilogue1

 

오늘은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쉬는 토요일이다.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최소한 501호 거주자한테는 맞는 말이다.

 

“토파즈~ 입구에 혹시 우편물 있으면 좀 가져올래?”

 

“하이데스!”

 

501호에는 모처럼 사람과 실장석이 모두 집에 있었다.

사람은 모처럼의 휴일을 만끽하며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고 있었고, 실장석은 그런 주인의 옆에서 잡다한 수발을 들어주고 있었다.

토파즈가 우유투입구를 통해 복도로 나갔다.

그러자 토파즈 앞으로 건물 청소부가 복도를 닦으면서 지나갔고 501호 앞의 복도는 워셔액으로 반질거렸다.

 

“와타시도 저 닝겐사마처럼 부지런하게 살아야겠는데스.”



하고 중얼거리면서 문 앞에 우편물들과 전단지들을 확인하던 토파즈는 문틈에서 이상한 것을 보았다.

 

“뭐인데스?”

 

흔해빠진 하얀 봉투였지만, 이상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인간의 높이에는 한참 낮은 실장석인 자신의 눈높이에 끼워져 있는데다가 봉투 군데군데 빨간색 얼룩이 져있고, 가장 점은 은 봉투 한 가운데 에 괴악한 필체로 ‘주인님께’라고 적혀있는 것이었다.

어느 글자는 봉투에 꽉차게 크고 어느 글자는 또 우표만큼이나 작아 아무리 생각해도 초등학생이 썼다고 보기도 힘든 필체였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끔찍하게 생긴 봉투인데스.”

 

끔찍하게 생긴 봉투였다.



‘이걸 어떻게 하는데스?’



물론 토파즈도 이 집에 살긴 하지만 설마 자신에게 온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었다.

그럼 남은 것은 이 집에 사는 자신의 주인인데……인간끼리는 주인님이라는 호칭은 잘 안 쓴다, 보통.

501호의 거주자를 ‘주인님’이라고 부를만한 생명체는 자신이 아는 한 둘 밖에 없다.

하나는 자신이다. 다른 하나는

 

“설마……”

 

토파즈는 자신이 이 집에 왔을 때 즈음 집을 탈출한 어느 실장석을 떠올렸다.

그 날, 있었던 일을 여차하면 다시 ‘교육’받을 각오로 주인님께 말씀드렸지만, 주인님은 그저 약간 슬픈 얼굴로

‘결국 그렇게 되었구나.’라고 말하며 자신을 쓰다듬어 주었다.

 

‘혹시라도 위험한게 있으면 어떻게 하는데스? 와타시가 먼저 열어서 확인하는게 좋지 않겠는데스?’

 

하고 한참을 고민하던 토파즈는 주인의 명령이 ‘우편물이 있으면 가져와라.’라는 것을 기억하고 결국 그대로 따르기로 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봉투를 햇빛에 비춰보기도 하고 흔들어보기도 한 결과 접혀진 종이 한 장과 딱딱하고 동글동글한 무언가가 두어개 들어있다는 것을 알아냈다.

토파즈는 별수 없이 그리고는 다시 우유투입구를 통하여 집에 들어왔다.

 

“어 토파즈. 뭐 별거 온거 없지?”

 

“이거, 아마 주인사마께 온 것 같은데스.”

 

토파즈는 머뭇거리며 봉투를 여전히 침대에서 누워있는 주인에게 전달하였다.

 

“응? 이게 뭐니?”

 

“그건 죄송하지만 와타시도 잘 모르겠는데스. 죄송한데스.”

 

“참, 매번 말하지만 신경쓰지말래두. 봉투는 왜 이래? 글씨는 이게 또 뭐람? 주…인…님…께……?”

 

개발새발로 써져있는 글씨를 읽기 힘든지 인상을 찌푸리며 읽던 토파즈의 주인은 표정이 싹 변하였다.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편지를 꺼내어 읽었다.

토파즈는 그런 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지만, 주인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생전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웃는 것처럼, 우는 것처럼, 슬픈 것처럼, 화가 난 것처럼 여러 표정이 뒤섞여 있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미안하지만 토파즈. 잠시 나가있어줄래?”

 

토파즈는 말없이 목례를 꾸벅하고는 뒷걸음질로 소리없이 방에서 나와 살며시 문을 닫았다.

 

토파즈는 문득 그 실장석이 집을 나선 날을 생각했지만, 그 날 이후로 집이 크게 달라진 것은 없었다.

당연히 유리조각은 깨끗하게 정리되었고 실장석용 물건들은 거의 전부 토파즈가 물려받았고 여전히 사람 하나와 실장석 하나가 이 집에 살았다.

그리고 그 실장석은 지금 방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고, 방 안에서 사람은 어떤 편지를 보고 있었다.

 

주인은 원래 있던 그 실장석의 이야기를 별로 하지 않았다.

우연찮게 그 화재가 나올 때는 대부분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웃음으로 넘겼다.

때문에 자신도 왠만하면 그 일을 입에 올리지 않으려 했지만, 그 실장석 이야기가 나올 때 주인의 표정은 뭐랄까

 

‘따뜻한 표정이었던데스.’

 

좋은 마지막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 실장석과 주인의 추억이 모두 불유쾌했던 것만은 아닐 것이다.

자신은 모르는 따뜻한 기억들을 떠올리며 그런 표정을 지으시는 거겠지, 라고 토파즈는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도 언젠가 그런 따뜻한 기억들 중 하나가 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하였다.

 

 

Epilogue 2

 

사람은 대체로 깨끗한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깨끗하게 하는 것을 좋아하냐는 건 좀 다른 문제이다.

그런 이유로 이 오피스텔 건물주에게 고용된 숙련된 청소부 최여사는 토요일임에도 아침부터 나와서 건물 내 불순물 제거와 대리석 바닥 거울화 작업에 여념이 없었다.

지난주도 지난달도 그랬던 것처럼 최여사는 청소용 카트를 밀고 다니며 8층부터 쭉 훑고 내려오기 시작했다.

 

최여사가 청소를 하면서 일반적으로 보는 것은 담배꽁초, 어디서 발행됐을지 모를 영수증, 아이스크림 껍데기, 재떨이 역할을 했을 종이컵 등이다. 

그리고 운 좋을 때는 500원짜리 동전이나 지폐같은 것이 종종 부수입이 되고는 한다.

하지만 6층에서 썩은 냄새를 맡고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며 5층 계단통로로 내려온 최여사가 보게 된 것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다.

 

“어휴, 진짜. 내가 짐승새끼들 들어오는지 안 들어오는지 똑바로 좀 보라니까! 일을 어떻게 하는거야 증말!”

 

지난 달 즈음해도 건물 복도에 실장석 일가가 온 사방에 똥을 싸지르고 죽어있어서 관리인에게 소리를 질러대며 제발 들짐승 좀 안들어오게 해달라고 했지만 그 망할 영감탱이는 귓등으로도 안 들은 모양이다.

똑같이 건물주에게 고용된 입장이라 어지간하면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이번만은 반드시 말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걸 언제 다 치운디야, 아이고 정말 미치겠구만 아주!”

 

최여사는 짜증을 내면서 청소용 카트에서 쇠집게를 집어들었다.

쇠집게가 목표로 한 것은 복도통로 한 가운데에 목에서 피를 흘린채 죽어있는 검은 고양이었다.

 

“근데 이 고양이는 왜 죽은거래?”

 

사람 손도 피하는 날쌘 고양이가 뜬금없이 복도바닥에 나자빠져 죽어있는 것이 의아한 최여사는 고양이 목을 집게로 집다가 뭔가 딱딱한 감촉이 드는 것을 느꼈다.

 

“어머 세상에 이게 뭐래?”

 

최여사는 고양이 시체를 내려놓고 집게로 이리저리 뒤적이며 보다보니 의 목에는 길다란 대못이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어떤 미친놈이 고양이 목에 이런 짓을 해논거래? 으이구, 길가다 확 뒤졌으면 좋겠네.”

 

어떤 정신나간 인간이 미끼로든 뭐든 고양이를 잡아서 못으로 목을 찔러 죽였다, 라는게 최여사가 내린 결론이었다.

어쨌건 고양이를 죽인 게 미친 놈이건, 아니면 다른 미친 동물이건 월급을 받아가려면 고양이 시체가 있었는지도 없었는지도 모르게 치우는 것이 최여사의 일이다.

찝찝하지만 고양이시체를 일반 쓰레기 봉투에 넣고, 온갖 청소약품을 동원해서 냄새와 핏자국을 지웠다.

 

“휴우…….”

 

그래도 죽은지 그렇게 오래되지는 않은 모양인지 시체를 치우고 약품을 뿌리자 냄새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이제 창문을 열어두고 다른 곳을 청소한 뒤에 와서 냄새가 빠졌는지 확인하면 오늘 일은 대충 끝난다.

 

그런데 핏자국을 치우던 최여사는 뭔가 발견했다.

 

‘핏자국이 복도 쪽에 이어져있네?’

 

또 다시 불길한 예감에 휩싸이며 복도로 간 최여사는 이번엔 그냥 한숨을 내쉬었다.

최여사가 복도에 진입하자마자 눈이 마주친 것은 하반신이 토박나 상반신만 남은 실장석이었다.

너무나도 표정이 생생해서 순간적으로 살아있는 줄 알았지만, 회색눈을 까뒤집은 걸 봐서는 명백하게 죽은 실장석이다.

 

“에휴…이건 그래도 금방 치우겠네.”

 

회색눈을 까뒤집고 죽어있는 실장석은 옷과 피부에 찢겨진 자국이 수두룩했고, 제일 인상깊은 것은 죽어있음에도 마치 살아있는 것 처럼 부릅뜬 눈빛이었다.

 

“요즘 참피새끼들은 표정도 살벌하구만.”

 

그렇게 중얼거리며 실장석을 치우려던 최여사는 멈칫했다.

어깨에 붉은 크로스백을 메고 있었기 때문이다.

혹시 거주민이 키우는 사육실장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지만, 때국물이 줄줄 흐르는 꼴은 들실장이 분명하다. 어디 전사육실장것이라도 약탈한 것이다, 라고 최여사는 결론지었다.

 

“근데 애 반쪼가리는 어디갔데?”

 

만약 입주자가 최여사가 놓친 실장석 하반신을 발견하고, 소란이라도 피우면 최여사는 이 건물 청소를 그만둬야할지도 모른다.

죽은 실장석의 나머지 반쪽을 찾으려고 5층 복도와 계단통로를 열심히 두리번 거리던 최여사는 또 한가지 이상한 걸 발견했다.

 

“핏자국이 요상하게 났구만.”

 

핏자국은 계단통로에서 복도로, 복도를 가로질러 501호까지 나있었고 기묘하게도 501호에서 반환점을 돌아 다시 계단통로 앞에까지 나있다가 중간에 이 반토막 실장석이 죽어있었다.

 

하지만 핏자국은 핏자국이고 지금 중요한 것은 저 뒤진 실장석의 반쪼가리를 찾는 것이다.

한참을 두리번 거리던 최여사는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그렇지 여기 있었구만.”

 

쓰레기봉투에서 아까 넣은 고양이 시체의 입을 들춰보니 아니나 다를까 죽은 실장석 하반신이 있었다.

 

“야가 요 참피새끼를 잡아먹고 뒤졌나보구만?”

 

그렇게 결론짓고 청소를 하려던 최씨는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이상하단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온걸로 보자면

 

1.검은 고양이가 계단통로에서 실장석을 반토막내서 먹었다.

2.그런데 그 고양이를 어떤 미친놈이 못으로 목을 찔러 죽였다.

3.반토막난 실장석은 계단통로에서 복도로 기어갔다.

4.복도로 기어갔는데 501호앞까지만 간 다음에 유턴해서 다시 계단통로 앞까지 왔다. 그리곤 죽었다.

 

대체 이건 무슨 상황이란 말인가?

고양이가 참피를 잡아먹고 있는데 못으로 목을 찔러 죽인 것은 누구이고 이 참피는 왜 501호 앞까지 기어갔다는 말인가? 기어갔다 치더라도 왜 다시 계단통로로 돌아오려고 했단 말인가?

 

“에이 내가 알게 뭐래.”

 

어쨌든 고양이나 참피나 모두 일반쓰레기 봉투에 들어갔다.

무슨 우여곡절인지는 청소부인 자신이 알바 아니다.

 

오늘 퇴근 시간은 좀 늦어지겠네, 라고 중얼거리며 최씨는 청소를 마치고 다음 층으로 내려갔다.

청소가 끝난 5층은 핏자국 하나 얼룩 하나 남기지 않고 깨끗해졌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Epilogue 3

 

“토파즈. 미안한데 재떨이 좀 가져다줄래?”

 

“하이데스!”

 

다른 생각을 하다가 정신을 차린 토파즈는 황급히 재떨이를 들고 방 안에 들어갔다.

그런 토파즈의 눈에는 주인이 찰칵 소리를 내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이 보였다.

 

“여기있는데스.”

 

“고마워, 토파즈.”

 

그렇게 말하곤 주인은 깊게 연기를 들이쉬었다 내쉬고는 재떨이에 담뱃재를 탁탁 떨어뜨렸다.

읽고 있던 편지와 봉투, 그리고 못 보던 사탕 몇 알이 침대 옆 서랍 위에 올려져 있었다

주인은 침대에 앉아서 고개를 푹 수구리고는 한참동안 담배를 피웠다.

 

주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파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토파즈가 알기로는 주인은 분명 두 달째 금연 중이었다

무엇이 주인이 참던 담배를 피우게 만든 것인지, 토파즈는 알 수 없었다.

연거푸 줄담배를 피우던 주인은 세 대쯤에서 멈추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응, 토파즈. 잠깐 이야기 좀 들어볼래?”

 

지금은 최대한 말을 적게하는 것이 좋다, 라고 판단한 토파즈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그 녀석에게 과자를 사주려고 슈퍼마켓에 간 적이 있었어.”

 

그 녀석이 누굴 지칭하는 것인지 토파즈가 눈치채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주인은 토파즈의 사정은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것 처럼 물기서린 목소리로, 평온한 억양으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 녀석이 그러더라고. ‘항상 와타시만 먹는 건 미안한테치. 오늘은 와타시가 참을테니 주인님이 먹고 싶은 것을 사는테치!’ 라고. 그런데 그 녀석이 말을 그렇게해도 일주일에 한 번 먹는 과자를 참기가 얼마나 힘들겠어. 그래도 그 마음이 너무 기특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걸 고르겠다고 해놓고는 은근슬쩍 그 녀석이 제일 좋아하는 걸 골랐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녀석이 ‘와타시랑 주인님이랑 똑같은걸 제일 좋아하는테치! 기적인테치!’ 하며 놀라더라구.”

 

그러고는 주인은 서랍 위 봉투에 놓여진 청포도 사탕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청포도 사탕말고 다른 것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참은 상이라는 구실로 그 녀석한테 사탕을 한 알 줬어. 그러니까 그 녀석은 ‘주인님이 먹기 전까지는 와타시도 안먹겠는테치!’ 하면서 고집을 부리더라고. 하는 수 없이 나도 사탕을 한 알 먹고 그 녀석 입에도 한 알 넣어줬지. 그러니까 그 녀석이 엄청 좋아하며 웃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 사탕이 그렇게 맛있냐?’라고 하니까 그 녀석이 그러더라고.”

 

주인은 서랍 위의 청포도 사탕을 천천히 하나 까서 입에 넣었다.

손에서 삐져나온 사탕의 껍질은 군데군데 시커먼 때가 잔뜩 묻어 변색되어있었다.

 

“‘사탕이 좋은게 아니라 주인님이랑 같은 걸 좋아한다는게 너무 기쁘다’라고……’

 

하지만 입에 넣은 녹색 사탕에서는 옛날과 똑같은 시큼한 단맛이 났다.

 

“이 사탕, 여전히 달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입안에서 사탕을 굴리던 주인은 문득 고개를 들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옛날 이 집엔 

한 사람과 한 실장석이 살았다.

 

지금도 이 집엔

한 사람과 한 실장석이 산다.

 

“오랜만에 피워서 그런가 연기가…좀…맵네…….”

 

그리고 어느 한 사람의 추억에

청포도 사탕을 좋아하던 한 실장석이 아직도 살고있다.



















댓글 1개:

  1. 이거 후속작도 나왔는데 그것도 올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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